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79     

금요기도회 :3/6/2015

대표기도:  <선교부>

찬송가:                                                                                                                                                                                 

 

1.           좋은 교회란? 사랑이 있는 교회! 사랑이 들어간 교회 이름이 많다대표적인 교회가 서울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 보스톤에도 사랑의 교회가 있지요. 그러나 아아로니칼 하게도 사랑이 없어서 싸움박질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어떤 교회 이름이 등장했나요? 사랑제일교회! 큰 사랑 교회! 참사랑 교회! 참사랑 교회에 다른 교회에서 볼 수 없는 그런 사랑이 있던가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쳐 나고 있는가교회 안에서 있어야 하는 것이 세가지 있다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세 가지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교회는 어디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켐연장 교회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그 곳이 어디이든지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기록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예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뱃지와 같습니다. 13:34-35<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의 서로 간의 사랑이 어디까지 자라나야 하는가? 예수께서 우리들 하나 하나를 사랑하신 차원까지 자라나야 한다. 우리가 하고 현재 하고 있는 사랑의 높이 깊이와 넓이는 얼마나 되는가자라나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말입니다. 4: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모든 면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죄악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도 자라나야 하고, 이것은 공의로운 성품이지요.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자라나야 하고요, 이것은 사랑이라는 측면이고요. 또한 지혜로움이라는 측면에서도 자라나야 하고요. 떠 어떤 측면? 능력을 행하는 측면에 있어서도 자라나야 하지요. 우리는 아직도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입니다. 오늘는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풋사랑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과일 가운데서 다 익지 않은 과일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풋과일! 풋과일은 맛도 떨어지고 심지어 잘못 먹으면 탈납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요일3: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는 의미가 무엇인가? 손과 발로 실천적인 사랑을 하지는 의미입니다. 말과 혀뿐인 사랑은 말로는 하지만 행함이 없다는 말이지요. 행함과 진실! 행함은 수고가 있는 사랑이지요. 엄마가 갓난 아기를 안고 젓을 먹이고, 재우고,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주는 일은 수고로움입니다. 사랑의 수고이지요. 우리 모두는 이런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기에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수고! 이것이 행함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도우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으로 이웃을 돕는 수고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수고를 할 때에 마음에 있어야 하는 생각이 무엇인가? 진실로 번역 되었는데, 진실이라면 속인다는 말의 반대이지요. 진실이라고 번역된 그릭은 진리라고 번역되는 말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는데, 사랑의 수고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말입니다. 진리를 깨달았기에 사랑의 수고가 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에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웃에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면 좋은 사회 활동가는 될 수가 있지만, 신앙인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수고로운 모든 행동이 어떤 마음에서 나와야 하는가? 진리에 대한 깨달음! 그렇기에 내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수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행할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몇일 전에 다큐먼트를 하나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의사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건대 병원에 내 종양 외과의사인데, 6-7시간의 힘든 수술을 마치고 영등포에 있는 무료 의원인 요셉의원에 의료 봉사를 갑디다. 가는데 차가 막힙니다. 30분이면 가는 길을  1시간 반을 드리이 해 가서 가난하고 병들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진료합니다. 단 한번으로 끝나는 진료가 아니라 무료 20년 이상을 매달 수요일에는 어김 없이 그 병원에 찾아가서 가난한 환자들을 섬깁디다. 거기만 아니로 또 다른 의원에도 한 달에 한 번 가서 무료가 환자들을 돌보는 따뜻한 의사를 보았습니다. 그 의사 선생님이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자신이 왜 수십년을 이렇게 봉사했는가 하면 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눌 때에 기쁘다고 말입니다. 내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나 자신만을 위하여 쓸 때 보다는 내가 가진 지식과 기술을 이웃과 sharing할 때에 기쁨이 배가 된다고 말입니다. 참 좋은 의사이지요. 그가 이웃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깨달았기 때문입니까? 이웃과 내 것을 나눌 때에 내 기쁨이 더욱 커진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이십 수년간을 한결같이 가난하고 궁핍한 환자를 돌보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       우리가 이웃에게 행하는 사랑은 어떤 깨달음 위에서 나오고 있는 지를 나는 여러 성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한 평생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어떤 진리의 말씀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기에 그렇게 하느냐 말입니다. 그런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그냥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조금하다가 힘이 들면 불평과 짜증이 나게 되어 있지요. 