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84     

금요기도회 :4/10/2015

대표기도: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 우물가의 여인처럼

 

1.    비행기가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이래로 급속히 발전하여100년 남짓한 기간에 음속으로 나는 각종 비행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옛날에는 비행체가 알루미늄이 아니라 나무에다가 천을 씌워놓고 하늘을 날았지요. 날개도 하나가 아니라 상하 두개로 되어 있는 비행체였습니다. 이것을 복엽기, 혹은 쌍엽기라고 부르지요. 쌍엽기를 타고 하늘을 나르는 그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조종사가 쌍엽기를 조종하여서 하늘에서 날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비행기 뒷 편에서 사각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들어보니 새앙쥐가 무엇을 갉을 때에 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만약 새앙쥐가 맞다면 새앙쥐가 중요한 부품을 하나를 갉아 버린다면 하는 아찔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비행기를 이륙시키기 전에 어떤 조그마한 물체가 비행기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본듯했습니다. 이마와 손에는 긴장과 두려움으로 땀이 흘렀습니다. 이때 갑자기 이 조종사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행기의 고도를 높혀 주면 설치류인 쥐들은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 조종사는 비행기의 고도를 갑자기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무사히 그 조종사가 비행기를 땅에 착륙시켰습니다.

/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삶을 갈아 먹는 염려와 근심이 늘 일어납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미리 앞당겨서 걱정을 하지요. 걱정도 팔자다. 이것을 기인지우 혹은 줄여서 기우! 우리의 심령을 무너지게 하는 염려와 근심을 어떻게 없앨 수가 있습니까? 오직 한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 기도해야 하는데,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는 기도말입니다. 의심을 품고 기도할 바에야 기도하지 않는 편이 시간 세이브하고 체력세이브하고 더 낫지요. 믿음만 있으면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믿음+기도! 비행기에는 두 날개가 있습니다. 비행기는 날개 하나로 날지 않습니다. 왼쪽 날개, 오른쪽 날개! 비행기는 두 날개로 양력을 일으키고 날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양 날개를 가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야 합니다. 믿음과 기도로 고도를 높여서 하나님께로 날아 올라가면 갈수록 우리의 삶을 갉아 먹는 설치류인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되어질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은 어디있는가?그리고 당신의 기도는 어디 있는가?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

 

/5:15-18<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르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의  기도? 그 땅에 바알과 아세라 섬기는 우상이 가득차 있었을 때에 홀연히 엘리야가 나타나서 아합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 땅에 우상 숭배가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3 6개월 동안 한발, 가뭄과 기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지요. 그것을 엘리야는 이렇게 선포하지요.  이제부터 내 말이 없으면 비와 이슬이 없으리라고 말입니다. 엘리야가 믿음으로 한발을 선포했기에 그 엘리야의 말이 자연을 지배했지요.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믿음으로 가뭄을 선포했을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의인의 간구가 이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갈멜산에서 가뭄의 원인이 되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을 모두 백성들로 하여금 죽인 후에 다시 기도했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땅에 비를 내렸지요. 기손 강을 피로 물들인 후에, 우상 숭배 죄에 대한 형벌이 끝난 후에 비가 내렸지요. 엘리야 사건을 보면서 야고보서의 기록자는 우리에게 이같이 말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엘리야가 특별했기 때문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우리도 엘리야와 같은 믿음을 가지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엘리야! 믿음의 기도! 그런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이 찾고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가득했던 그 땅에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심을 드러냈던 분이 누구라고요? 앨리야! 하나님의 엘리야를 오늘 이곳 보스톤 땅에서도 하나님이 찾고 있습니다. 어떤 엘리야? 하나님의 엘리야! 성령의 불이 사그러들어가 고 있는 이 곳 보스톤 땅에 성령불을 일으킬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하나님의 엘리야가 될 수 있고, 너도 그런 하나님의 엘리야가 되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

 

 

2.    선교(전도)는 어떻게 하는가?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말로 제시하는 것이 전도이지요. 예수께서 죄에 빠져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건져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가 우리의 주되심을 전하는 것이 선교이고 전도입니다. 그런데 다른 형태의 전도가 있습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삶을 가지고 예수가 우리 주님 되심을 전하는 것이 있지요. 어떤 삶? 입을 벌려서 복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지만 변화된 삶을 가지고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국가에서 말입니다. 드러내 놓고 말로 복음을 전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삶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하지요.

 

 /옛날 이곳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마을에 사금을 채취하기 위하여 몇 사람이 조를 이루어서 이곳 저곳을 탐사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우연히 사금이 많은 시냇가를 발견했습니다. 탐사였기 때문에 일단은 마을로 돌아가서 장비를 구입하여서 다시 오기로 합의를 받습니다. 이 사람들이 마을에 돌아가서 사람들에게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장비를 마련해서 이곳으로 와서 우리끼리만 사금을 채취하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마을에 돌아와서 그들은 장비를 구입하고서 마을 어귀에 약정한 날 밤에 모두 모여서 사금을 채취하러 은밀히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 약정한 날에 그들이 어귀에 나가보니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장비를 들고 모였습니다. 탐사 갔던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누가 이 비밀을 누설했느냐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힐난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당신들이 비밀을 누설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들의 얼굴을 보고 금을 발견한 줄 알았습니다. 당신들의 얼굴에 퍼져 있는 기쁨을 보고서 쟤네들이 사금 채취 장소를 발견한 줄 알아서 당신들의 행동을 눈여겨 보고 있다가 이렇게 이곳에 모인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벧전3: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의 착하고 거룩한 삶을 보고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어 올 때에 그 때에 말로 복음을 제시하면 되겠지요.

