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70 

금요기도회 :12/26/2014

대표기도:

찬송가: 490(433)

 

1.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우리나라 개역 성경에는 하나님과라는 글자가 작은 글씨체로 되어 있지요. 원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자로서~! συνεργοί함께 일하는 자=동역자.  고전 3:9절의 동역자들(쉬네르고이)는 고전3:5절의 사역자들(디아코노이)를 가리킨다.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섬기고 있는 그의 일행, 즉 동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섬긴다는 그런 의미에서 일꾼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헛되다는 단어의 의미는?  케노스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비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 성과가 없다. 열매가 없다. 효과가 없다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그것을 간직하지 못하고 그만 쏟아 버리는 경우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오랫동안 간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영원까지 간직해야 하지요. 그러나 1, 2년은 고사하고 하루도 간직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곧 쏟아 버리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첫 번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성적 이해, 사람의 말로 받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은 다음에 흘려 보냅니다. 설교 말씀은 그냥 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옳은 것 같으면 우리의 지성에 잠시 머물러 있다고 없어지지요.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으면 귀에 들어오지도 않게 되지요. 그러니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 문지방을 넘어 서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좀 오래 간다면 2-3일 정도 지속되기는 하지요. 그러나 그런 지성적인 이해로는 우리의 영혼이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런 형태의 신앙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말씀을 영으로 들을 수 있도록 변화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훈련으로 되어 지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옛날 예언자들은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지요. 스데반 집사도 예루살렘 공의회 즉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연설하면서 그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고 질타했었지요.  이런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영으로 들을 수 있게끔 성령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두번째 원인은 사탄의 역사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 그리고 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과 심령에 임합니다. 마음에 감동이 임하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비어져 있던 마음이 가득 차서 영적인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그 충만한 은혜가 마음에 가득하지만, 집에 갔더니 남편이, 아내가 한 마디의 말을 던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받은 은혜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 버립니다. 은혜를 언제 받았는지 불꺼진 난로처럼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버리지요. 사탄이 조정하여서 던지는 바로 그 한마디의 말 때문에 받은 은혜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사라져 버림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리고 나서 부부 싸움이 시직되지요. 이것이 바로 사탄이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영이 민감하게 되면 될수록 말로 인한 사탄의 시험은 아주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부어지면 질수록 사탄은 더욱 날 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그런 사탄의 역사를 때려 부술 수가 있지요.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다음에 오는 사탄과 어둠의 영의 공격이 가까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공격하고 있음을 알고서 그 어둠의 영이 그 말 속에 실려 있음을 인식하고 대적하는 순간에 사탄은 멀리 도망을 가 있게 되고 나는 그 은혜를 쏟지 않고 지킬 수가 있게 되지요.  그래도 집에 가서 일이 벌어지면 그래도 다행인데, 교회안에서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집회와 예배와 기도가 끝나고 교회 문지방을 넘어 가는데 싫어 하는 사람과 얼굴이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받은 은혜 그 자리에서 다 까먹어 버리지요. 그렇지 않던가요?   이런 사탄의 역사를 막기 위하여 내가 해야 되는 일은 내 안에 있는 어두움과 상처를 제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사탄이 틈타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탄이 틈타는 교두보가 됩니다. 쉬파리가 언제 꼬이는가? 썩은 음식이 있으면 그렇지 않던가요? 내 안에 갈무리 되어 있는 해결되어 있지 않는 상처가 있다면 그것을 어두운 영이 사용합니다. 열등감, 우월감, 수치심, 분노, 미움, 질투 등등이 사탄의 교두보가 됩니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 속에 처리되고 없다면 사탄이 결코 내게 찝적대지 못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타고 사탄이 역사하면 어떤 때에는 걷잡을 수가 없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탄과 어두움의 영에게 속지 맙시다. 우리의 영안을 뜨고서 우리의 심령을 살피고 내 마음 속을 성찰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숨어 있는 찌기들을 청산해 나가도록 합시다. 함께 따라서 해 봅시다 고후6:1<~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일까? 영어로는 메시지라고 하지요. 마사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사지라면 교회는 영적 마사지 팔로(시술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사지가 아닙니다. 마사지를 받으면 우리의 몸이 개운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영혼이 개운해지고 좋아지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내 심령의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죄로 물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깊고 깊은 상처로 깨어지고 심각하게 부서져 있는 우리 영혼을 고치고 회복시키는 일을 위하여 말씀을 주시지요. 바로 그 말씀을 메시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 속에 들어오면 어떤 때에는 날카로운 칼처럼 역사하지요. 마치 외과 의사에 손에 쥐어져 있는 날카로운 수술용 칼처럼 말입니다. 그 칼로 찌르고 째고 도려내고 하면서 환부를 치료하지요.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안 아프다고 하면 거짓말이지요. 안 아프다면 치유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칼과 같은 하나님 말씀이 내 상처에 닿는데 어찌 안 아프겠어요? 아파야 치유가 일어납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치유가 급속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4:12-13<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 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나를 만드시고 지으신 분입니다. 내 몸 구석, 내 영혼 구석 구석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 영혼에 있는 깊고 깊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모조리 알고 계십니다. 의사는 사진을 찍어 보아야 종양 덩어리를 볼 수 있지요. MRI 이거 안 찍어 보면 의사 선생님도 우리의 몸안 구석 구석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진 안 찍어도 훤히 다 들여다 보고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에 있는 종양을 도려 내기도 하고, 깊이 패이고 부서지고 깨진 상처는 약을 바르고 꿰매 주시고, 어루 만져 주십니다. 주님보다 내 상처를 만져서 더 잘 낫게 하는 분이 없습니다. 상처 입은 내 감정, 정서를 우리 주님이 만지기만 하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내가 감추고 드러 내지 않으면 우리 주님이 치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내 안의 상처를 드러내면 우리 주님이 만지시고 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과 같습니다.  이 약을 바르면 어떤 상처도 다 낫습니다. 만병통치 약입니다.  예레미야의 탄식 소리를 들어 보십시요. 8:22<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서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가?>의사도 있고 효과 있는 약도 있는 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역함이 치유되지 못함은 어찌 된일인가하면서 예레미야가 장탄식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도 이와 같은 실정이 아니던가요? 우울증으로 각가지 정신적인 질환과 육신적인 질고로 고통하고 있지 않느냐 말입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갈무리 되어 있는 아직 처리되지 않는 온갖 종류의 상처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하는 완전한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 문제를 누구에게로 가져 가야 합니까? 만병을 고치는 의사 되시는 우리 주님 예수께 가져 가야 겠습니다. 그려면 우리 주님이 우리의 심령을 열고서 치유하십니다. 어떤 치유를 하십니까? 기름 부어 주십니다. 그 기름 부음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내 삶과 심령에 부어지면 내 심령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십니다. 이 은혜를 오늘 우리들은 누리기를 바랍니다.  약도 있고 의사도 있는 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병에 지배를 당하면서 살 필요가 없지요.  주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속을 열어 보입시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동시에 우리의 이웃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 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상처가 모두 제거 되어야만 합니다. 그 상처가 관계 파괴의 주범입니다.