진리를 깨닫고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에 그 진리에서부터 나오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먼저 진리로 무장하고 그 후에 사랑의 수고를 감당합시다그러면 힘이 생겨서 오랜 기간을 그 일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요일3: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사랑에는 행동.행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하면 따뜻하고 포근하고 달콤한 감정적인 사랑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하나님 사랑은 의지적으로 행동을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청춘 남녀의 사랑처럼 달콤한 사랑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행동을 한 사랑입니다. 섬뜻한 차가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불태워 드리는 헌신을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내가 그것이 필요하지만 이웃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에 주는 것을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결코 달콤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                        몇일 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퍼온 글입니다. 누가 내게 보내 주어서 읽었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는 미국 미주리에 있는 어떤 조그마한 타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미장원에 사람들이 갑자가 50명 정도가 몰려 와서 머리를 빡빡 밀었습니다. 미장원에서는 돈을 벌었지요. 미용사가 왜 머리를 빡빡미는 지 그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미주리 주의 어떤 지역 교회에 어떤 중학생 여자 아이가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가 다 빠져서 챙피하기 때문에 교회에 안 가겠다고 떼를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과 온 교회 교인들, 50명 정도되는 작은 컨그리게이션입니다만, 모두 머리를 빡빡 깍기로 결정을 했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부끄러움 없이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런 소식을 미용사가  방송국에 알렸고, 방송국에서는 엄마가 그 아이를 설득하여서 교회에 나오는 그날에 교회에 나와서 인터뷰하면서 방영했습니다. 앵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나는 크리스쳔이 아니지만, 장래에 교회에 나가게 되면 이런 교회에 나가겠습니다오늘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머리를 빡빡 깍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매들에게는 머리를 삭발하는 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겠지요. 한 영혼, 소자 하나를 건져 내고 구원해 내는 일을 위하여 이런 수고와 희생이 따른다면 하겠습니까? 머리털은 몇 달이면 다시 납니다. 영원히 안나는 것 아니지요. 그래도 자매들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매들이 엄마가 되어서 자기의 자식이 그런 지경이 된다면 기꺼이 머리를 깍지요. 그것을 뭐라고 부릅니까? 삭발의 모정:영화제목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희생과 수고가 따릅니다. 달콤한 사랑을 우리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가 나를 위하여 죽을 수 있겠느냐. 사랑하는 딸아 너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질 수 있겠느냐라고 묻습니다사도 바울의 담대한 고백을 들어 보십시요. 고전8:13<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여기서 음식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논하면서 바울이 고백한 내용입니다.   /         우리 교회에도 너트 엘러지를 가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엘러지 원인이 되는 땅콩 제품은 모두 교회에서 제거 되어야 합니다. 땅콩을 먹고 싶지만, 땅콩 엘러지를 가지고 있는 아이와 그 가정을 위하여 땅콩 제품을 쓰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집에서  땅콩을 드시면 되지요잊어 버려서 땅콩을 가지고 교회로 올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것을 서로 서로가 잊지 않도록 기억나게끔 만들어야 겠지요. 사랑을 실천 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됩니다. 큰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 아주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십시요또 예를 들면 요즈음 눈이 많이 와서 위쪽 파킹장에는 노약자들분들과 애기 딸린 집들이 차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제가 몇 주일째 광고를 드렸습니다. 이런 광고가 나오기 전에 솔선 수범하여서 내가 비록 교회 봉사 때문에 일찍 왔지만 편리한 윗쪽 파킹장에 차를 세우면 노약자분들이 저 아래 쪽 파킹 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오면 힘이 들 것 같으니 내가 아랬쪽 파킹장에 차를 세우는 일이 사랑의 실천을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큰 일을 행하는 일이 아니지요. 조그마한 일에서 사랑의 헌신과 사랑의 수고가 묻어 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을 하는 훈훈한 교회가 되어야 겠지요. /       골든 대학교 비전 청년부원들을 위한 라이드 문제-이것도 하나의 작은 실천입니다. 마음의 감동이 있는 분들은 그 청년들이 주일과 금요일 예배와 기도를 교회에서 드릴 수 있도록 라이드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와 예배를 편안하게 드리지만 그네들은 교회에 오고 싶어도 발이 없어서 못 나옵니다. 누가 한 걸음만 앞서 가서 차로 라이드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2.             우리 하나님은 십자가 이후에 지금 우리를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가? 나는 전체 가운데 하나인데,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의미있는 하나인가? 우리들 하나 하나가 영적 전쟁, 영적 전투를 위하여 부름 받은 존재라고 이해한다면 과연 그런 영적 군대 가운데 내가 하나라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냥 전체를 위한 하나의 소모품인가? 군대에서는 어떤 과업, 어떤 일, 어떤 미션이 떨어지면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한 두명의 병사들을 소모품으로 죽이는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은 군대에 늘 있는 일입니다. 군대에서는 전체가 중요하고 전체를 위하여 과업을 이룻는 일이 중요한 것이지 하나 하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 하나를 전체를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 나 하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온천하를 주고도 나하나 하고 안 바꾸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마치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내 옆에 있는 이웃는 어떤가? 