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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3/22/2013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2. 네 번째 청원: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

 

오늘날은 잘못된 번역이다. 정확한 번역은 오늘이다. 오늘날은 이 시대를 뜻한다. 새 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오늘로 바로 잡혀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차로 뉴욕으로 간다라고 말해야지, ‘내가 오늘날 차 타고 뉴욕으로 간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일용할(헬라어:에피우시오스) 양식에서 일용할로 번역된 단어에 대하여: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한 번 나오는 단어이다. 이렇게 한 번만 나오는 단어를 하팍스 레고메나라는 전문 용어로 부른다. 에피우시오스는 에피(전치사:) 와 우시아(존재,본질)로 되어 있는 합성어다. 따라서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가 있다. 존재에 필수적인,.오늘을 위한,.다음날을 위한,.미래를 위한, 다 가능한 번역이지만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따라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개역성경 및 개역 개정 번역은 일용할로 공동번역은 오늘로 번역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일용할 양식"은 구약의 사상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16:17-18, 21 만나 사건(각 사람이 하루에 먹을 만큼의 분량씩 매일 매일 광야에서 40년 동안 거두었다. 여섯 째 날에는 두 배의 만나를 거두었다. 갑절의 오멜! – 안식일이라는 신학적인 의미도 들어 있다.

*양식(:알토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자적으로는 우리의 빵(our bread)이다. 여기서도 일인칭 복수 인칭대명사가 우리말 번역할 때에 빠졌다. 빵이란 1세기 유대 서민들의 주식이 보리로 만든 주먹크기의 까무잡잡한 주먹밥이다. 생활이 좀 윤택한 사람들은 밀로 된 빵을 주식으로 먹었다. 예수의 공동체가 가난한 서민들이기에 보리로 된 빵을 먹었을 것이다. 서구인들에게는 빵으로 번역하면 되지만, 우리들처럼 쌀을 주식으로 쓰는 밥상문화에서는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까? 같은 단어를 마태복음 4(예수의 첫 번째 시험)에서는 떡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떡은 늘 먹는 것이 아니다. 백일이나 돌이나 어떤 기념행사가 있을 때나 먹는 것이 떡이다. 늘 먹는 것은 밥인데 밥은 food이기에 아직 조리가 되지 않은 raw food로서 양식(먹을 거리 전부)으로 번역했다. 잘 된 번역으로 생각한다.

*양식은 물질적인가 영적인가? 세 가지의 해석이 존재한다. 1. .육신의 생명을 위한 양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먹는 것 전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주 전반에 필요한 물질적인 필요를 말한다. 2.영적인 양식(spiritual food)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영적인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 오늘의 만나라고 부르지요. 3.이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초대 교회의 매일의 성찬식에서 쓰여졌다고 해석한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해석을 취할 것인가? 양식은 좁은 의미로는 육신의 양식을 넓은 의미로는 영의 양식을 다같이 간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순전히 육적인 양식으로만 가르쳤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서민들이 매일 매일 끼니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교회에서는 예배와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혹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해석이 발전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동사 주옵시고에 대하여 해석해 봅시다. 누가복음에는 주다(헬라어:디도미)라는 동사가 현재.명령형(헬라어:디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명령형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날마다 라는 부사어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계속해서 주십시요라는 청구가 됩니다. 그 반면에 마태복음에는 그 동사가 단순과거.명령형(도스)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 한번 과거에 일어난 일을 말할 때 쓰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오늘이라는 부사가 사용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한번만 주십시요.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똑같은 간구를 드리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난한 서민들에게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간구를 하라고 시키시지 않았을까? 쪼잔하게 일용할 양식이 뭔가, 구할 바에는 큰 돈을 벌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위하여 좋지 않겠는가? 겨우 겨우 목숨 달아 나갈 수가 있을 정도의 양식만을 구하라고 시켰는데 우리 주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의 서민들은 품을 팔아서 하루 하루 벌어서 먹고 살았다. 오늘은 다행히도 자신이 hire되어서 일을 함으로써 입에 풀칠을 했는데, 내일도 할 수 있을까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4번째 청원이 절실히 그네들에게는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오늘 먹고 나면 내일은 양식이 없는가? 넘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기도할 필요가 없는가? 아니다. 해야 한다. ? 비록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부자들은 그 부에 대한 관리인이기 때문이다. 즉 청지기다. 모든 부에 대한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부자도 하나님께 청구하여서 써야 한다. 이 청원과 관련되어 있는 우리의 신분은 무엇인가? 성도는 모두 거지다./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입에 들어가는 먹을 거리만 가리키는가? 아니다. 보스톤 땅에서 우리네 삶에 필요한 의식주 전반에 필요한 최소한의 거주 비용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주택비도 필요하고, 자동차도 필요하고, 보험도 들어야 하고 아이들 교육비도 필요하고, ,가방,신발, 등등의 필수품을 사서 써야 하고, 또 기호품, 커피도 마셔야 하고, 간혹 식당에서 손 접대를 위하여 외식도 해야 하고,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품위 유지비도 필요하고, 이런 등등의 생활비용 전체를 가리킵니다. 엥겔계수? 슈바베 계수?/이 기도는 우리의 결핍,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달라는 말이죠. 4:19(하나님은 넉넉하신 분)-영광 가운데 그의 풍성하신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너희 모든 부족,결핍을)  채우시리라.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어서 부를 쌓아 놓게 해 달라는 간구가 아니다. 그러면 돈 버는 것은 잘 못된 신앙관인가? 아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사업에 성공해서 돈 버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내가 일용할 양식 이상으로 돈을 벌었다면 그 돈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보면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번영의 신학/십자가 신학과는 반대가 되는 신학적 입장/예수 믿는 목표를 번영(물질적인 부와 건강)에 두고 있다. 가난하고 병든 것은 신앙이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는 입장이다. 잘 사는 것이 신앙의 고울인가? 아니다.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었을 때에는 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지만, 의식주 전반에 채움이 있어서 먹고 살 수가 있는데도 돈 버는 일이 신앙의 목적이 되었다면(기복신앙) 문제가 있다. 부와 번영은 우리 주님을 믿고 따르는 동안 신앙의 결과로 받으면 될 것이다. 부와 명예와 권세가 신앙의 결과로 주어지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네 번째 청원에는 번영의 신학이 들어 있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 신앙이 들어 있다.  

