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67     

금요기도회 :12/5/2014

대표기도: <선교부>

찬송가: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1.                지난 주일날 교제(fellowship)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정말로 우리에게 액세서리이기에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가? 반드시 해야 한다. 교제는 예배 후에 다과, 빵과 과자와 과일과 커피마시면서 담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이웃에게서 얻고, 나에게 넘쳐나는 것을 이웃에게 주는 것이 교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교제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사탄의 최우선적 공격을 당할 것입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초식 동물들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무리를 지어 있어야 합니다. 무리들과 뚝 떨어져 있으면 야생동물의 1번 공격 타겟이 될 것입니다. 6: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믿음의 방패! 무엇 하는 병기인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병장기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방패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네모난 나무로 만든 방패이지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방패로 화살과 창과 칼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이 통나무를 굴리거나 돌을 굴리거나 섶에 불을 붙여서 산 언덕에서 굴리면 개인용 방패로는 막아 낼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로마의 군인들이 개인용 방패를 고리에 걸어서 방어벽을 만들면 굴러오는 통나무를 막아 낼 수가 있습니다. 연합하면 사탄의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제는 성도가 연합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어느 지역에서 신앙생활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가면 곧 바로 교회를 찾아 내어서 등록하고 함께 할 지체를 찾아서 교제를 나누십시요. 그게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입니다. 교회 등록 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고 교제를 피하는 분들은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철새떼가 되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를 기웃기웃 거리지 말기를 바랍니다.성도의 교제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겠습니다.

/교제와 연합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연합이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우리 주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 주님으로부터 온갖것을 받아 누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연합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우리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우리 주님과 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고전6: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나라>고린도 교회의 음행 문제를 책망하면서 사도 바울이 주었던 교훈입니다. 16절에는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을 이루지만, 예수와 합하는 자, 연합하는 자는 예수와 한 영이 됩니다.  연합은 예수를 내 안으로 영접하면 예수께서 내 안으로 들어 오십니다. 혹은 내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와 나는 연합하여서 하나가 되는데,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영이 하나로 결합되어서 하나의 영이 됩니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이 연합은 얼마나 단단한 결합일까요? 이 결합, 예수와 내가 하나로 되어진 영적인 연합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세력이나 어떤 힘이나 어떤 영적인 존재도 그 결합을 부술 수가 있을까? 없다. 8:38-39<내가 확신 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반면에 교제는 어떻던가요? 이것은 너무나 잘 부서지고 깨어지고 끊어 지기도 하고 그리고 너무나 쉽게 회복되고 복원되지요. 교제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인데, 함께 있으면 주님이 가진 좋은 것이 모두 내게로 흘러 들어 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는 흘러 들어 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생명, 주님의 기쁨, 주님의 평강, 주님의 사랑도 내게로 흘러 들어 오지 않는다. ? 교제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교제가 단절되나요?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말입니다. 교제는 내가 지은 조그마한 죄 때문에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깨어집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 놓지요. 그 교제를 회복하자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죄를 제거하면 됩니다. 죄만 제거되면 이전처럼 우리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일어나지요. 어떻게 죄가 제거 되나요? 지은 죄를 자백하면 됩니다. 다른 것 할 필요 없습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구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잃었던 교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개끗하게 하실 것이요>  연합과 교제의 관계는 우리가 아무리 망나니 짓을 하더라도 부모가 호적을 파 버릴 수가 있나요? 없지요.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 연합된 관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그 죄 때문에 연합이 부서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제는 어때요? 쉽게 부서지지요. 부모와 자식간에 그리고 부부간에 뭔가 잘 못한 일을 숨기거나 하면 얼굴에 나타나고 그러면 얼굴과 눈길을 피하기 마련이지요. 이것이 교제입니다. 교제는 쉽게 부서지고 그리고 쉽게 회복하게 되기도 합니다.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과 나는 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결코 나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고 나의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분들은 이 시간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여서 교제를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1.             마르다와 마리아/10:38-42/예루살렘 근처인 베다니에 나사로,마르다,마리아가 살았다. 예수와 각별한 사이!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오가면서 예수일행은 나사로의 집에서 묶었습니다. 나사로의 집이 예루살렘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 일행은 아무리 적다고 해도 십수명은 족히 되었습니다. 많은 숫자이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 접대를 하자면 무척 바쁘고 일손이 딸리겠지요. 마리아는 방에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말씀의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보다 못해서 마리아를 부엌으로 좀 내려 보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을 하지요.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정황입니다. 마르다는 어떤 타잎의 성도이고 마리아는 어떤 타잎의 성도일까요?