내 옆의 이웃도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존재인 것 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런 하나 하나의 존재가 모여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개 성도들의 집합체인 성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지요. 그 몸의 지체들 하나 하나가 예수 믿는 개개인이지요내가 망가지고 내가 없어지면 그리스도의 몸은 불구가 되기 때문에 머리 되신 우리 주님이 나를 보호하십니다. /            18: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던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잃은 양의 비유! 100마리 가운데 한 마리! 99 마리를 어디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갑니까? 산에 그대로 두고 말입니다. ? 그 잃어 버린 한 마리는 emergency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둔다면 곧 바로 죽기 때문입니다. 야생 동물의 밥이 되거나, 아니면 한 낮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배에 가스가 차서 죽거나, 아뭏튼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목자가 왔던 길을 서둘러서 돌아가 봅니다. 그 때까지 살아 있다면 목자의 눈에 발견되어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지요. 잃어 버린 한 마리 양까지도 챙기시는 우리 하나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 작은 자 하나라 할지라도 잃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들이 교회 생활하면서 무시하는 작은 한 사람! 별로 우리 하나님 마음에 쏙 들지 않는 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 18: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3.     하나님께서 하나를 소중히 여기셨던 예! 8:26-40/빌립과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빌립더라 사마리아를 떠나서 어디로 가라고요? 26-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 가라는 길, 즉 광야길로 가라! 주의 사자가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주의 사자로 표현되어 있지만, 성령께서 그렇게 말씀했지요. 이런 명령에 대하여 군말 없이 빌립은 그리로 떠납니다.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할 수가 있지요. 사마리아 성에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데 왜 인적이 없는 그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이해가 안되는 명령입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사마리아성의 부흥을 뒤로 한 채로 광야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권세 있는 내시를 만나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27-28절에 의할 것 같으면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 축제, 절기 예배에 참석했다가 병거타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내시는 성전 안에 들어가서 예배 드릴 수가 있었을까? 없었다. 성전 밖에서 성전 안에서 들려 오는 찬송과 기쁨의 소리만을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먼 길을 병거타고 올라 와서 한 주간의 축제를 마치고 고향 에디오피아로 돌아 가는데 어떤 마음일까요? 빈 마음, 허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그를 귀중히 보셨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으로 보셨다. 그래서 누구를 보냈나? 빌립 안수 집사를 보냈다. 사마리아 성중의 교인들은 99마리의 양들이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가장 작은 자들 중에 하나다. 하나님이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건지기 위하여 사마리아 성중에 99마리를 나두고 빌립을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                        빌립이 이 내시를 만난 다음에 예수와 복음을 전해 준 다음에 세례를 주고 서로 떠나 버리지요. 빌립은 빌립대로 내시는 에디오피아로 떠나지요.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수를 마음에 간직한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일이 에디오피아에 일어났을까요? 그 이후에 에디오피아의 고위층 관리인 이 내시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에디오피아는 무슬림 국가들로 휩싸여 있지만 놀랍게도 에디오피아 인구의 절반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이렇게 된 이유가 이 내시의 회심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있었을 때에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각 족속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에 성령 체험을 하고 난후 자기의 고향으로 흩어져 갔는데, 거기에 있는 여러 족속들 가운데 에디오피아에서 온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이 내시가 빌립 집사에 의하여 세례를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지요. 이 사람을 통하여 에디오피아에 부흥이 일어나서 오늘처럼 되었다고 보아야 겠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했더니 이러한 큰 변화를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나의 한 순종이 지금은 미미하지만 세월이 지난 다음에 큰 변화를 일을킬 것입니다. /     

4.    교회가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대형교회가 되면 될수록 하나의 가치는 없어져 갑니다. 전체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교회가 커져도 하나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들이 느껴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 정책이나 교회의 사업을 추진할 때에 한 사람이 실족하여서 신앙을 떠나게 된다면 그 정책이나 사업을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사업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언제든지 교회의 모든 사업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교회 일, 사업을 성취하는 데 목표를 두어서는 안되고 그 사업을 통하여 영혼들을 살려내는 일이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전의진목사

2015.03.09 12:29:45

03/06/15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5/03061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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