12:13-21/소유냐 존재냐?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었느냐가 내 인생길 다간 후에 남는 것이지 내가 얼마나 벌어서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소유는 영원까지 남는 것이 아니다. ,명예도 권세도 모두 땅에 놓아두고 영원세계에 들어간다. 영원까지 남는 것은 내가 천국 들어갈 때에 어떤 존재, 어떤 불멸의 인격이 되어 있느냐이다. 가장 나 다운 내가 되어 있느냐에 값진 인생을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가 결판난다. 누구 비슷한 사람으로 누구 같은 사람 될려다가 죽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연예계의 인기 높은 인물, 정치, 경제계의 어떤 인물, 또는 정신 세계나 영적 세계에 영향력 높은 인물을 카피하면서 살아가서는 안된다. 가장 너만의 모습을 세상에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되라! 15-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21-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이 네 번째의 청구는 잠30:7-9/아굴의 기도와도 일통한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자족하는 삶을 갈구한다. 없어도 기쁘고, 있어도 기쁘다.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면서 불만을 토로 하지 않는다. 없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어도 그것 때문에 신앙이 뒷걸음치지 않는다. 부가 있다고 돈이 주는 안일함 때문에 신앙이 뒷걸음치지도 않는다. 이런 삶이 자족하는 삶이다. 최근 일본의 청년들-사토리(깨달음) 시대(아사이 신문에서 발표)! 장기적인 불황 때문에 내일에 대한 꿈, 비전도 삶의 목표도 없이 그냥 하루 하루 산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일하면서도 승진에 대한 야망도 없다. 일을 많이 해야 하니까 힘들어진다면서. 인생의 기쁨도 희열도 열정도 없이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하루 하루 살아 가는 청년들인데,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도 없고, 사치품이나 명품에도 관심이 없는 청년들을 빗대어서 사토리 시대의 청년들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보면 자족하는 삶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외향은 자족과 비슷하지만, 자족하는 삶과는 다르다. 자족하는 삶은 사토리 청년들과는 달리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삶의 기쁨과 희열과 열정이 넘치는 점에 있어서 다르다.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네 번째 청원에는 모든 형편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정신을 가르치고 있지요. 4: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당신은 왜 양식 청원이 죄사함의 청원(다섯 번째 청원)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가? 영적인 청원이 양식 청원보다 먼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양식청원을 먼저 하는 이유는 목숨을 연장시켜서 죄사함의 은혜에 이르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깔려 있다. 죄사함을 위한 청구를 하다가 그 은혜를 받지 못하고 육신의 기력이 다하여 죽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원치 않을 것이다. 죄사함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목숨을 길이 연장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가 있다.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벧후3:8-9

 

다섯 번째 청원: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And  forgive  us  our  debts , as   we  forgive  our  debtors . 병행귀절인 누가에는 죄를 하말티아로 표현했지만 마태는 빚(debt)의 개념을 도입하여서 죄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마태의 용어는 오페이레마를 쓰는데 이것은 금전상의 빚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개역성경은 마태의 빚 (여자적인 의미로)을 죄로 번역했는데 잘 된 번역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죄는 하나님께 갚아야 할 부채로 죄인을 채무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도는 조건적이고 보상적입니다. 자신들이 타인을 용서한 만큼, 또한 공로와 선행을 쌓은 만큼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공로나 행위에 근거하여서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구하는 청원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이 내게 입힌 손해와 죄를 용서하므로써 공로를 쌓고 그 반대급부로서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사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면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근거나 권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사함을 청구할 수가 있는 조건이나 자격일 뿐이다./요일3:21-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이나 권리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우리들이 마음 속에 해묵은 증오와 반목과 갈등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 죄사함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이웃이 내게 입힌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죄 사함을 위한 조건이나 자격일 뿐입니다.  

*또 다른 해석을 소개해 본다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헬라어 단순과거형인 아페카멘을 아람어로 번역해 볼 수가 있는데, 아람어로는 완료형이 되어야 하는데,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지 않고 단순히 동작이 완료 되었느냐 안되었느냐에 따라서 완료형과 미완료형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이것은 아람어에서는(예수님 당시에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동시적 완료형(perfecticum coincidentiae)이 된다. 따라서 번역은:하나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앞부분은 용서에 대한 청원이나 뒷부분은 일종의 서약(서원)과 같다.

우리들이 예배 드리는 중에 또는 기도하는 중에 이웃이 내게 지은 죄가 생각이 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 그 이웃에게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예배를 중단하고 이웃에게 말하고 와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에는 나의 죄를 먼저 하나님께 사하여 달라고 청구한다. 그와 동시에 그 기도의 자리에서 내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서약하면 된다. 기도가 끝난 후에 내게 죄 지은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선포하면 된다.


천재소년

2013.04.01 23:41:04

설교 음성파일 링크 : http://www.churchboston.org/sermon/03221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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