/마르다 타잎의 성도? 언니 타잎의 성도! 말씀 없이 일과 봉사에만 힘쓰는 성도를 가르킵니다.말씀을 듣고 배우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몸을 움직여서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는 헌신적입니다. 40-준비하는 일이 많아, 41-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했다. 손님대접 때문에 준비하는 일은 많고 일손을 딸리고 하니 마음이 분주하고 어수선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준비하는 동안 기쁘고 즐거워야 하는데, 일에 대한 부담이 커지는 바람에 마음에 기쁨을 잃어 버렸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교회 규모가 작을 경우에는 한 사람이 여러가지 일을 도맡아서 봉사하게 될 경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지요.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하여서 여러가지 일을 맡겨 주셨다는 마음에 충성스럽게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지요. 이렇게 되면 몸이 감당하지를 못하지요. 직장일에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교회일은 자연히 밀리게 되고, 그러면 마음은 바빠지고 봉사하는 즐거움을 잃어 버리게 되기 십상입니다. 다른 분들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남들은 앉아서 노는 것 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하던 일을 놓아 버립니다. 그러면 자기의 마음에 다른 분들이 자기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 처럼 느낍니다. 그럴 사람 하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주의 일을 자신이 완수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늘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있지요. /교회 봉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교회가 무리 없이 잘 굴러 가도록 하기 위하여? 봉사의 목적은 그 봉사를 통하여 봉사하는 분의 영혼이 성장하고 믿음이 성장하고 그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 일을 성공적으로 잘 마쳤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봉사하고 섬기는 분의 영혼이 다치고 병든다면 봉사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분들이 현대 교회 안에는 많은데, 마르다 타잎의 성도를 보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신앙 생활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바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하면 얼마나 빨리 교회 일을 하는가하는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방향으로 아무리 빨리 달려가더라도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바른 방향으로 섬기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에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나의 봉사에 어떻게 평가하는 것보다는 우리 주님이 나의 봉사를 어떻게 평가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 시데에 바리새인들, 열심당원들,에세네파, 이들은 종교적인 엘리트들입니다. 종교적인 열정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심은 있었으나 방향이 잘못되었다. 마르다 타잎의 성도는 열정은 있으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가지더 마르다의 잘못은 자신의 잣대로 이웃을 판단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땀흘리면서 일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래하면서 비판합니다. 내가 볼 때에는 저 사람의 신앙이 영 아니올시다이거든요. 그래서 저 사람도 나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다의 관점에서는 방에 틀어 박혀서 주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영 형편 없는 자처럼 보입니다. 마르다의 눈에는 형편 없었지만 우리 주님은 인정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판단을 가지고 우리 주님을 움직이려고 했거든요. 이런 분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께서 지금 이시간에 <열받지 말고 힘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으로부터 열받지 말고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열받으면 시험이 들게 됩니다. 이웃의 신앙을 폄하하고 그리고 이 교회가 영적으로 어리다니 혹은 영적으로 문제 있다는 등하면서 폄하하지요. 문제는 누가 가지고 있나요? 마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보고 있는 눈을 이제는 하늘을 향하여 열어 놓기를 바랍니다.