 

/북한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북한 사회에서 신앙은 금기 사항입니다. 성경책을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되면 노동 교화소라는 곳,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 믿는다고 섣불리 고백할 수가 없지요. 동시에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예배 드린다는 것은 드러내 놓고 할 수 없지요. 그런 폐쇠된 사회 속에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즉각적으로 알아 차립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그 사람의 행동 거지나 혹은 얼굴에 있는 기쁨으로 말입니다. 식량을 구하러 연변에 갔다 왔는데, 거기서 예수를 영접하고 북한으로 돌아 오면 그 사람이 입으로 복음을 말하지는 않지만, 행동이 변합니다. 이웃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이웃을 도와 줄려고 하고 얼굴에는 평안함과 기쁨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그리스도인이 보면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하고 분명히 눈치채게 되지요. /보스톤 땅에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얼굴에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넘쳐야 하지 않겠는가?  

 

3.    2:9-11<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나의 기도제목:온 땅의 백성들이 예수앞에 무릎 꿇게 하옵소서!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야 이방인들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것 아닌가? 그러려면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방인들이 모두 각자가 자기가 섬기는 신들이나 우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 속에 종교의 씨앗을 넣어 주셨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그 우상이 진짜 신인줄 알고 있음이 문제입니다. 실상은 가짜 신인데 말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런 가짜 신들과 우상들을 버리고 참 신이신 예수를 영접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게 힘써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말입니다. 말씀 전파에 따라 나타나는 능력과 권세 앞에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믿던 신이 헛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불신자들은 두려워서 우리 주님 앞에 무릎이 꿇리게 하옵소서! 초자연적인 존재들인 사탄과 악령들도 그 이름 앞에 두려워 떨게 하옵소서! 2: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존귀하신 우리 주님 예수의 이름! 그 이름이 높임을 받으소서! 내 믿음 만큼 세상에 우리 주님의 크심을 드러낼 수 있다. 

 

4.    내 믿음의 크기는? 11: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세상이 주어입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치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한국 번역은 세상은 이런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입니다.  한국 번역을 풀어서 설명을 하면 그 사람들이 너무나 큰 사람들이기에 세상이 그들을 담아 둘 수없다는 말이지요. 한국 번역이 더욱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요.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 세상이란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엇에 비해서 말입니까? 저 영원한 세계에 비추어 볼 때에 말입니다. 소금쟁이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이 거의 대부분! 물질, 명예,세상 권세 등등 없어질 것이 인생의 전부인양 살아가지요. 물표면을 미끄러지듯이 다니는 벌레가 소금쟁이다. 이들에게는 깊은 물은 의미없다. 물 표면만 있으면 족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세상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물질 세계가 인생의 전부인양 거기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믿음 때문에 박해와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11:33-37, 38절 후반절 읽어 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대 구분을 하면 중간기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 사이에 있는 기간을 중간기라고 하는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핍박이 있자 경건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산이나 광야의 굴로 도망을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악이 무겁게 내리 누르므로 의와 정의를 찾아 그들의 가족과 함께 광야에 거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자면 세상에 무한한 가치를 두고 산다면 할 수가 없지요. 로마 황제가 기독교에 박해를 200년 이상 가했습니다. 이것을 로마의 10대 박해라고 부르지요. 이 때에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지하 동굴인 카타콤으로 피신했습니다. 거기에 4대가 살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고후 4: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세상 안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있는 것과는 영적으로 분리되어서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세상에 연연해 하지 마십시요.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내가 너무 큰 사람이기에 세상이 나를 넣어 둘 수 없는 인물이 되자. 기도 제목?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그 반대는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하는 성도!

 

5.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일까? 내 생각에 이것이 주를 위한 생각이라고 하여서 그 생각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이다. 삼상15:22-23<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이 누구에게 한 말인가?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했던 말입니다. 왜 이런 심판의 말을 했을까요? 사울 왕이 무슨 잘못을 범했기에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인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사울왕이 받았습니다. 진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렘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아마렉의 모든 것을 없애라는 말입니다. 노인부터 어린 애까지 모두 죽입니다. 아말렉이 가지고 있는 소와 양떼 모두를 죽이고불태워 없애는 일입니다.  사울왕은 진멸 명령을 받아서 아말렉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소와 양떼 가운데서 기름지고 보기 좋은 것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을 살렸습니다. 또한 아말렉 임금인 아각도 죽이지 않고 생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요. 사무엘이 사울왕의 승전 소식을 듣고 사울 왕을 보러 내려 왔습니다. 보니 소떼와 양떼를 죽여서 불태우지 않았고, 마당에 끌어다 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놈들을 골라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사울왕이 변명을 늘어 놓았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무엘이 사울 임금에게 했던 말이 조금 전에 읽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가장 값나가는 제물인 소와 양을 가지고 제사 드리는 것보다 더 낫게 보신다고 말입니다. 사울의 생각에는 소와 양을 그냥 죽여서 불태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대신에 좋은 놈을 골라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사울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직하게 따르는 것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가요? 우리 생각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내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도를 내 마음에 가득 채워서 그 생각과 그 뜻대로 행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전의진목사

2015.04.21 15:32:37

04/10/15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5/04101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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