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71     

금요기도회 :1/2/2015

대표기도:

찬송가:

 

1.    할렐루야&아멘에 대하여/요즈음 제가 아멘하라고 자주 시키고 있지요. 시킬 때 뿐이지 시키지 않으면 아멘 소리를 안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훈련을 해야 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 회중들에게는 아주 중요합니다. 아멘이 뭡니까? 우선 신27:11-26절을 교독하겠습니다. 매 구절 마다 모든 백성은 아멘할지니라라는 문귀가 후렴귀로 되어 있습니다. 몇번 반복되나요? 12번 반복됩니다. All the people shall say amen! 모두 저주가 선포되는 문맥입니다. 아멘은 저주의 내용에 대하여 수용한다는 말이지요.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것이 축복의 말씀이든지, 아니면 저주의 말씀이든지, 말씀 선포의 현장에 있는 성도들은 그 말씀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화답해야 하는가? 아멘! 에이멘하는 미국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발음은 따라 하지 마세요. 원래 히브리어 발음이 아멘입니다. 에이멘은 미국인들의 사투리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은 따라하지 마십시요. 미국이 큰 나라이기에 그것도 옳다고 해서 따라할 필요없습니다. 아멘! 선포된 말씀을 내 것으로 수용하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겠다는 말이 아멘입니다.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말을 하는 것을 습관들이십시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하지 말고요. 씩씩하게 담대하게 자신감 넘치게 아멘으로 화답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큰 소리로 아멘하면 튀는  것 같아서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아멘 하시는 분들은 오늘 이후부터 큰 소리로 아멘하십시요.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 말씀 순종의 첫 단추입니다. 내 입으로 시인하고 나면 믿음이 더욱 공고하게 되어 집니다. 10: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거든 주위의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하고서 큰 소리로 아멘하십시요. 그러면 그 말씀의 복이 아멘 하는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2.    6:1-8/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했을까?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업적을 이루어 내는 동안에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하나님은 보고 싶어 하신다. 우리는 서로 서로를 비교해 보면서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높은 건물을 올렸네 하면서 만족해 합니다. 이것은 쓰잘데기 없는 만족입니다. 고층 건물이 아무리 높다하나 하늘 아래 뫼로다. 영적 성장이 일어나면 말하는 게 달라지고,생각하는 게 달라지고, 얼굴과 표정도 달라지고 행동 양식이 달라지게 됩니다. 내가 바뀌는 것을 나 자신이 알고, 하나님이 알고, 이웃이 보고 알게 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성장했을까?/ 우리 집, 아파트에서 산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뒷문을 통하여 저 너머의 숲을 볼 때가 자주 있습니다. 어느 날 보면서 처음 입주할 때에 보았던 숲보다는 지금이 숲이 훨씬 크고 웅장하게 성장해 있다는 것이 문득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사색에 잠기게 되었지요. 우리 인생도 저렇게 팍팍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를그런데 우리의 몸집이나 우리의 키가 그렇게 자라면 그것은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몸 무게나 몸집이 공룡만큼 나간다면 그리고 키가 계속자라서 10m,20m씩 계속해서 자란다면 야 그것은 큰 문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주택도 점보 주택이 되어야 하고, 또 먹는 것 마시는 것 장난이 아니겠지요. 20세까지 키도 몸무게도 자라난 다음에 자라남을 멈추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살이 넘었는데도 아직 키가 크시는 분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 분이 있으면 비결을 켐연장에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내면적인 성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면적 성장, 영적 성장이 멈춘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인생의 문제입니다. 외면적인 성장은 20세 전후에 멈추어야 건강한 것이고, 내면적 영적 성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건강한 성장입니다. Adult child!가 영적 성장이 멈춘 대표적 케이스다당신의 내면적 성장, 즉 정신적인 성장이나 영적 성장은 어디에 이르러 있는가? 왜 이 성장이 그렇게 중요한가? 죽음 이후의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 6:1-8절에는 세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      /첫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인을 만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난 후에 영적인 성장이 멈추어서 제자라에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20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영적인 성장은 제로상태입니다. 현재의 상태로 만족하면서 삽니다. 예수 믿고 영혼이 구원 받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의 풍성한 영적인 삶이 있는데 거기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얕은 물가, 갯벌에서 조개나 잡으면서 삽니다. 앞에 큰 바다가 놓여 있는데 그 깊은 바다로 배타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바다에는 갯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데도 말입니다. 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을 때에 토대가 되는 기초 교리, 또는 초보신앙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이 무엇이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6가지로 보았습니다. 회개와 믿음과 세례들과 안수와 부활 교리와 영원한 심판교리가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교리, 즉 도그마입니다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믿고 있어야 하는 기초 지식이 바로 이 6가지 교리입니다. 일종의 6개의 기둥이지요. 회개? 돌이키는 것이지요. 죽음에 이르는 모든 이전의 옛 행실들에서 돌아섰습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회개이지요. 그리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구에 대한 믿음입니까? 예수 믿는 믿음입니다. 회개와 믿음을 합해서 무엇이라 부릅니까? 회심, 영어로는 conversion이라고 부르지요. 회개하고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고 또한 안수 받음으로 직분도 받으니 참 기쁘지요. 안수 집사나 장로나 권사는 안수하여서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로 세우지요. 현재의 교회 생활에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먼 장래를 내다 보니 또 얼마나 기쁩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날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말에 있을 그 무시 무시한 하나님의 심판도 받지 않게 될 것이니 얼마나 기쁩니까? 기독교는 영혼 불멸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고등 종교가 영혼 불멸을 가르치지요. 몸의 부활을 가르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는 없습니다. 죽음을 경험하나 죽었던 그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 몸의 부활을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우리의 몸이 죽음으로 땅 속에 들어가서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역사의 마지막날에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주님이 그 죽은 몸을 다시 살려 내십니다. 얼마나 큰 소망입니까? 그러니 이런 소망을 품고 사니 얼마나 땅 위에서 삶이 기쁘겠습니까? 현재에 내가 누리는 구원이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는 생각ㅇ들 하기에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고자 하지요. 영적인 성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앞으로 정진하지 않습니다. 아 옛날이여 하면서 옛날에 받았던 그 은혜와 기쁨 속에 그냥 머물러 있기를 즐깁니다

