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76     

금요기도회 :2/13/2015

대표기도: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 340(542)

 

1.    요즈음 주일 예배 시간에 아이폰 켜 놓고 카톡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은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시간입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은 우리의 마음의 창을 닫아 놓고 있어야 하지요. 세상의 창은 모두 닫고 하늘로 향한 마음의 창만을 열어 놓고 있어야 하지요.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가? 내 마음 전부를 송두리째 드리는 예배다. 내 마음을 집중해서 내 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런데 카톡하면 마음 전부가 드려 집니까? 안 드려 지지요.  35:1-3<   > 사무엘 상16:5<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성결하게 한다는 것이 뭡니까?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이지요. 거룩이 뭡니까? 세상과 분리 되어서 하나님께 속해 있을 때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배 당에 앉아 있는 것이 세상과는 분리되어서 구별되었지요. 그것 만으로는 완전한 거룩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 세상과 똑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 카톡하잖아요.  거룩한 예배가 되겠습니까? 예배 드리면서 카톡을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예배가 아니고 세속화된 예배입니다. 히브리서10: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못되지요. /       불교 신자들이 대웅전안에서 부처님 앞에서 예불 드리고 불공드리는 데 아이폰 켜 놓고 카톡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우상을 섬기는 분들도 예배하는 시간에 집중하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서 뭐합니까?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알현 하는 시간에 카톡 켜놓고 다른 분과 대화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예배 시간은 인격이신 우리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우리 하나님은 설교로 말씀하시지요. 예배 드리는 한 시간 만은 아이폰을 끄고 카톡을 참았다가 예배 끝나면 켜고 하시길 바랍니다. 미디어 중독을 끊지 않으면 사탄과 어두움의 영이 우리의 예배를 끈질기게 방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사탄은 현대의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깊은 우려가 일어납니다. /     예배 드리는 자리는 연극이나 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배 드리는 자는 삶과 죽음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영생이냐 영벌이냐 사느냐 죽느냐가 결판나는 자리입니다. 예배라는 레져가 아닙니다. 심심풀이 취미나 여가선용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2.    9:22<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하여 예수께 온 어떤 아비가 예수께 요청하는 기도 내용이지요. 이 아비는 어떤 마음으로 예수께 자기 아들의 문제를 가지고 갔습니까? 주님이 할 수 있는 지 없는 지라는 관점! 우리 주님이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 가를 물었습니다. 내 아들을 고칠 능력이 있다면 불쌍히 여겨서 고쳐 달라! 이런 요청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리고 나서 그 아이에게 포제스 되어 있는 악령을 추방하시고 그 아이를 고치셨지요. 우리들이 우리들의 문제를 가지고 오늘 우리 주님께 왔는데 이 아비처럼 우리 주님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을까 없을 까를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왔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니지요!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내 문제를 해결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고 나가야지, 그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시간 낭비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내 유익을 위하여 다른 일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1장에는 나병에 걸렸다가 치유된 어떤 환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40<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물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가 원치 않는가를 물었습니다. 조금 전의 귀신 들린 아이를 둔 아비와는 다른 관점으로 예수께 접근했습니다. 이 나환자는 주님이 나병을 낫게 할 능력이 있는 분임을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그 병고침의 은사를 나를 위해 쓰실 것인가 안 쓰실 것인가는 누구에게 달렸다는 겁니까?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주님에게 달렸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병고치는 능력을 나를 위해서 쓰시길 원하신다면 나는 치유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 갈 수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       오늘 기도 하러 나왔는데 어떤 관점으로 주께 나왔습니까? 내 문제를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말고 하나님은 원하십니까라고 묻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내 문제가 해결된다.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난다. 이런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코드가 맞는가 안 맞는가라는 말이지요.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는가 안되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라고 했더니만 자기의 마음과 생각은 그대로 두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분들이 많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야지, 내 뜻을 하늘에서 관철 시킬려고 하는 분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기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지이다의 의미? 문어체 간구> 하나님과 코드가 일치되면 악을 쓰고 부르짖지 않아도 기도는 자연스럽게 응답된다.  왕상 2장에는 솔로문의 기브온에 일천 번제를 드렸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지요.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나님이 백지 수표를 주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적어 넣으면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지혜! 참 쪼잔한 것을 구했지요. 선왕인 다윗이 한 평생 정복 전쟁을 통하여 확보한 영토라고 해 보아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가나안 땅 정도 밖에 안됩니다. 다윗 왕국, 다윗 왕국, 솔로몬 왕국이라고 말들 하지만 정말로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보다도 훨씬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지요. 적어도 솔로몬이 왕이 되었으면 왕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제국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북쪽으로는 힛타이트 제국을 정복하고, 동쪽으로는 메소포타이마 지방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는 애굽을 정복하여서 대 제국을 만들 그런 야망도 없었습니다. 그저 제국의 한 변두리에 불과한 그런 가나안 땅에 만족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눈은 어디에 열려 있었습니까? 부왕이 이루어 놓은 나라를 정의롭게 통치하고 재판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온 나라 안팍에 전쟁이 위험이 사라졌으니 무엇이 필요합니까? 삶 속에서 일어나는 분쟁들을 해결하여서 샬롬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혜를 구했지요.  그랬더니 하나님도 솔로몬에게 지혜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지요. 솔로몬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 시켰지요. 하나님과 코드가 맞았다는 말이지요.  이 시간 나는 우리 하나님과 코드가 맞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마음 내 뜻을 꺽어 버릴 때에 하나님과 코드가 일치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 내 뜻 그리고 내 고집 모두 내려 놓고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뜻으로 맞추어 가길 바랍니다.