/마리아 타잎의 성도-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무엇을 했는가? 예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33:3<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니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일까? 주님 발 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봉사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가? 봉사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봉사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봉사한다면 그것도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마리아 타잎의 성도? 성경공부반에 등록 열심히 공부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열심이 특심하신 분들은 이 교회 저 교회의 성경공부반, 신학 세미나에 좇아 다닙니다.  보스톤 지역에 십수년 전에 성경을 이상야릇하게 가르치는 성경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아니고 평신도 교사인데 자칭 성경교사라는 분들인데 자신들이 아주 독창적인 성경해석을 하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이 교회 저교회 성도들을 모아다가 성경을 가르치곤했지요. 우리가 가진 성경지식은 이미 과거에 믿음의 선배들이 했던 이야기 입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승을 받있을 뿐입니다. 누가 더 많이 받았느냐 적게 받았느냐의 차이 뿐이지 신앙에는 새 것이 있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이미 옛시대의 믿음의 선배들이 했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 교만해 하지 않지요. 그런 교사들에게 성경을 배우고 나서는 교회에 돌아와서 교회안에서 이상야릇하게 신앙행동을 하곤 하더군요. 성경공부는 그 교회의 목사나 전도사나 교역자나 리더들에게 배우면 됩니다. 다른데 찾아가서 배우는 것은 그만 두십시요. 

