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21

금요기도회 :1/15/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그 이름 비길 데가 어디 있나>

 

1. 고정관념/어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지식이나 통념이나 믿음을 고정 관념이라고 부르지요. 오랜 세월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우리 나라 구한말에 미국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 왔습니다조선 사람이 미국 선교사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식사가 맛있게 준비 되었습니다. 식사 테이블에 앉은 조선 사람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음식 맛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릇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국 그릇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국을 요강에 담아 왔기 때문입니다. 요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옛날 우리 나라의 이동식 간이 화장실로 보면 됩니다. 옛날 우리 나라는 화장실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마당 뒤에 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을 무엇이라고 불렀나요? 뒷간이라고 부르지요.치간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절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부르지요, 근심을 없애는 곳이라는 의미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밤에 화장실 가는 일이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밤에 소변 보러 나가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요강을 윗묵에 두고 잤지요. 선교사집에 초대 받아간 조선 사람은 요강을 보자 소변을 보는 용기임을 한눈에 알아 보았기에 거기에 국을 담아 놓았기에 국을 먹을 수가 없었지요. 선교사야 그것이 전통적으로 요강으로 쓰이는 지를 몰랐지요그러니 그 요강에 국을 담아서 서빙을 했지요

/종교적인 고정관념 1-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잘 지켰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구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을 더 잘 지켜 보기 위하여 시행세칙, 세부적인 규칙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시행세칙을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부릅니다장로들의 전통 가운데 하나가 음식 먹기 전에 손 씻는 규정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왜요? 위생 때문에 말입니까? 위생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손을 씻지 않은 채로 음식을 먹으면 의식적으로 더러워진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으면 영혼이 더러워진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고정관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12제자들은 그런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스승인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비난하면서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 주님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지요마태복음 15장에 그 논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진술을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은 소화 되어서 모두 뒤로 버려 지게 되지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서 사람들의 영혼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지요. 손을 씻지 않고 먹은 음식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짓는 죄가 우리의 영혼을 더럽힌다는 말입니다그러니 장로들의 전통인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안 씻어도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가르쳤지요. 오늘 우리 세대에는 우리는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문화인입니다. 무엇 때문에 손을 씻나요? 건강 때문에, 병 걸리지 않기 위하여 손을 씻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고정관념에 붙잡혀 있어서 손을 씻는 것 아니지요. 이런 고정관념 ,생각이 얼마나 우리를 억압하고 있던가요물이 없는 사막 지대에서 사흘 간 굶었는데, 음식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로들의 전통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분이라면 음식을 앞에 놓고도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은 빨리 빨리 깨달아서 버려야 영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풍요롭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나를 묶어 두고 있는 고정관념이 무엇이 내게 있는지를 빨리 발견하고 버리시길 바랍니다그래서 우리 주님이 마11: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 . 솔로몬 왕에게 나타나서 부흥을 약속하신 하나님/대하7:11-18, 특히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해 준 약속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formula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formula? ’너희가 만약  ~하면, 내가  무엇 무엇을 해 주리라, 또는 너희가 만약 ~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어떠 어떠한 재앙을 내리리라.’   너희가 만일 순종하면 복을 내리고 만약 불순종하면 저주를 내리리라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반드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조건부 축복!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하여 조건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만 만들어 놓으면  자동적으로 축복이 내게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만 만들어 주면 결과가 똑같이 나오는 것은 자연법칙이지요. 물리 법칙, 화학법칙처럼 말입니다. 물이 0도 이하로 내려 가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0도 이상이 되면 물이 되고, 100도로 끓으면 수증기가 됩니다. 이것은 누가 실험을 하더라도 온도라는 그 조건을 만들어 놓으면 물이 얼음이 되고 물이 얼음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약속은 자연법칙과는 다릅니다. 이것을 영적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우리들이 만들어야 하는 조건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필요 조건일 뿐입니다. 필요조건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 우리 인간이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필요조건이 이루어진 다음에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고도 주시지 않을 때에는 깊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자격이 되지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을 때에는 내가 받지 않을 때가 더욱 영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해 놓아야 할 조건들은 반드시 해 놓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부흥을 가져다 주는가? 부흥을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첫 번째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개역 성경에는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이 첫번째로 기록된 조건이지만, 히브루 성경에는  스스로 낮춘다가 처음의 조건입니다스스로 낮춘다는 것은 겸손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입니다.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환난과 시련을 만나게 되어서 자신이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고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 그렇다면 이전에 가졌던 교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벌었다고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으시대는 것이 교만인가? 예 그것도 일종의 교만이지요. 세상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으시대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도 교만인가요? 예 그것도 일종의 교만이지요. 이곳 보스톤 땅에서는 공부 많이 해서 학위 받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되었기에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우쭐된다면 그것도 교만이지요. 