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92

금요기도회 :6/19/2015

대표기도: 대표기도+ <선교부>

찬송가: 486(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 주사)

 

1.    그리스도인은 징계는 받으나 버림은 받지 않습니다. 6:8-9<나의 대적이여 나로 맘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그리스도인들도 잘못 살게 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하나님은 공의롭다. 하나님은 편애하면서 그리스도인을 봐주지 않는다. 징계는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우치기 위하여 하시는 매질이다. 이방인들에게는 깨우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과 정죄하시는 벌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정죄가 아니라 징계일뿐이다.  잘못 살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징계 하지 않아서 평안하다면 그는 버리운 자식이다.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 한가지?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징계가 없다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2:7-8<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 >  2:5-6<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면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2:9-10<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포주를 그것이 맛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아프기는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징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있을 뿐이다. 그 후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돌이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살 길이 열린다. 계속 고집하면서 징계 받고 있는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면 무슨 일을 만나는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그러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나? 시간 버리고, 돈 잃어 버리고, 가정이 깨어지고, 몸에 병 생기고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 전에 빨리 깨닫고 죽음의 길에서 돌이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야만 그렇게 할 수가 있다.

 

 

2.    기도응답에 대하여! 기도응답의 기쁨이 무엇일까? 바라고 원하던 것을 하나님이 주셨기에 당연히 기쁘지요.  16:23-24<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이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 기도 응답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주님께 구했더니 우리 주님이 내게 안겨 줄 때에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 기쁨이 영원까지 지속하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이지요. 내 삶에는 또 다른 필요가 생기지요. 그래서
또 주께 기도하여서 얻지요. 또 그 기도 응답의 기쁨도 잠시 있다가 지나가 버리고요.  오늘 본 구절에서의 기쁨은 존재론적인 기쁨입니다. 존재론적인 기쁨이 충만해야 한다. 기도응답을 통하여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안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사람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에는 장난감을 위해서 구했지만, 영적으로 장성하고 나서는 어린애의 일을 모두 버렸습니다. 좀더 차원 높은 일들에 눈이 띄어져서 그것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주를 더욱 알아가면서 주를 더욱 닮아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주의 말씀대로 던져서 고기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수지 맞았다! 아니지요. 주님 발 앞에 엎드려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하지요. 잡아 놓은 고기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는 배 안에 타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난 뒤에 얻은 기쁨을 나타내 주고 있지요.

/36:37-38<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וְיָדְע֖וּכִּֽי־אֲנִ֥י יְהוָֽה׃ ס >

그러면 그들이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리라! 안다는 것은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경험하여서 깨달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응답이 내 능력과 힘 때문에 되어진 일이 아니라 내 밖에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일어났음을 체험하여서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을 약속합니다. 황폐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말입니다. 황폐한 성읍, 예루살렘 성에 사람들을 무수히 살게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이지요. 이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일이 눈 앞에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도록 간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약속은 받았지만, 약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서 내 손안에 들어 올 떄까지 쉬지 말고 같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한번 두번 기도하고 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확신이 들거든 계속적으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3.    병든 인간, 병든사회: 건전한 사회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인간들이 만들 수가 있습니다. 병든사회는 정신적으로든지 영적으로든지 병든 인간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만들어집니다. 인간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가 모두 크든 작든 병들어 있습니다. Insane Society! 하나님이 보실 때에 지상에 있는 모든 사회들이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보다 심한 병을 앓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그 보다는 약한 병을 앓는 사회가 있을 뿐, 모은 인간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옛 시대도 그렇고,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대도 그렇습니다.  미국 땅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보스톤 사회가 한반도에  있는 우리들을 길러낸 사회보다는 훨씬 건강한 사회이지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사회도 여전히 병든사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땅에 계실 때에 거라사 인의 땅을 방문했습니다. 그 땅은 이방사회이지요. 밤낮 무덤 사이에 살고 있는 귀신 들린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수 많은 귀신들, 다이모니아들이 포제스 되어 있었습니다.  악령 하나가 포제스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군대, 1레기온, 로마의 군대 편재상, 6천이나 됩니다. 이런 많은 귀신들이 한 청년의 몸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청년을 불쌍히 여겨서 고쳐 주셨지요. 그 청년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귀신들을 근처에서 방목하고 있는 모든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명하셨지요. 모든 귀신들이 그 청년에게서 빠져 나와서 근처에서 방목하고 있는 2천마리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든 돼지 떼들이 바다속으로 들어가서 몰사했습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자 그 청년이 온전한 건강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옷을 입고 여느 청년들처럼 되어서 예수 곁에 있었습니다. 돼지떼를 치던 사람들이 돼지떼의 주인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돼지떼의 소유자들인 거라사인들이 예수께로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는 귀신들린 청년이 온전하게 되어 예수 곁에 있는 것을 보고서 놀라워 하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께 엎드려 경배하면서 예수를 높혔나요? 아니지요. 예수께서 자기들의 고장을 떠나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 그런 요청? 더욱 큰 물질적인 손해가 예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머무신다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 되신 예수를 돈 몇푼 때문에 물리치는 어리석음! ? 병든 사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질의 가치가 생명 가치보다 더욱 크다는 생각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자본, 돈이 생명보다 더욱 귀하다는 배금 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회가 거라사인의 사회였습니다. 인간 사회가 돈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청부살인을 하는 범죄까지 일어나고 있지 않던가요?  우리 주님의 말씀-사람의 생명의 풍성함이 소유의 넉넉함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주의 말씀을 인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도 그런 유사한 경험을 했지요. 빌립보 지방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전도하고 있었을 때에 귀신들려서 점치는 여종 하나가 따라 다니면서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바울이 그 여종에게 포제스 되어 있는 악령을 추방해 버렸지요. 그랬더니 여종의 주인이 바울 일행을 관에 고발해 버렸습니다. 고발한 이유는 점치는 그 여자 때문에 돈을 벌었는데, 그만 그 여자가 점치는 능력을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그 여종의 주인에게는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관에 고발하게 되었고, 그래서 바울 일행이 매질을 당하였고, 그리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 날 밤에 큰 지진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 사건 때문에 간수가 구원을 받게 되었지요. 우리는 이 사건을 사도행전 16장을 읽음으로써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은 사람을 금전적인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귀신에게 포제스 되어 있는 한 영혼이 놓여 나면서 건전하게 되었다면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한 영혼의 회복을 본 것이 아니라 금전적인 손해가 난 것에 대하여 분개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중요한가? 아니면 돈이 중요한가? 어느 것을 우위에 두고 신앙생활하는가? 가치 판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 주님의 가치관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지신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내 마음에서 빼내고 무엇을 넣어야 합니까? 예수의 가치관을 우리의 심령에 주입해야 하지요.