마리아 타잎의 성도는 성경공부하면서 진리를 알아서 기뻐하지만 봉사하는 일에는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 주님을 기쁘게 했는가? 마르다인가 아니면 마리아인가?  설교 듣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일이 몸을 움직여 봉사하는 것보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리아 타잎의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성도가 교회 생활하는 동안 말씀듣고 배우고 기도하는 일은 먼저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만약 봉사하는 일을 깔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봉사 열심히 하는 분들은 이단에 빠지지 않는데 성경을 배우기 위하여 이곳 저곳을 전전하시는 분들은 이단에 빠질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왜 마리아 타잎의 성도가 마르다 타잎의 성도보다 낫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을까? 본문에 대한 오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타잎의 성도가 더 낫다고 말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오해는 성경을 주의 깊게 읽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입니다.  42절 말씀을 한 번 따라 읽습니다<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상다리가 부러 지도록 차리는 진수 성찬에 골몰하지 말고 반찬은 한 가지나 혹은 두서너가지면 된다. 밥 한공기에 국 하나 그리고 반찬은 김치를 포함하여서 삼찬이면 족하다 이 소리가 아닙니까? 더 간단하게는 밥 그릇에 국을 담아서 국밥을 만들고 김치 한 조각이면 족하다라는 말입니다. 음식 장만하면서 손대접 하는데 너무 골몰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한 두가지 정도의 반찬만을 준비하면 일하는데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지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리아는 <이 좋은 편τὴν ἀγαθὴν μερίδα>을 선택했다. 비교급입니까? 아니지요. 원급입니다. <더 나은 편>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편은 비교급인데, 봉사하는 것보다는 말씀 듣는 것이 더 나은 편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주님은 비교급을 써서 마리아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원급을 사용해서 비판을 막아 주었습니다.  헬라어로 된 성경에도 이 좋은 편이지 더 나은 편 혹은 더 좋은 편이라는 비교급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원급을 사용했는데도 봉사 그룹과 말씀 그룹 사이에 대립이 첨예한데, 우리 주님이 비교급을 사용해서 말씀 그룹을 옹호하기라도 했더라면 교회가 지금보다 더 시끄럽게 싸움질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싸움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비교할 때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중시하길 바랍니다. 괜히 이웃과 비교하면서 열 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웃이 어떤 신앙생활을 하던 그것은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우리 주님 소관입니다. 이웃의 신앙을 내가 설계하려고 하니 싸움이 나는 겁니다. 요한복음 21:21-23절 참조어떤 농부가 한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검은 소였고, 다른 한마리는 누렁이었습니다. 길가던 나그네가 밭 저쪽에서 밭가는 농부를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검정소와 누런소 중에서 어떤 놈이 힘이 더 세고 말 더 잘 듣고 일을 더 잘합니까? 그랬더니 농부가 하던 일손을 멈추고 길가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나그네에게 귓속말로 저 검정소가 일을 더 잘한다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그네가 농부에게 그냥 밭에서 대답하시지 어찌 귓속말로 대답을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동물들이라도 자신들이 듣는 가운데 누가 상대적으로 잘하고 누가 상대적으로 못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된다는 말을 농부가 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못하는 소는 열등감이 생기고 잘 하는 소는 우월감이 생겨서 모두 망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교우위에서 밀리는 자는 열등감이 쌓이게 되고 잘하는 자는 우월감 때문에 그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자식들에 대하여 너무나 자주하는 실수이지요:얘 너는 왜 제만큼 못하니하면서 야단칠 때가 많지요. 그것은 아이들에게 열등감이 쌓이게 만들어서 아이를 망가지게 만드는 일이지요. 그 야단을 통하여 아이들이 변화되면 좋은데, 그 야단은 아이를 변화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열등감만 쌓이게 하고 아이를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주님이 마르다의 부정적인 비판을 막아 주었지요. 마르다야 너는 너 좋은 편을 선택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마리아는 말씀 듣는 편이 좋았기에 그것을 선택했고 마르다는 몸을 움직이는 봉사의 일이 좋아서 그것을 선택했지 않았느냐라는 말이지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기도 하고, 또한 봉사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방법이 오직 기도와 말씀만이 아닙니다. 봉사와 섬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임재에 넉넉히 들어갑니다. 중세 시대의 로렌스 형제 이야기 아십니까? 많은 분들이 그 당시에 사제(신부님)을 찾기 보다는 평신도인 로렌스 형제를 찾아가서 신앙 상담을 했다고 하지요. 왜요? 은혜가 있으니깐 그랬겠지요. 로렌스 형제는 접시 닦기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지요.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듯이 형제를 접시닦는 일을 가지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형제 섬김을 통하여서도 형제를 향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마리아 타잎의 성도의 약점은 봉사와 섬김이 약하다는 점입니다. 말씀을 깨달아서 기뻐하면서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이것이 문제이지요. 교회는 수도원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세상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와 섬김이라는 활동이 교회에서 나와야 합니다. 교회가 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세상 가운데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절간처럼 산 중에 수도원을 만들어서 기도와 묵상을 하면 되지요. 교회는 산 중에 있는 절간이나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타잎의 성도인가? 마르다인가? 마리아인가? 첫째 딸이 마르다, 둘째 딸이 마리아! 모두다 장점도 있고 약점도 가진 딸들입니다. 첫째 딸 마르다의 장점은 무엇인가? 섬김과 헌신이 있습니다. 활동이 있지요. 단점은 무엇입니까? 기도와 말씀과 예배가 약합니다. 그 반면에 둘째 딸 마리아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가 강점입니다. 약점은 섬김과 봉사가 빵점입니다. 이 두 딸의 강점만을 가진 딸이 없을까? 이런 딸이 셋째 딸입니다. 가상적인 딸이지요. 우리 주님이 마르다도 기뻐하셨고, 마리아도 기뻐하셨지요. 그러나 모두 약점을 지닌 딸입니다. 이 두 딸들의 약점이 사라지고 이 두딸의 강점만을 가진 딸-셋째 딸, hybrid! 이런 딸이 우리 주님의 이상적인 딸입니다. 셋째 딸은 어떤 유형의 성도일까요? 두 딸의 약점이 모두 사라지고 두 딸의 강점만을 가진 딸-100% 마리아의 장점을 가진 딸, 100%마르다의 장점을 가진 딸입니다. 50% 마리아의 장점과 50% 마르다의 장점을 가진 딸이 아닙니다.  셋 째 딸은 말씀듣는 현장이나 기도의 현장에서는 !00% 마리아의 심정이 됩니다. 성경 공부에 열심을 가지고 집중합니다. 기도에 열정적입니다. 또 예배를 마치고 기도회를 마치면 부엌으로 달려 들어가서 소매를 걷어 붙이고 100% 마르다가 되어서 땀 흘려 성도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면서 섬깁니다. 이마에 땀이 흐를 때까지 힘 다하여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섬깁니다. 섬김의 장에서는 누구가 됩니까? 마르다가 되지요. 성경공부의 장에서는 누구가 됩니까? 마리아가 되지요. 변신을 잘해야 합니다. 셋째 딸이 많이 모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첫째 딸이 많이 모여 있는 교회에는 무슨 일이 생깁니까? 불평 불만이 많이 생기고 시끄럽게 싸우고 심하면 교회가 쪼개 집니다. 이것이 첫째 딸이 많이 모인 교회의 약점입니다. 둘째 딸이 많이 모인 교회는? 손과 발로 행하는 섬김이 없어집니다. 교회가 수도원처럼 되어 버립니다. 교회는 명상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손과 발로 활동하는 섬길 줄 아는 활동가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성경공부에 너무 특심하다가 보면 이단에 빠지기도 하지요. 셋째 딸이 많이 모인 교회는 이런 모든 약점이 제거된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딸인가?