돈이 있고, 빽이 있고, 학위 있고 하는 것은 모두 세상적인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들을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으시대고 뻐기는 사람들이런 것은 모두 외면적인 교만이지요. 교만한 자는 낙타의 눈을 가졌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이런 차원의 교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데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교만하다고 말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엄연히 우리들 밖에 살아 계시는데도 그런 하나님을 살아 있는 실존으로 인정하지 않고 죽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돈도 잘벌고 세상 일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영리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어리석은,foolish, or idot 사람이지요. 14: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상실), 말과 행동에 하나님이 없는 것이 교만입니다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사라지게 되면 인간은 무슨 일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인간 이하의 짓을 하고도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의식 조차도 없어진다사람들을 잔인하게 수 없이 많이 죽여도 전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못느낍니다. 남의 것을 훔쳐서 감옥에 들어가도 전혀 죄의식을 못 느낍니다1: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합당하지 못한 일은? 29-3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죄의 목록입니다. 20가지 이상의 당시 로마 사회 안에서 인간이 짓는 죄가 나열 되어 있지요하나님을 모든 인간의 마음에서 몰아낸다면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해궂이 하고 억압하고 죽이기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황폐한 사회가 되어 버리지요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 보았더니 무슨 일을 만납니까? 인생이 사막처럼 황폐하고 되고, 인생이 캄캄한 어둠을 만나게 되지요인생이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면서 방황하게 되지요. 이것이 하나님을 잃어 버린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에서 의도적으로 추방해 버린 결과, 즉 영적인 교만 때문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이것을 깨달아 알았기에  하나님 없이 높아진 마음을 회개하고서 스스로 낮추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멀리 좇아 몰아낸 하나님을 다시 모셔 들였습니다. 내가 스스로 높아진 내마음을 스스로 낮추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와 달라고 요청하면 우리 하나님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 오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내 마음과 삶 속에 돌아 오시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첫번째 스텝이 스스로 낮추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높아진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찾아 오지 않습니다내 인생이 부흥을 경험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가 겸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부흥을 경험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자 그러면 부흥을 경험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 시련과 환난이 일어나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지요. 고난과 시련과 재앙이 닥쳐 왔는데도 입을 벌려서 기도하지 못하는 벙어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왜 벙어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귀머거리로 태어나면 벙어리가 되지요.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농아라고 부르지요. 이런 분들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으로 하지요. 수화! 눈은 멀쩡하니까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귀에 문제가 있어서 듣지 못하면 말을 못하게 되지요. 이것은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귀가 없어서 듣지 못하면 입을 벌려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하고 싶으십니까? 오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 내야 입을 벌려서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바라면서 기도하십시요:주여 내 귀를 열어서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 주소서시련과 재앙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무엇에 대한 징계입니까? 죄를 지었지만 그것이 죄인 줄 몰랐기에 하나님께서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매를 때리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징계히는가? 재난과 시련이 하나님이 나를 때리는 매입니다. 이런 재난과 환란과 시련과 고난 당하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도해야 합니다. 5:13<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재난과 시련을 당하면 아프지요.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재난과 시련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구약의 백성이 어떤 재난과 시련을 만났나요?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언약적 재앙이라고 부르지요. 하나님의 언약을 안 지켰기 때문에 발생한 재난입니다. 가뭄이 발생했고, 또 메뚜기 재앙이 발생하면 먹을 것이 없게 되어서 기근이 발생합니다. 기근과 쌍을 이루어서 따라 오는 재앙은 전염병입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파하고 있고 집에 있는 아이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울고, 옆에 있는 이웃들이 전염병으로 하나씩 둘씩 죽어가는 이런 상황을 만났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전염병 걸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기도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기도이지요. 전염병 안 걸리게 해달라는 기도, 비를 내려 달라는 기도 메뚜기를 모두 몰아 내 달라는 간구-모두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간구입니다많은 사람들이 고통 때문에 울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배고픔이나 병 때문에 일어난 고통 때문에 울고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왜 이런 고통이 우리에게 찾아 왔는지를 알아 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이 찾아 왔나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나요? 우상숭배 죄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이방신인 바알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백성들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어떤 언약? 시내산 언약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충실히 지키라고 명하셨지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누구를 받아 들여서 섬겼습니까? 가나안 땅에 가득차 있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바알이 하늘의 구름을 주관하여서 비를 내리는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노하여서 하늘을 닫아서 비를 땅에 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알이 비를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비를 주관하시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잊어 버리고 바알을 따라갔습니다. 가뭄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참 하나님을 멀리하고 가짜 신을 섬겼다는 것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되겠지요.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울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물론 가뭄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가뭄을 제하여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귀하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서 가뭄의 원인을 초래한 우상 숭배의 죄를 자백하고 통회하고 죄를 사하여 달라고 부르짖는 것은 더욱 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 때문에 우는 자는 많으나 고통을 초래한 원인인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우는 자는 적다는 사실입니다

 