            /두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인? 영성이 퇴보하는 사람입니다. 영성이 퇴보하면서 신앙을 떠나기까지 합니다. 곧 배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6절에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나요?<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타락한 자라고 부르고 있지요. 보통 타락했다라고 말할 때에는 도덕적인 일탈을 의미하지요.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다가 술집에 들락날락하면서 술마시고 담배 피우고 도둑질하고 남에게 해궂이 하는 삶을 살면 타락한 생활이라고 말하지요. 도덕적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도덕적인 일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탈을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던 믿음을 저버리고 믿음을 저리고 다시 옛날의 불신앙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배교자라고 부르지요. 히브리서의 상황에서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십자가 신앙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4-5절을 볼까요?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배교자, 즉 타락한 자들도 예전에는 무슨 체험을 했나요? 회심 체험을 했습니다. 한 번 빛을 받았다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처럼 다멕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비치는 신령한 빛을 받고 나서 유대주의를 버리고 예수 믿는 믿음을 사도 바울은 가졌지요. 그렇지만 이 십자가와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고난과 환난 때문에 예수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십자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비치는 빛을 받았기에 중생했습니다. Born again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은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가짜 신자, 나이롱 신자라면 그런 선물 받을 수 있나요? 없지요. 성령에 참여 하였다는 것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맛도 맛보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의 깊이는 말씀을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또 다음 세계에서나 경험하게 되는 능력들을 이 세상에서 맛까지 보았습니다. 삼층천에 올라 갔다 왔을 지라도, 삼층전은 입신체험이지요, 그런데도 신앙을 떠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하면서 의아해 하는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이런 체험들은 단 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은 30 40년 또는 한 평생동안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박해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못 견디고 예수 믿는 믿음을 버리고 옛날로 돌아가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세기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핍박과 시련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 믿음에 붙어 있으라라는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위로했지요이런 신앙적인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가 신앙을 버리고 배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구약성경은 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합니까? 에스겔 18:24<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의인이라고 할지라도 의지적인 결단으로 지금껏 붙들고 있던 공의를 버리고 죄악을 행하면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입니다사도 바울이 개척했던 갈라디아 교회를 보십시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선교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시련과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이 십자가 신앙을 버리고 유대 율법주의로 돌아섰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너희가 어리석은 자라고 나무라면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책망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성령까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십자가 신앙을 저버리고 배교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대에도 이런 배교가 나올 수 있을까? 충분히 나옵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그렇게 되지요. 사탄의 공격은 유혹과 핍박입니다요즈음 북한을 보십시요. 얼마나 큰 시련과 박해를 받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까?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 갖혀서 시련을 견디지 못해서 죽는 순교자도 있지만 거기에 못지 않고 시련을 견디지 못하여서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배교자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많습니다. 자유국가에서는 사탄은 핍박을 쓰지 않고 무엇을 사용합니까? 세상 유혹을 사용하지요. 지속적으로 세상 유혹에 굴복하게 함으로써 종래에는 신앙을 떠나게 만듭니다핍박과 시련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도 귀하지만 보스톤 땅에서 세상 유혹을 이기고 신앙 지키는 것도 대단한 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배교자들의 운명은? 7-8절에는<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되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밭의 비유를 쓰고 있지요. 6절에는 배교자들에게는 다시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지요. 예수 믿기 전에 지은 모든 죄는 예수의 십자가로 모두 씻어 지는데, 타락하고 배교하고 나면 다시는 속죄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다시 속죄의 길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런 참담한 일이 다시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지요. 배교자들의 죄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그런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 죄 때문에 한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도 우리의 마음이 떨리고 아픈데, 또 못박는 일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일이겠지요.

