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65     

금요기도회 :11/21/2014

대표기도:

찬송가: 그 이름 비길데가 어디 있나?

 

1.    예수는 주, 예수는 그리스도:예수는 참 좋으신 나의 주인이시다.

어떤 사람이 별로 값나가지 않는 개, 똥개라고 부르는데,  한 마리를 집에서 키웠습니다. 웬만큼 자라면 잡아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개는 보통 누렁이지요. 어느해 여름 주인은 키우던 개를 묶은다음 인적이 드문 들판으로 끌고 갔습니다. 개고기는 두들겨 패야 좋다는 말을 들은 터라 개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개가 날뛰다가 묶었던 끈이 풀어졌습니다. 개는 주인한테 맞아죽지 않으려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주인은 "이 놈이 어디로 도망쳤을까?" 이 나쁜 놈의 개라고 욕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개가 집에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맞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개를 껴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누렁아 내가 다시 개고기를 먹으면 개자식이다"라고.

토사구팽이라는 사자 성어 아시지요. 토끼 사냥에 사냥개를 사용합니다. 사냥이 끝난 다음에 무엇을 합니까? 개를 삶아서 먹어 버렸습니다. 나쁜 주인, 악덕 군주이지요.

우리 주님은 slave driver가 아닙니다.

2.             우리 주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어떤 의미에서 좋다는 것인가? 내게 경제적인 번영과 육신적인 건강을 주시니 좋다는 의미인가? 하나님을 왜 섬기는가? 이런 외적인 복을 얻기 위해서인가? 이런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지요. 이런 성공과 번영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섬길 만한 가치가 있는 신인가? 만약에 우리에게 눈물과 아픔과 괴로움과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하시는 신인데도 우리가 그를 믿을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성경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도대체 선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온 세상에 악이 편만하게 퍼져 있는데도 하나님은 그 악을 심판하고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고통하면서 웁니다. 예언자 하박국의 탄식도 이런 유형의 탄식이지요. 1: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출33: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3:18<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출33: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의 선한 형상을 지나가게 하시겠다고 응답하시지요.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들어 있습니다. 신의 선하심은 신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선이시고, 즉 존재론적인 선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오해? /우리 주님 예수께서 하셨던 비유 가운데 마 20:1-16절에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비유는 천국 비유이지요. 노동 시장에 어떤 주인이 나가 보니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품꾼을 하루에 한 데나리온에 계약을 하고 포도원에 일하러 들여 보냈습니다. 또 제 3, 6, 9시에 제 11시에도 노동 시장에서 빈둥 거리면서 노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도 불러서 포도원에 일하러 들여 보냈습니다. 1데라니온에 계약한 것이 아니고 그냥 상당히 주겠다고만 하고서 늦게 노동자들을 들여 보냈습니다. 날이 저물게 되어서 품삯을 주인이 지불합니다. 제일 늦게 들여 보낸 사람부터 주인이 품삯을 주는데, 제일 늦게 들여 보냈기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 온 사람은 더 많이 받으리라고 예상을 했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일 먼저 들어와서 하루 종일 일한 그 사람이 불평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이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1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나를, 혹은 나의 이런 결정을)악하게 보느냐? 하나님은 어떤 분?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 우리는 우리의 안경을 끼고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빨간 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푸른 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달리 보입니다. 나에게 좋게 대해 주시면 하나님이 선하시고 내게 재난을 주시면 하나님은 악한 분으로 인식합니다. 집에서 도둑을 지키는 개에게 고기를 한 덩어리 던져 주면 개가 도둑에게 짓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에 이런 방식으로 대하지 않던가요? 내가 시련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만이 그렇게 신앙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좋은 날을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게 좋은 날을 비록 주시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심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하십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장성한 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오해하게 만드는 신학이 번영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선한 신이기에 우리에게 번영을 주어야 합니다. 가난에서 탈피하여서 우리를 부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고, 병든 내 몸을 고쳐서 건강하게 만들어 주어서 오래 동안 땅에서 장수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아야 하고 손대는 일들마다 형통하게 풀리어 나가야 하고 세속적인 성공을 주어야 하나님은 선한 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번영 신학입니다. 기복신앙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을 세속적인 성공에 두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성공은 신앙의 결과물이어야 하는데 온 마음을 세속적인 성공에 두고 있습니다.

