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68     

금요기도회 :12/12/2014

대표기도:

찬송가: 151(162)

 

 

1.  4: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을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불렀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이 성령입니다.  죽음 저너머의 세계를 영적인 세계, 영계라고 부르지요.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영적 실존들이 존재해 있습니다.  우리도 죽으면 육신을 이 땅에 나두고 우리의 영혼은 영계에 들어가 있게 되지요. 그 영계에서 가장 거룩한 영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무 생물이 아닙니다. 또한 힘이나 권력이나 세력이 아닙니다. 무엇이라고요? 인격입니다. 인간은 인격체이지요.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격이라고 불리어집니다. ..의를 인격의 삼요소라고 부르지요. 이 구절에도 성령이 무엇을 가지고 있나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감정? 근심합니다.  성령이 감정을 나타냅니다. 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라>성령이 탄식하신다. 감정을 표출하지요.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이면서도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이런 관계가 잘 이해가 안되지요. 이런 존재가 이 우주 가운데는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와 계시는데, 우리가 그 성령님을 근심하게 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언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근심합니까? 우리가 짓는 죄악 때문에 근심합니다. 생각,감정,의지적인 행동으로도 죄를 짓는다. 말로,손과발로 죄를 짓지요. 우리는 죄 덩어리! 우리의 마음은 온갖 쓰레기 더미로 가득차 있다. 이것 때문에 성령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또 무엇 때문에 성령이 근심하는가? 죄는 아니나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온전하게 순종하기 못하는 것 때문에 근심하신다. 불순종!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이 시켰는데도 싫어서 안할 경우가 많지요.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못하고 느적느적 거린다면 하나님은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자라나서 그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또 주님 보다는 세상 재미에 탐닉하여서 산다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하루 왼 종일 드라마 보면서 보내고 온 종일 드라마의 내용을 반추하면서 산다면 성령이 근심합니다. 드라마를 보고 세상 재미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니나 거기에 푹 빠져서 살면 성령을 근심하게 만든다. 옛날 드라마 모래시계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태수였습니다. 태수가 드라마의 마지막에 죽는데, 밤새도록 토끼 눈이 될때까지 드라마 보다가 새벽 기도 나와서 기도하는데, 태수를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했다지요. 태수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작가 마음이지 하나님 소관이 아닙니다. 드라마 한 두편 보는 것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푹빠저서 지내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가 이 하루 동안 성령님을 근심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기를 바랍니다. 자꾸 자꾸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들면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조금씩 조금씩 소멸되어 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살전 5:19<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 불이 활활 타오르던 것이 점점 거져 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은 불일듯이 타오르기도 하고, 점점 꺼져 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 에 따라서 말입니다. 내가 주의 뜻을 따라서 순종의 길을 가면 갈수록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은 불일듯이 타오를 것이고, 내가 불순종의 길을 가면 갈수록 내 안의 성령의 불길은 꺼져 갑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성령의 불길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활활 타오르는가? 아니면 꺼져 가는가?아니면 불이 꺼져서 재만 남아 있는가? 지금 어떤 영적인 상태인가? 성령 불을 타오르게끔 보존해야 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바로 나에게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왜 모였는가? 성령불이 다시금 타오르게 만들기 위하여 모였다. 동의하면 아멘하기 바람!   성령의 불이 다시금 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해야 하는 것은 첫째로 지은 죄를 회개하고, 둘째로 불순종을 회개하고, 셋째로 세상 재미에 오리엔트 되어 있는 바로 그 마음을 끊어 버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실재를 경험했는가? 성경이 성령이 있다고 했으니 있는 줄 아는 것과 성령을 실재로 경험한 것과는 신앙생활이 천양지 차이다. 당신은 성령의 실재를 경험했는가? 자 그러면  왜 성령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가?  우리가 성령 안에서, 혹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침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소유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옛날 소떼와 양떼를 방목할 때에 자기의 소떼와 양떼를 다른 사람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낙인, 불로 문양을 소와 양에 지집니다. 이것은 내것이다. 다른 사람의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하여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자기의 소유로 삼기 위하여 성령 도장을 찌었습니다. 저 하늘 위에 초자연적인 실존들은 모두 보고 알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 하나님의 소유란 것을 말입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때문에 말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이고 얼마나 큰 복인데요. 하늘의 실존들인 천사들에게도 이 축복을 안 주었습니다. 누구에게 주었나요? 우주진, 우주의 먼지와 같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잖아요. 거룩한 천사들에게 성령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성령은 소유권을 나타낼 뿐 만 아니라 또 한 가지 다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보호해주고 돌본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이것을 오늘 본문 엡4:30절에는 <구원의 날까지>라고 표현해 주고 있지요.                /고후1:21-22<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성령을 기름부음, , 보증으로 비유해 주고 있지요.