 

3.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kyrie, eleison!(그릭을 음차했음)/10:47-48/

바디메오(디메오의 아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맹인, 죄인으로 취급되어서 존재 가치가 없었다)의 간구: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ἐλέησόν με.    이 외마디의 기도, 참 진솔하고 애절함이 실려 있는 기도, 기독교 2천년의 예배 역사를 지배해 온 기도이다. 카톨릭 미사(예배)의 시작은 키리에 엘레이손이라는 짧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시작된다. 키리에 엘레손이라는 의미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울부짖었다, ἤρξατο κράζειν καὶ λέγειν   크라조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수리 지르는 것, 재난 가운데 처한 사람이 단말마적으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 그 부르짖음 속에 영과 혼이 실려 있어서 우리 주님은 그것을 느꼈다>/만물의 찌기와 먼지와 같은 존재(우주진)인 인생들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행한 의로움일까? 비록 그것이 비록 의롭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작다. 그러면 무엇을 하나님 앞에서 간구해야 하는가?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구할 도리 밖에는 없다. 하나님 앞에 내가 내세우는 의는 걸레 조각이다.나는 찬란한 옷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걸레 조각이다. 이사야 64:6절에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아서~>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를 세울 수가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최선은? 오직 우리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다./9:15절에서<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אֲשֶׁ֣ר אִם־צָ֭דַקְתִּי לֹ֣א אֶעֱנֶ֑ה לִ֝מְשֹׁפְטִ֗י אֶתְחַנָּֽן׃여기에서 하난이라는 동사는 은혜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는 의미인데,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어서 은혜를 구하다. 긍휼.자비를 구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비록 욥이 당세의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자기 의로 서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빌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자비와 긍휼! 이것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자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통회가 선행해야 한다. 자복과 통회 없이 어찌 신의 자비를 구하는가? 자복과 통회 없이 신의 자비를 구하면 <박제가 된 신의 사랑, 즉 껍데기 밖에 없는 알갱이는 사라진 껍데기 뿐인 신의 사랑>을 얻게 된다. 십자가는 연극이나 쇼가 아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심은 인간의 당하는 극심한 고통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지 부활이 있으니깐 십자가 연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처절한 고통과 눈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메어 단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함으로써 내 지은 죄가 바로 우리 주님을 갈보리 산 올라 가게 하였고 높이 십자가에 메어 달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나폴레옹 일화-어떤 병사의 어머니가 탈영병인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간구했습니다. 눈물로 읍소했습니다. 아들을 살려 달라고.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 병사는 두 번이나 탈영을 했다가 붙잡혀 왔습니다. 당신의 그런 아들을 위하여 탄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가 황제 폐하, 나는 당신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이지 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 이에 황제는 당신의 아들은 자비를 받을 자격 조차도 없소라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어머니는 더욱 엎드려서, ‘폐하, 자격이 없기 때문에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닐 것입니다.. 내 아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이 어머니의 절절한 간구 때문에 황제는 그 탈영병을 사면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우리 주님 예수를 바랄지어다!130:7절 어떤 상황에 시편 기자는 처하여 있는가? 130:1-깊은 곳에, 내 던져 있는 그 깊은 웅덩이 속에서 주께 간구한다. 누구처럼? 요나처럼! 죽음보다 더 한 자리인데도, 요나는 죽지 못하고 살아 있었다.

*하박국 3:2b/진노 중에라도 긍휼, רַחֵ֥ם,을 잊지 마옵소서(기억하소서)-!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에 매달려서 간구한다면 아무리 큰 죄인 일지라도 살길이 열린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다니엘의 금식기도/9:1-2, 9:18 (70이레 환상으로 응답하신 하나님)-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자복하면서 기도했다. 그는 자신들이 행한 공의를 의지하여 간구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을 따라서 하나님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간구했다. 비록 하나님이 70년 만에 유다의 죄를 사하여서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끝나게 하신 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모세의 간구/14:18-19,20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의지하여서 주께 백성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청구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2:4/죄인 된 인생들에게 십자가 보다 더욱 큰 긍휼은 없다. 십자가에 나타난 우리 하나님의 사랑!

 

 


전의진목사

2015.02.16 13:15:22

02/13/15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5/02131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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