            ㅣ욥의 경우-1-2장에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자랑합니다. 1:8절에는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고 하면서 칭찬했지요.  9절에는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하면서 사탄이 이의를 제기하지요. 사탄이 말하는 욥이 어떤 까닭이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입니까? 10절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지요: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루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물질적인 번영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이 어떤 신앙의 사람인지를 가려 내기 위하여 시험을 해도 좋다고 허락하지요. 어떤 시험? 처음에는 그의 소유물에 손을 대도 좋은데,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조건을 두었습니다. 사탄이 한 날에 욥의 소유물을 모두 잃어 버리게 하고, 욥의 아들과 딸도 모두 잃어 버리게 만들지요. 이런 황망한 일을 당했어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자 사탄이 하나님께 한 가지 더 요청합니다. 그의 몸을 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의 뼈와 살을 치면 틀림없이 주를 욕하게 될 것이다라고 사탄은 장담하지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 욥의 생명은 해하지 말고 몸과 살을 쳐도 된다고 허락하지요. 이리하여 긴긴 사탄의 시험 속에서도 욥은 범죄하지 않지요. 욥은 모든 악을 이기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험을 이기고 난 다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전에 주셨던 복의 갑절을 주셨지요.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번영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섬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선을 믿었기에 모든 것을 잃어 버렸을 때도 하나님을 붙들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34:8<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시편 34편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언제 그 시편을 썼습니까? 34편의 표제어를 보면 다윗이 어떤 정황 속에서 이런 노래를 지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 나서 지은 시입니다. 사무엘상 21장과 22장 의할 것 같으면 다윗은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다급해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피합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성읍으로 이스라엘과 다윗의 원수였습니다. 그들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신하들은 왕 앞에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던 바로 그 다윗입니다라고 합니다. 블레셋 왕의 말 한 마디에 죽을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여 있습니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다윗은 미친 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침을 수염에 흘리고, 문에다 끄적거리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미친 척을 했고 이 행동은 성공했습니다. 왕 아기스는 그를 쫓아냅니다. 시편은 아기스를 그냥 블레셋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는 그때 아기스에게 거절을 당하자 아둘람 굴로 피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형제와 아비의 온 집, 그리고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모든 자가 그에게 나아왔다고 합니다. 400명이나 되었고 졸지에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쓴 시입니다. 아둘람 굴 속에서, 여전히 사울에게 쫓기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리고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 말입니까?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곤고한 자 중에 가장 곤고한 자였던 다윗은 여전히 그 곤고함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나요? 지금은 이렇게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곧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 건져 주실 것이라는 소망에 근거하여서 하나님이 선하다고 말하고 있나요? 아니지요. 상황이 개선된다고 하여서 다윗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물 나는 악 조건에 있지만 그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번영의 신학에 물들어 있는 신자들은 다윗의 믿음과 깨달음이 이해가 안되지요. 번영의 신학에 물들어 있는 분들은 하나님이 실패한 내 사업을 일으켜 주실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게 선하시니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번영의 신학에 물들어 있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게 선하시니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방식 속에 제한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생각대로 해달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내 안경을 끼고서 보게 되지요. 그러나 다윗을 보십시요. 아둘람 굴에서 장래가 불투명한 그런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지요.

