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69     

금요기도회 :12/19/2014

대표기도:

찬송가: 458(405),470(413)

 

1.             일식(ecklipse)은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들어가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태양과 달과 지구가 일직선상에 놓이게 될 때에 지구에 달 그림자가 생기고, 그 달 그림자 안에서 태양을 바라 볼 때에 태양의 일부분 혹은 전부가 달에 의하여 가리워져서 안 보이게 되는 자연 현상을 일식이라고 부릅니다. 지금부터 8년전 성탄절, 2000 12 25일 오전 11시에 약 두세 시간 동안 부분 일식이 있었습니다. 태양이 달에 의하여 약 50%정도 가리워졌습니다. 마틴 부버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인생길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인생의 그런 캄캄한 상황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일식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일식이 성탄절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성탄절,12 25일이 다음 주에 있습니다. 12/22일 동지인데 동지까지는 기분이 침울하다가도 동지를 지나고 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 집니다. 낮의 길이가 노루꼬리만큼씩 길어지기 때문에 그런가 봅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교회마다 행사로 인하여 대단히 바빠집니다.   행사에 몰두하다 보면 행사의 주인공 되는 분을 잃어 버리기 일수 입니다.  선물을 주고 받고, 카드를 주고 받고 하지만 그 가운데 예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한국식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슬픈 분위기 때문에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울다가 문득 자신이 왜 울고 있는 지 이유도 모르고 울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면서 울어야 하는데, 자기 설움에 못 이겨서 울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성탄절 행사도 예수가 빠지면 성탄절 행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있기 때문에 성탄절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모든 행사를 집행하면서 예수를 잃어 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래전에 영국의 버킹햄이라는 타운에서 더 이상 성탄절이라는 용어를 안쓰고 winterval이라는 용어를 써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윈터벌이라는 용어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겨울을 가리키는 winter와 축제를 가리키는 festival의 합성어입니다. Winterval은 겨울축제가 되겠지요. 윈터벌에서는 예수는 없어도 됩니다. 그저 사람들끼리 즐기는 축제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요. 요즈음은 미국안에서 유대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고로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무슨 말로 대체하여서 쓰고 있나요? 할러데이-명절로 쓰고 있지요.  성탄절에서 예수를 빼앗아 가려는 시도가 이처럼 많습니다. 누구가 이렇게 하나요? 사탄이 그런 생각을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 주었지요. 우리는 성탄의 근본적이고 핵심인 예수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2.             내 삶에는 예수 일식이 없는가? 예수의 3년간의 공적 사역에서 성부 하나님이 없었을 때가 없었다. 늘 성부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우리 주님 예수는 고백했다. 14:10- 11<  > 단 한 번 밖에는 없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오전 9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예수는 십자가 위에 달렸다. 성부 하나님은 어디에? 주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임재가 철회 되었다. ? 모든 죄인의 죄를 끌어 안고 십자가 위에 달려 있기에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예수의 심령 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늘은 시꺼먼 구름으로 덮혔고, 사람들은 앞에 모여서서 조롱하고 있었다. 갈보리의 지옥! 하나님 일식!의 현장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식했지요.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하나님의 임재가 철회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이다.  지옥이 두려운 이유? 어둡기 때문에, 불 때문에 뜨거워서? 아니다. 지옥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큰 두려움가 공포가 우리를 엄습한다고 해도 우리 가운데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면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집니다. 세상이 요동친다고 해도 엄마 품안에 안겨 있는 아이는 평안합니다. 우리 주님이 늘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주 안에 있는 연합이 일어났는데,  그 예수 임재가 철회된 것 같은 느낌으로 고통할 때가 있다. 그 때가 언제인가? 내가 시련 가운데 무너져 있을 때이다. 어떤 분의 경험! 꿈 속에서 두 종류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른의 발자국처럼 컸고, 다른 하나는 아이의 발자국이었습니다. 두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는데, 어느 부분에서는 발자국이 하나만 찍혀 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그 시기는 자기가 힘들고 아파하던 시련과 고난의 때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투정하면서 물었지요. 그 때 힘들었는데 주님은 어디 계셨나고? 그랬더니 주님이 얘야 그 시기에 찍혀 있던 발자국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고 내 발자국인데 그 때에는 내가 너를 안고 갔기 때문에 발자국이 하나 밖에는 찍혀 있지 않은 것이란다. 시련과 고난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철회 될 때가 제일 무서운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의 때는 오히려 우리 주님과 더욱 가까워 지는 시기이지요. 오히려 등 따뜻하고 배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살게 되지요. 하나님의 일식, 주 예수를 잃어 버리는 시기가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시기를 맞고 있습니까?