/부흥을 위한 세 번째 조건이 무엇입니까? 악한 길에서 떠나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구약의 백성이 죄를 지었다는 말이지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악했고, 그들의 마음이 악하기에 날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구약의 백성이 무슨 죄들을 그리도 많이 지었나요?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조금 전에 말한대로 언약적인 재앙인 가뭄과 메뚜기 재앙과 전염병이 그들의 삶의 현장에 발생했지요. 어떤 죄가 가장 큰 죄입니까? 물건을 도적질 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 아니면 간음하거나 rape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 아니면 한 걸음 더나아가서 동성 연애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 사람을 죽이되 아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큰 죄입니까이 모든 죄악들은 모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 속에 있어온 죄악입니다. 이런 윤리적인 죄보다 더욱 큰 죄악이 있는 데 그 죄는 영적인 죄입니다. 영적인 죄는 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찾아 섬기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을 버리고 다른 자를 예를 들면 부처님을 섬기고, 마호메트를 숭배하고, 공자를 숭배하는 것이 가장 큰 영적인 죄입니다. 왜 이것이 가장 큰 죄일까? 예를 들어보면 나를 낳아주고 길러 준 엄마나 아빠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죄를 지어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일까? 물론 그렇다면 내 엄마나 아빠가 가슴 아파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욱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 부모를 향하여 당신은 나를 나아 주시고 길러준 부모가 아니요라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말이 되겠지요. 우리가 우리 주님 예수를 버리고 다른 자를 섬긴다면 그것보다 더욱 큰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를 부인하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부흥을 우리의 삶에 가져 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큰 죄인 예수를 믿지 않았고, 의심했고, 부인했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생활 속에서 짓는 여러가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를 인정하고 자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시련과 환란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자백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죄를 자백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요? 우리가 당하는 재난과 시련이 모두 사라집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재앙을 우리가 만났습니다그 원인인 죄가 제거 되면 고통도 사라지게 되지요. 우리가 지은 죄 가운데서 우리가 인식하고 입으로 자백한 죄만 사하여 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내가 지은 죄가 나를 지배합니다. 그것을 죄의 권세라고 부르지요. 죄가 우리를 주관하면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하여 자유를 잃어 버라고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되지요. 그러니 부단히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자백하는 일이 필요합니다우리의 삶에 부흥을 원한다면 부단히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자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흥은 회개 운동인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말씀운동이라고 부르지요. 이런 말씀 운동은 성령께서 행하시기 때문에 말씀운동은 성령운동입니다. 회개운동, 말씀운동,성령운동, 부흥 운동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부흥이 임하지 않습니다. 힘써 우리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적인  부흥이 임하는 곳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부흥의 네 번 째 조건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도 얼굴이 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길건너 편에 있는 몰몬교도들은 하나님도 인간들처럼 육체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신약 성경 요4장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달리 형체나 모양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이 없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구약성경 곳곳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이지지요. 18장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두 천사를 대동하고서 아브라함을 만나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내년에 이삭이 사라에게서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지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만났지요. 당시 아브라함과 같은  히브리인의 모습으로 다가 가셨지요. 사람과 똑 같은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만나셨지요. 하나님이 영이라서 형체나 형질이 없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을 잠시나마 취하여서 아브라함을 만나셨지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아브라함과 대면하여서 만날 수 없지요. 하나님의 천사들도 사람을 만날 때에 육체를 일시적으로 취하여서 만나곤 했지요. 신약시대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 사건이 일어났지요. 영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이 되어서 인간 세계에 오셨지요. 성육신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일시적으로 육체를 덧 입으신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육신을 취하여서 우리에게 오셨지요. 구약 시대에 잠시나마 여호와 하나님이나 그의 천사들이 인간들과 communication하기 위하여 육신을 일시적으로 취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단순히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실제적인 얼굴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인동형론이라고 말하지요.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지요. 그것이 민6:24-26절에 기록되어 있지요<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얼굴! 실제적으로 육신적으로 하나님이 얼굴을 가진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 하나님도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표현하지요.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인 동형론적 표현이라고 부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감추실 때가 있는가 하면 얼굴을 드러내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신다는 것은 우리 인생들이 싫다는 이야기이지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다가 우리 인생들이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이 얼굴을 돌려 버리지요. 31:18<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숨기십니까? 다른 신들을 섬기고 따르게 되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역겨워하시지요. 그러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버립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27: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일이 교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구체적인 행동은 예배 처소인 교회를 찾아서 예배 드리는일이지요. 구약 시대의 백성들은 어디를 찾아 갑니까? 성소를 찾아 갑니다. 성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 시대에는 어디를 찾아 가야 합니까? 교회를 찾아 가야 합니다. 5:15<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빛난 얼굴을 가리우시고 하늘로 돌아가셔서 하시는 일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까지 말입니다. 죄를 회개하면 다시 우리에게 오셔서 이전의 교제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교회,즉 예배 처소에 나와서 예배하는 일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일입니다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흥의 조건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4가지의 조건을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첫번째가 교만했던 마음을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무슨 일을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들의 땅을 고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늘을 닫았기에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가뭄이 심했고, 메뚜기 재앙이 일어났고, 또한 전염병이 땅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땅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땅에 비를 내리심으로써 황폐한 땅을 비옥한 땅으로 바꾸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우리의 영혼이 아닙니까?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기 위한 부흥은 위에서부터 내리는 성령의 단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통회 자복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우리들이 짓는 모든 죄와 악에서 떠나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을 이 예배의 자리에 찾으면서 힘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켐연장

2016.01.17 21:25:36

2016년 1월 15일, 금요기도회 음성파일은 기술적 문제로 업로드하지 못하였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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