/미국 땅에서 태어난 우리의 아들과 딸들-코메리칸들! 1.5, 2세 아이들 가운데 주변인들이 많다. 주변인이란? 주변인이란 미국 문화권속에도 완전히 들어 가 있지 못하고 한국 문화권에도 완전히 들어가 있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두 문화권 언저리에서 자기의 id 즉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유대감이나 소속감을 확실히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변인이라고 부르지요. 1.5세나 2세인 우리 아이들이 영어는 잘하지요. 그러나 미국 사회에 들어가면 어색함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에 들어가면 어떻든가요? 어색함을 느끼지요. 주변인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합니다. Identity Crisis를 겪고 있습니다. 건강한 2세를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이 건강한 2세입니까? 미국 컴뮤니티에 들어가서는 완전한 미국인처럼 말하고 생각히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지요. 또한 한국 컴뮤니티에 들어가서는 한국인 답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고요. 미국의 메인 스트림 속에서 한국인으로서 자리 매김 할 수가 있도록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웁시댜. 말과 식사!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등등을 먹여야 하고, 그리고 한국말을 자유 자재로 쓸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 학교가 정말로 필요합니다. 집에서 가르치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셋째 딸의 표상처럼 말입니다. 멋있는 2세들을 키워 내 놓은 우리 교회가 되어야 겠습니다.    


전의진목사

2014.12.08 15:16:19

12/05/14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4/120514.mp3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02 금요기도회(03/20/15) [1] 김영호목사 2015-03-23 1156
401 금요기도회(03/13/15) [1] 김영호목사 2015-03-16 1143
400 금요기도회(03/06/2015) [1] 김영호목사 2015-03-09 1162
399 금요기도회(2/27/2015) [1] 김영호목사 2015-03-02 1215
398 금요기도회(02/20/15) [1] 김영호목사 2015-02-23 1313
397 금요기도회(02/13/2015) [1] 김영호목사 2015-02-16 1287
396 금요기도회(02/06/2015) [1] 김영호목사 2015-02-10 1423
395 금요기도회(01/23/15) [1] 김영호목사 2015-01-27 1654
394 금요기도회(01/16/2015) [1] 김영호목사 2015-01-19 1583
393 금요기도회(01/09/2015) [1] 김영호목사 2015-01-12 1689
392 금요 기도회 (1/2/2015) [1] 김영호목사 2015-01-05 1682
391 금요기도회(12/26/2014) [1] 김영호목사 2014-12-29 1830
390 금요기도회(12/19/2014) [1] 김영호목사 2014-12-23 2053
389 금요기도회(12/12/2014) [1] 김영호목사 2014-12-15 1979
» 금요기도회(12/05/2014) [1] 김영호목사 2014-12-08 1952
387 금요기도회(11/28/2014) [1] 김영호목사 2014-12-01 1869
386 금요기도회(11/21/14) [1] 김영호목사 2014-11-24 1981
385 금요기도회(11/14/2014) [1] 김영호목사 2014-11-17 2069
384 금요기도회(10/31/2014) [1] 김영호목사 2014-11-03 2170
383 금요기도회(10/24/2014) [1] 김영호목사 2014-10-27 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