3.             당신은 정말로 행복한가? 외면적인 것이 가득 채워져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이 없어도 행복하다. 주님이 날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행복하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이 왜 날 사랑하는가? 사랑하실 조건을 맞추었기에 사랑하시는가? 아니다. 그럴 조건이 없어도 나를 사랑하신다. 무엇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헌신하고 섬기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아니다. 밤낮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 우리는 마치 사춘기 때의 아들과 딸과 같다. 무조건 불순종이다. 말 안듣고 불순종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동시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잘 듣고 순종하는 아들이 되어야 한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에 뭐라고 했나? 3:17<하늘로부터 소리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왜 하나님이 예수를 기뻐했을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셨다!  세상은 우리의 이러한 신분을 몰라보고 우리를 미워한다.  누군가가 내게 김목사 행복한가라고 묻는다면 나도 행복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행복한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이 조금 다르다. 나는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  예수의 사랑을 받아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행복하노라고 말할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은 내가 어미의 태어서 만들어 지는 그 날부터 부어지기 시작했고, 지금도 부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부어질 것이다. 그 사랑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러나 더 기쁜 것은 내가 주를 알고 주를 믿고 주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받는 것에서부터 이제는 줄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벧전1: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사랑하였으므로 행복 하였노라!


4.             염일방일 /다른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손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한다는 사자 성어! 꽤 어려운 사자성어입니다. 중국 송나라의 사마광이라는 사람의 어릴적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이지요. 어떤 아이가 커다란 장독대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이것을 본 어른들이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허둥지둥거리지요.  사다리 가져와라. 밧줄 가져와라 이러는 동안 아이는 꼬로록 거리면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 꼬마 사마광이 옆에 있던 돌맹이를 주어서 장독대를 향하여 던져서 깨 버리지요. 물에 빠진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장독대를 버려야 합니다. 장독대를 버리고 아이의 생명을 구히는 것~이것이 세상 이치이지요. 두개를 다 얻을 수는 없지요. 아프리카 등지에서 원숭이 사냥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요. 호리병있지요. 입구는 좁고 속은 넓습니다. 넓은 속에 카라멜을 몇 개 넣어 둡니다. 그리고 호리병에 끈을 달아서 나무에 묶어 둡니다. 그러면 원숭이들이 캬라멜을 꺼내 먹기 위하여 손을 호리병 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카라멜을 손에 한 주먹 꽉 움켜 잡습니다. 그러면 손이 호리병 밖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잡으로 오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원숭이들은 카라멜을 움켜진 손을 놓지 않습니다. 놓아야 사는데, 그것을 놓지 않고 있다가 사람에게 잡혀서 시장에서 고기로 팔립니다. 염일방일을 못했기에 죽습니다. /      예수 믿는 우리들은 어떤가? 우리들도 그렇지 않던가요? 우상을 꽉 붙들고 그것을 놓으면 죽을 것 같아서 안 놓습니다. 우상을 놓아야 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상을 처리해야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우상을 버림으로 살았던 사람은? 야곱과 베냐민-43/양식을 사러 두 번째 애굽으로 가야 하는데,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만 했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고 버팅겼다. 정황을 볼 때에 베냐민을 요셉처럼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애굽의 총리로부터 형제들이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고, 또한 지난 번에 양식을 사러 갔다가 양식과 함께 돈이 모두 각자의 자루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양식을 사러 간다면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또한 시므온이 지금 애굽에 구류 상태에 있지요. 정황이 모두 불리한 정황이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 상황인가? 양식을 다 떨어져서 모두 허기진 상황이다. 요셉을 잃어 버렸는데, 베냐민 마져 잃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차일 피일 양식사러 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은 우상이었다. 이것을 놓아야만 양식을 사러 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고통하던 야곱이 창43장에서 드디어 결단을 하고 베냐민을 손에서 놓습니다. 43:13-14<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위대한 결단!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 스트러글하다가 손안에 애지 중지하던 자식을 놓아 보낸다. 자포자기인가? 아니다 위대한 신앙적인 결단이다. 우상을 버리는 행위다. 염일방일!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베냐민을 희생하면서 보내는 목적이 무엇인가? 