            |모세의 경우를 볼까요? 33:1-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야굽 당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 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겁니까 안 주겠다는 겁니까? 주겠다는 말이지요. 너희가 불순종 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동행하면 너희를 진멸하고 죽어 없앨 수가 있으니 내가 같이 가지 않겠다. 지금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언제 나왔나요? 모세가 첫번째로 40일 금식하면서 시내산 위에 있었을 때에 아론의 영도하에 산 기슭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의 노를 격발 시켰지요. 그래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내가 너희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않겠다. 그 대신에 사자를 하나 붙여서 너희를 그 땅에 들여 보내 주겠다. 땅은 조상들에게 약속한 것이니 내가 약속을 지켜 주겠다는 말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진중에 있지는 안해도 무엇은 얻을 수가 있습니까? 그 동안 땅이 없는 유랑하던 민족이었는데 땅이 생기잖아요? 이 소리를 듣고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께 말하나요? 하나님이 안 가시고 그냥 사자를 보내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땅만 주시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없어도 됩니다라고 대답했나요? 아니지요 출33:15절의 모세의 대답<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셔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아 온 그대로 살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소리 아닙니까? 번영 신학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어도 좋아요. 그저 물질적인 번영이 있고 건강이 있고, 가족들이 평안하고 화목하면 그만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교수님이 자기의 부인이 조울증환자였는데, 그것 때문에 무척 어려움을 많이 겼었는가봐요. 6개월 조증과 6개월 울증으로 부인이 정서적으로 불안한 삶을 사니 교수님이 바라던 행복이 모두 깨어졌나봐요. 그 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데요. 누가 내 아내의 병을 고쳐 주어서 내가 아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낼 수 있게 해 준다면 그 분이 부처님이라할지라도 자신이 그 부처님을 섬기겠다고 말하더이다. 이게 번영신학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경제적인 번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난해도 좋으니 그냥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하나님의 태도가 바뀝니다. 33:14<여호와께서 이르시도히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모세의 결단에 감동을 먹었지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니 무엇을 얻습니까? 하나님도 얻고, 또 무엇도 가나안 땅도 얻지요.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번영은 믿음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번영은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신앙 생활의 결과물입니다. 번영의 신학은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사탕발림의 신학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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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상대적으로 선하신 분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십니다. 이것을 절대 선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우리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도 존재론적으로 우리 하나님의 선함을 배워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행실은 선한 존재가 되었을 때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3.        1: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ὃς ἐρύσατο ἡμᾶς ἐκ τῆς ἐξουσίας τοῦ σκότους καὶ μετέστησε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Υἱοῦ τῆς ἀγάπης αὐτοῦ, / ἐρύσατο ,  μετέστησεν 은 모두 과거 시제이다. 건져 냈고, 옮겼다는 과거 시제! 과거에 일어난 하나님의 액션이다. 지금 나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즉 예수의 나라! 내 주위에는 어두움의 권세가 없다. 내 주위는 밝은 빛으로 빛나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은 어떤 분? 하나님은 빛이시다. 요일1:5<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4:8). 하나님은 영이다(4:24). 하나님은 불이다(12:29).

빛과 어두움-물리적인 빛과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빛과 영적인 어두움을 가리킨다.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영계는 실제적인 빛과 어두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이 영계의 하나님 나라를 밝히신다. 예수를 믿고 내 마음에 받아 들이는 순간 우리는 영적 어두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서 어디로 옮겨졌나? 영적인 빛의 세계로 옮겨졌다. 우리의 영에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내 안에는 아직도 어두움이 남아 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져 와 있지만 여전히 처리 되지 않은 어두움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 영은 변화 되어서 빛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지만 여전히 내 혼과 내 육(인간을 삼분법으로 보았을 때에)은 어두움의 권세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로다.