            /세번째 유형의 신자는? 일취월장 영적인 성장을 가져 오는 신앙인입니다. 정진하는 신앙인!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신앙인은 오늘 본문의 3절 말씀을 즐겨합니다. 3<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이 의미가 무엇일까?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장도 누구가 허락해야 우리에게 일어납니까? 다윗의 성전 건축-열망, 준비 모두 갖추었으나, 하나님의 허락이 없었다. 성전 건축은 선한 일인데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자 솔로몬에게로 넘어갔지요. 영적인 성장도 마찬가지! 내가 잘나서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허락해야 일어납니다. 우리들이 교회 생활, 신앙생활할 때에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표? 우리의 영적인 성장!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게 만드시나? 교회 일들을 하게 만드십니다. 교사의 일도 있고, 찬양대의 일도 있고, 또 부엌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도 있고, 멀리 나가서 선교도 하고, 구제하는 일도 하고, 온갖 종류의 교회 일들을 사명이라고 부를 수가 있지요. 이런 일을 하면서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해 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그 일이 완성되었기에 기뻐하시기 보다는 그 일을 하면서 얼마만큼 우리의 영혼이 자랐는가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과 목표를 과업 완수에 두지 말고 어디에 두라고요? 그 일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성장하는지에 대하여 두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의 일을 믿음 가지고 하다가 실패할 경우도 있는데, 그 실패를 통하여서도 영적인 성장이 일어난다면 받을 수가 있는 일입니다. 과업은 완수했는데 하는 동안 영혼이 깨어지고 믿음이 후퇴한다면 그 일을 아니함만 못할 것입니다. 부단히 교회 일을 감당할 때에 일자체 보다는 그 일을 통하여 나의 영혼 성장과 이웃의 영혼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사역한다면 그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아는 성도가 자라난 성도이지요. 4: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릴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벧후3:18<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복? 내가 자라나는 일입니다. 내 영혼이 자라나서 예수처럼 우리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과 딸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 자라남은 우리의 목숨이 땅에서 끝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전의진목사

2015.01.05 15:27:11

01/02/15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5/01021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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