양곡을 얻기만 하면 되었는데, 무엇까지 더 얻었는가? 베냐민도 다시 얻게 되었다. 조금 전 예화에서는 아이는 물에서 구조 되었지만 장독대는 깨어져서 못쓰게 되었다. 그러나 야곱은 우상을 버렸더니만 무슨 일이 더하여졌나? 양곡도 얻었고, 베냐민도 돌려 받았고, 또 무엇이 덧대어졌는가? 죽었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요셉도 만날 수 있었다. 1 3조이지요. 돌 하나 던져서 세 마리의 새를 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을 다루시는 원리가 바로 이렇습니다. 염일방일은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진리이고 우리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다루시는 원리는 마6:33절입니다. 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덤으로 주신다. 우상을 포기하고 버리면 그 우상을 다시 돌려 주시는데, 그 후 부터는 내 손에 돌려 받은 그것이 우상이 아니다. 당신이 버려야 하는 우상은 어떤 것이 있나? 자기 자신, 자식, 남편, 아내, , 세상 권세, 건강,쾌락무엇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스럽나?  그것이 우상이다. 우상 때문에 망하였다가 회복된 이스라엘이 어떤 고백을 했는가? 14:8<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신약 시대의 사도 요한이 권면인 요일5:21<자녀들이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5.             우리 하나님의 돌보심(보호하심)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가?   33:26-27<여수론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리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좇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여수룬은 누구인가? 이스라엘 백성을 집단적으로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고유명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있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엄마가 젖먹이를 가슴에 안고 있는 그런 그림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우리를 안고 있는 팔은 어떤 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다. 그 팔에 안겨 있으면 평안 할까요 안 평안할까요? 엄마 품에 안겨서 젖을 빨면서 안겨 있는 아이는 세상이 요동친다고 해도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도 우리 주님의 영원하신 팔에 안겨 있는 평안을 맛보길 원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문자, 의의 문장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실제적인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안고 있는 하나님의 팔이 밖을 향하여 펴졌다. 무엇하기 위하여 말입니까? 나의 대적을 쫓아 보내고 흩어 보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쫓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팔이 내 대적을 쫓아 보낸다. 여기까지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내 대적이 맥을 못추고 도망가기 바쁩니다. 우리 하나님이 내게 무슨 일을 하라고 하십니까? 도망 가는 적을 멸하라고 명하십니다. ‘멸하라누가 누구에게 하는 명령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도망가는 적들을 따라가서 죽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들을 우리 주님이 흩으시며 추방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서 멸하면 됩니다. 흉포한 적들이 우리에게 대 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를 내리고 내 빼고 있는 놈들을 뒤통수를 후려 치라는 명령입니다.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                28:20<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 주께서 하늘에 오르시던 날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또 어떤 약속을 주셨나?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해 주셨다. 10: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우리의 원수는 뱀과 전갈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지요. 실제적인 뱀과 전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미지로 우리의 원수를 표현했습니다. 사탄과 그의 하부 조직인 악령들을 가리키지요. 이 놈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걸어 옵니다. 막강한 그들의 능력을 가지고 말입니다. 능력은 디나미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힘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탄과 악령들이 막강한, 인생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그런 power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지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권세를 주었습니다. 권세는 헬라어로 엑수시아이지요.  예를 들면 조폭이 쇠뭉치와 파이프로 나를 치려고 다가 왔지만, 내가 물리력으로는 그들의 쇠뭉치와 파이프를 막아 낼 수 없지만 무엇으로 막아 낼 수 있는가? 공권력으로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 공권력이 무엇입니까? 권세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그 권세를 위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권세를 사용하여서 흉포하게 우리를 억압하는 어두움의 영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28:18절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우리 주님께 위탁되었는데, 그 권세를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위탁했습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어두움의 영은 나를 공격한다. 지성적인 영역, 감정적인 영역, 의지적인 영역 모든 삶의 현장에서 막강한 능력으로 덤빈다. 이길 수 있는 길은 예수의 권세 밖에는 없다. 그 예수의 권세를 힘입어 우리는 승리한다. 