2.  정절과 절개! 23:14-15<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ㅇ르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 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월신? 바알신? 여호수아의 정절과 절개가 나타나 있다.  가난한 것은 죄가 아니다. 못 생긴 것도 죄가 아니다. 장애도 죄가 아니다. 가난, 못생김,장애 때문에 부끄러워 말자! 진정으로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짓는 죄다. 우리 교회의 다섯 번째 기도 제목이 무엇일까?죄 짓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정결한 교회 되게 하소서! 성도들도 죄 짓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보다는 세상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수치스럽게 여긴다. 정결한 교회=정결한 신부! 예수는 우리의 신랑! 신랑에게 정절을 지키는 영적인 신부들이 됩시다.  소나무와 대나무! 소나무-정절(사육신,성삼문, 박팽년,이개 같은 이들)/대나무-절개(전주 기생,최현감의 부실,의암 논개 )-우리 교회 안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란다. 신앙의 정절-온 세상이 시꺼멓게 변해도 우리는 신앙의 정절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 세상 것 따라서 세상적인 성공을 위하여 신앙을 팔아 넘기지 맙시다. 신앙의 절개-오직 한 분 예수를 나의 영적인 신랑으로 삼아서 절개를 지킨다. 예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맙시다. 다른 이에게 우리의 영적인 순결을 팔지 않는다. 