3.    공로주의를 버려야 영적 성장을 할 수 있다. 144 4절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우리가 죄사함 받고,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누구의 공로인가? 내 공로인가? 아니면 예수의 공로인가? 아니면 예수의 공로 절반이고 내 공로 절반인가? 구원과 죄사함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는 0%이고 전적으로 예수의 공로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사역! 우리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 받았다. 여기에 우리의 공로가 들어가야 구원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족첨가이다.  내가 무언가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공로와 업적을 쌓아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다면 그것은 사탄의 속임에 넘어갔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뭔가를 얻기 위하여는 무언가 업적이나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관념에 눌려 살아 왔다. 공로주의라는 관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인간들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이길레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무슨 효력이 있길레 그리도 많은 인류의 죄를 씻어 버린단 말입니까? 예수라는 존재는 비록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 났지만, 우리 인생들과는 다른 천적인 존재입니다. 비록 여자의 아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재능이나 지식이나 능력이나 인품이 탁월하기에 그가 죽은 죽음이 효력을 발휘합니까?  아니지요. 그는 존재의 기원이 우리와 다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종자가 다릅니다. 예수의 존재의 기원? 하늘입니다. 요한 복음 8: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고전15: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첫째 사람은 누구? 아담, 둘째 사람은 누구? 우리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천사도 천적 기원이 있는 존재이지요. 인간이나 동물들은 모두 땅에 속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주님도 천적인 존재이신데, 그 분은 천사보다 더욱 탁월한 분이시지요. 그가 천사보다 뛰어 남을 히브리서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10:30절에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을 입었던 우리의 하나님=예수! 이런 분이시기에 그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로 우리의 억만 죄악이 사하여 집니다. 단 한번의 피흘리심으로 그러나 그 효력은 영원까지 이르게 하는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구원과 속죄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는 0%임을 인정하십니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집니다!    4: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죄인들이 공로를 쌓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인 구원에 있어서도 공로주의에 사로잡혀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있다. 이런 신앙도 잘못된 신앙이다. 인생에 있어서 실패와 좌절을 맛보면서 나락에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곧 자신에게 불어 닥칠 고난과 시련의 바람을 피할 목적으로 공로를 쌓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주를 위해서 하는 희생과 봉사와 공로와 업적 때문에 나를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냉혹한 slave driver가 될 것입니다. 내가 교회일 열심히 하였다고 하여서 나를 내 인생의 나락에서 건져 주시고 일을 안한다고 계속해서 시련 가운데 머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에 우리를 깊은 구덩이에서 건지십니다. 우리가 세우는 업적 때문에 우리를 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환난과 시련을 맞은 분들은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불쌍히 여기시면 우리를 깊은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시지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나의 구원이 되는 것이지 내가 세운 업적과 공로가 아님을 확실히 알기를 바랍니다.  내가 기도하면서 눈물 짜고 탄식하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게 되는데, 그 긍휼히 여기심이 나의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공로 주의는 신앙 성장에 백해 무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일을 직분 따라서 열심히 감당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열심히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나를 죽음에서 죄악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나를 죄에서 죽음에서 큰 인생의 시련에서 건져 주셨으니 이 몸 다바쳐서 주님을 섬기는데, 무엇 때문에 감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요. 이런 믿음과 깨달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다가 하늘에 들어가면 우리 하나님이 내게 상급이라는 것을 주지요. 우리 주님이 줄 필요가 없는데도 감사하게도 은혜 넘치게 땅위에서 주를 섬겼던 것을 상으로 주시지요. 이것이 우리의 바른 신앙관입니다.   


전의진목사

2015.01.03 19:48:27

12/26/14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4/1226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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