 

6.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하나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 뒤만 따라가면 된다는 설교를 들었기에,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0%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다. 우리의 구원 완성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이 분명히 있다. 순전히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역할만 하면 되는가? 곧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있는가? 장로교, 칼빈 전통에는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없지만, 감리교 요한 웨슬리 전통에서는 자유의지가 강조되어 나타난다.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노력이 합해져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쳐 죽이는 사건에서 보면 분명히 다윗의 역할이 있었지요. 다윗이 싸웠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인데, 이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전쟁에서 했던 역할은? 그의 무예다. 물매돌 솜씨와 그의 담대한 믿음이 이 역사를 만들었다.  다윗이 아니면 그 일을 해 낼 사람이 없었다. 모두 참호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두려워하고만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일에 사용했던 것은 다윗의 믿음과 다윗의 물맷돌 기술이었다. 이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다윗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 없이 그냥 하늘에서 천둥 번개를 골리앗에게 내리쳐서 죽이지 왜 다윗을 사용했는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동시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과 경험을 사용하여서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이루어 가고 하나님이 나의 선교 사역에 관여 하실 때도 이런 방식으로 하신다. 그냥 나는 눈 감고 귀막고 예수님이 가시면 쫄쫄 따라가면 되는가? 아니다. 나의 최선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서 주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필을 찾을 때에도 여호와의 사자가 먼저 나홀 성에 가셔서 준비해 놓기를 기도하고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를 이끌고 떠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앞서 가셔서 준비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무위도식하면서 룰루랄라하면서 놀았는가? 아니다.. 그는 기도했고, 준비했고, 우물가에서 합당한 배필을 찾았다. 어떤 기준을 마음에 세워 놓고 말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던가요? 물을 좀 달라고 하면 낙타 10마리에도 물을 길러 줄 수 있는 여자라면 이삭의 배필이 될 수 있다는 기준을 세워 놓았지요. 왜 우물가에 갔을까? 우물 가에 가야 여염집 처녀들과 아낙들이 물 길으러 나오기 때문에 수월하게 여인을 만날 수 있겠지요. 이런 일련의 생각과 행동들은 어디서 왔는가? 아브라함의 종의 생각이다. 무턱대고 발 닿는대로 가더라도 하나님이 하시겠지하는 것은 맹신이다.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인도하시는데 그러나 나는 최선의 지식과 경험을 사용하여서 처녀를 선별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 종 앞에 리브가를 데려다 놓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종의 마음과 생각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기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만사가 이루어지는가? 아니다. 내가 해야 하는 바는 다 해 놓아야 한다. 학문을 하여서 지식을 축적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도 그것은 이루어 질 수 없다. 각자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하여 힘쓰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자


전의진목사

2014.12.23 09: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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