3.    16: 18-19/현대 교회가 잃어 버린 것 세가지!/ 첫번째로 교회가 잃어 버린 것은 교회의 소유권자가 예수라는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누구의 소유인가? 예수의 것이다. 18절에는 예수께서 교회를 내 교회’ my church로 말씀하셨다.   땅 위에 있는 local church지역 교회가 영광스러운 이유가 무엇일까? 소유권자가 다름 아닌 예수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대형 교회이기에 화려한 실내 장식 최첨단 기술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비도 새고 우중충한 건물 안에 있는 지하실인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는 위대하다. 왜냐고? 그 소유권자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비록 건물도 없어서 미국 교회의 건물을 빌어서 쓰고 있지만 우리 교회도 예수께서 소유하고 있기에 위대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무엇일까?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오늘 본문처럼 18절에 보면 예수의 교회는 이 반석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 반석이 무엇일까요? 반석은 너럭 바위를 뜻하지요. 이 반석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베드로가 했던 신앙 고백입니다. 16절에 보면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건물일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모여 있는 루터 교회의 건물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 건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해변가에 모여 있으면 거기가 켐연장 교회이고 우리가 봄 전교인 수련회 기간에 토아 니피 수양관에 모여 있으면 거기가 켐연장 교회입니다. 여기는 교회 건물일 뿐입니다.  켐연장 교회는 위대합니다. 왜 위대합니까? 우리 교회 가운데 하늘과 땅의 임금인 예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켐연장 교회는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예수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교회를 누가 좌지우지합니까? 우리 인간이 주인 노릇하면 됩니까? 안되지요. 우리는 누구입니까? 종들입니다. 주인이 시키면 하고, 안 시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마치 CEO처럼 교회를 들었다 놓았다하면 됩니까? 당연히 안되지요. 우리는 예수의 종이 되어서 예수께서 시키는 일을 잘 감당하여서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면 됩니다. 우리의 기도?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예수의 주 되심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두 번째로 잃어 버린 것은 무엇인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18절에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교회는 죽음을 이겨낸 능력과 권세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잃어 버리면 교회는 별 볼일 없는 종교 단체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다른 종교 단체와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김에 있습니다.  18절의 음부의 권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음부란 무엇입니까? 어두운 그늘이라는 말이지요. 구약에서는 스올이라는 말을 신약에서는 하데스(여기에 사용된 말)과 같습니다. 모두 죽음, 사망을 가리킵니다. 권세라는말은 문이라는 말입니다.죽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사망권세가 내 곁에 입 벌리고 와 있지만, 우리 주님이 허락이 없다면 우리를 삼킬 수 없습니다. 사망권세라는 놈은 식욕이 대단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삼키고 또 삼켜도 배부름을 못 느끼는 놈입니다. 사망 권세가 교회를 농락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이 사망권세를 이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망 권세를 이깁니다. 고전15:55-57<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런데 우리들의 삶은 어떤가? 죽음이라는 것 때문에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던가요? 평소에는 죽음이라는 잊어 버리고 살기에 죽음을 이긴 것 같지만 막상 죽음이라는 것이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로 바로 우리 집 옆집에 불이 붙은 상태라면 패닉 상태가 되지요. 곧 불이 자기 집에 옮겨 붙으니까요. 죽음도 이와같습니다.  건강한데 검사해 보니 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으면 혼비백산하지요.  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는 그 순간부터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이 지내지요. 죽음은 우리가 정복해야 하는 마지막 우리의 영적인 원수입니다. 사탄 마귀는 죽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늘 그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지요. 2:15절에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인생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어디에 가야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고 한 평생 자유롭게 살아 갈 수 있습니까? 이곳 보스톤 땅요? 왜 보스톤? 최신식 병원이 많으니까? MGH병원, 다나 파버 병원, 칠드런 하스피털,브링가우먼 하스피털, 내로라 하는 병원들과 명의들이 즐비하잖아요. 그러나 병원 안에 영안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최신식 병원도 인간의 죽음 앞에서는속수 무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는 죽음을 이겼습니다. 그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 났습니다. 우리도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삶은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오 아버지 나로 하여금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세 번째로 잃어 버린 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베드로에게 주신 권세가 무엇인가? 천국 열쇠입니다. 베드로라는 일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권한입니다.  열쇠는 무엇하는데 씁니까? 집에 들어가고 나오고, 방에 들어가고 나오고 하기 위하여 열쇠가 필요합니다. 문을 자물쇠로 잠가 놓았다면 그 자물쇠를 열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하늘을 여는 열쇠가 베드로를 위시한 땅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열쇠를 사용하면 됩니다. 이 열쇠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천국 문을 여는 열쇠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는 매여져 있을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는 풀리어져 있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매고 푼다는 것은 내가 땅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미 매여져 있고δεδεμένον, 이미 풀리어져 있겠다λελυμένον 는 약속입니다.  완료 수동형을 쓰고 있지요. 내가 땅에서 한번 매는 행동을 하면 하늘에서는 이미 매어져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땅에서 한번 푸는 행동을 취하면 하늘에서는 이미 풀리어져 있게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Remote controller! 버튼을 누르면 저 쪽 수상기에서는 이미 화면이 바뀌어 있지요. 기도가 이렇게 리모트 콘트롤러라는 말입니다. 나는 땅에, 하나님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에 우리의 기도가 도달하는데 몇 십년 몇 백년 안 걸립니다. 순간에 도착합니다. 이런 권세를 어디에 주었나요? 교회에 주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 속에 우리 주님이 임하여 계십니다. 마태복음 18:18-20절을 찾아서 읽어 봅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축복이지요. 법당에 모셔 둔 부처님이 우리 기도를 이렇게 들으시겠어요. 사당에 모셔 둔 공자님이 우리 기도를 이렇게 들으시겠어요. 누가 이런 식으로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겠습니까? 14: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 교회 안에 기도응답이 넘쳐서 누구든지 우리의 모임 안에 들어와서 간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응답 받는 그런 예수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 오 아버지 내 기도를 응답하옵소서!


전의진목사

2014.12.15 16:16:02

12/12/14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4/1212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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