예수를 영접하고서 거듭나게 되면 사탄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탄과 그의 하부 세력들인 악영들, 어두움의 영들이라고 부르는데 무수히 많은데 이 어두움의 영들은 죽은 자들의 영이 아니다-자기의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기에 다시 찾아 오기 위하여 예수 안으로 들어간 나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이 공격을 못 견디면 우리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을 잃게 된다.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내게 남아 있는 어두움을 교두보로 사용하여서 어두움의 영이 나의 영적인 생명을 파괴하기 위하여 공격을 개시합니다. 어떤 형태로?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시험 거리들을 발생시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재난들, 손해나는 일들, 가정에 우환들이 일어나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어서 그런 모양이다 하면서 신앙을 버리게 된다. 또한 무슨 일? 예수 믿으면 핍박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옛날 조선시대에는 어떤일? 가정에 유교를 믿으면서 조상 제사를 지내는데, 아낙네가 예수를 믿으면서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던가요? 그것을 이겨 내지 못하면 예수 생명을 잃어 버리지요. 여기에 굴복하게 되어서 예수를 버리고 교회를 멀리한다면 영적인 생명이 죽는다느 말입니다. 사탄의 공격이 일정 기간 파도가 밀려 오듯이 공격해 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밤에 꿈 속에서도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몸에 고통을 가하기도 합니다. 일정 기간 동안 이런 파상 공격은 계속되기도 합니다. 어떤 초등학생의 고백예수를 영접하고 나니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다고 들어간 예수를 빼내 달라고 요청했다. 누가 그렇게 답답하게 만드나?어두움의 영이다. 이럴 때 어떻게 대처 해야 하나? 어떻게 대처해야 주신 영적 생명을 지켜 낼 수 있나? 믿음을 굳게 하면서 사탄과 어두움의 영을 대적하면서 어두움의 영은 떠나라고 명령을 내리면 된다. 벧전5: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어떤 기도? 선포하면 된다. 선포기도란? 사탄을 대적하는 기도다. 어두움의 영들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면 된다.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서 홍해 맞은 편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에 애굽의 바로와 그의 군대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추격해 왔습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서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로가 선발된 병거 600대와 군 자휘관을 거느리고 추격해 왔다. 14:5<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하고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은 홍해이고 뒤는 애굽의 기병대를 맞이하고 있는 절대절명의 상황입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출14:19-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이긴다. 어두움의 영이 하나님보다 강한가? 아니다! 주를 의지하여 싸우면 백전백승이다. 한 두번 찝적 거리다가 멀리 도망간다. 대항하여서 이길 수 없음을 어두움의 영은 확연히 알고 있다.  어두움의 영보다 더 강한 분이 우리를 붙들고 있음을 알기에 더 이상은 공격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질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후부터 어두움의 영이 다른 관점에서 공격해 들어온다. 어떤 관점? 우리의 영적 생명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사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시험이 일생 동안 계속된다. 이 공격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빼앗기 위한 공격이 아니다. 이 어두움의 영의 공격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습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공격한다. 내게 아직 처리 되지 않은 습관을 타고서, 혹은 부정적인 생각을 교두보로 사용해서, 혹은 내게 있는 두려움의 감정을 사용하여서 우리를 무너 뜨릴려고 공격한다. 내 속에 있는 어두움을 인식하고 그것을 빛속에 드러내면 어두움은 나를 떠나게 된다. 그러면 그 어두움의 영역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화장되어 나간다. 어두움이 물러 나는 만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확장되어 나간다.

5: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실 때에 책망은 무엇으로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딤후3: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책망이 빠진 현대 교회의 설교! 사랑과 격려와 위로 뿐인 현대 설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그 일이 설교에 빠져 있다. 사람의 심령을 찔러 쪼개면서 책망해야 한다. 그 책망 속에서 죄로 인하여 죽은 영혼이 살아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맛사지가 아니다 교회는 마사지 시술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메시지이다. 칼로 수술한다. 심령의 암세포를 도려 내는 곳이다.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 아프다. 그런 아픔을 참고 인내하면 살아 날 수 있다.  


전의진목사

2014.11.24 10:51:22

11/21/14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4/1121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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