/우리들이 자라 나온 토양인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insane society!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에 면죄부를 받는 사회에서 우리들은 자라났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착한 아이로 통했다. 공부만 잘하는 사람들은 사회성이 발달 되어 있지 않다. 또한 열등감도 심하다. 열등감이 심하면 또 무엇이 심한가? 우월감도 심하게 되어 있어서 공부 잘 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분들이 많다. 사람에게는 정서도 잘 발달 되어 있어야 하고, 또 사회성도 발달 되어 있어야 하지요. 이런 부분들이 공부 잘 하는 분들에게는 결여 되어 있다. 공부만 잘하면 인정해 주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라나왔습니다. 그래서 공부! 공부!하면서 공부했고, 또한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자식 교육을 해 나왔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사고 방식이지요. 공부를 좀 못해도 좋습니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사회 속에서 친구들이나 이웃들과 잘 어울려서 살아간다면 자식 교육 잘 시킨 것이지요. 굳이 자식이 일류 대학, 한국 같으면 sky, 미국 같으면 IVY리그에 못 들어가더라도 아이의 인성이 잘 발달 되어 있다면 자식 농사 잘 지은 것 아닙니까? 아이가 공부잘 한다고 아이가 행복하다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공부를 좀 못하더라도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아이들이 살아 갈 수 있도록 부모는 도와  주면 됩니다.  공부만 잘 하는 아이에서 공부도 잘하는 아이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다른 모든 면도 잘 발달 되어 있고, 지성적인 영역인 공부도 잘하면 금상첨화이겠지요.   또 여자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도 있습니다. 여자 아이들이 외모지상주의에 사로 잡혀 있어서 오직 외형적인 치장에만 온 마음을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여자가 이쁘면 면죄부를 받습니다. 여자가 이쁘면 무슨 일도 용서를 받는다라는 말이 돌 정도입니다. 못생긴 여자는 모범적인 일을 해도 주목을 받지 못하는 그런 사회 분위기 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합니까? 성형을 하잖아요. 많은 돈을 드려서 성형 외과 의사에게 얼굴 성형을 하지요. 째고 깍고 긁어 내고 당기고 하면서 미를 만들어 갑니다. 한번 성형 하고 마음에 안들면 또 성형하지요. 성형 중독이 일어나게 되지요. 땅에 묻히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에 연연해 합니다. 건강하면 되었지 뭐 성형하는 일이 그리 죽고 살 일이겠습니까? 천국 들어갈 때에 천국 수문장인 베드로가 날 보면서 나를 몰라 보면서 당신 누구요하면 참 곤란하겠지요. 성형을 너무 많이 해서 딴 사람으로 보인다면 그런 해프닝이 천국 문 앞에서 발생하겠지요. 햐 목사님 그런 걱정 안해도 되요라고 말합니다. 유전자 검사하면 됨박에 알 수 있데요. 천국 갈 사람이 식별이 안되어서 지옥가 있을 리 없고, 지옥갈 사람이 성형 잘해서 천국 들어가 있을 리 없대요. 그리스도인 자매들은 물론 외면적인 미도 갈고 닦아야 겠지만 더욱 가치를 두고 가꾸어야 할 미는 우리의 속 사람이지요. 우리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진짜 나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벧전3:3-4<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외모 지상주의보다는 내 안에 숨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지혜로운 자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병든 사회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치유되어서 변화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회 구조를 바꾸고 제도를 바꾸고 해 봐야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뀔 때에 비로소 사회가 개혁되고 변혁 되어서 건강한 사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회가 건강하게 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개혁이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그리스도인들이 높은 자리에 포진하여서 이 사회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사회가 흘러가는 데로 난 몰라라 하고 그리스도인 손을 놓고 있으면 이 사회는 멸망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꽃밭을 망가뜨리려면 꽃밭에 손을 대지 않으면 곧 꽃밭은 잡초 더미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사회가 멸망의 길로 치달아 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최후의 보루다. 파수꾼임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전의진목사

2015.06.22 19:55:15

06/19/15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5/06191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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