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18

금요기도회 :12/25/2015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412(469)-내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1. 고정관념/다른 예? 어떤 낚시 꾼이 갯바위의 목 좋은 곳에 앉아서 바닷 낚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동이 상식을 벗어난 이상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연신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데 줄자를 가지고 물고기를 재 보더니 큰 물고기는 바다에 놓아 주고 작은 물고기는 망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작은 것은 놓아 주고 큰 물고기만 담는데 말입니다그래서 옆에 있던 사람이 왜 그러냐고 물었지요. 그 사람 왈, 자기 집에 후라이팬이 있는데 지름이 25cm이기 때문에 25cm이상 되는 물고기는 놓아 주었고, 25cm이하 되는 것은 후라이 팬에 들어 갈 수 있어서 담았다는 것입니다. 큰 생선은 칼로 쪼개면 얼마든지 25cm되는 후라이 팬에 요리해 먹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25cm 이상 되는 물고기는 25cm후라이 팬으로는 요리해 먹을 수 없다는 것이 고정관념이지요. 이것을 깨뜨리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유익과 발전과 성장이 있을까요? 물어보나 마나이지요.


/우리 교회의 고정 관념이 바뀐 사례-하늘 소리 찬양 사역팀은 예전에는 거의 대부분이 비전 청년부원들이었습니다. 비전청년부원들이 하늘 소리를 찬양 사역팀을 섬길 때 보면 방학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없어서 방학 때에는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최근에는 하늘 소리 찬양 사역팀에 장년부원들이 유입되면서 하늘 소리 찬양팀이 한층 업그레이드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암묵적으로 젊은 청년들이 하늘 소리 찬양팀을 하는 것이지 결혼하여서 가정이 있는 장년부는 하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런 고정관념의 틀이 벗어지니 하늘소리찬양팀을 통하여 더욱 큰 은혜가 부어지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요리하거나 설거지를 하면 안된다. 특히 경상도 남자들은 그렇게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런 교육을 받아서 뼈속 경남출신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도 부엌에 어슬렁 거리면 특히 어머니에게 야단 맞기 일수였지요. 이런 교육을 받아 오니 으레껏 어머니가 해 주시는 것을 날름 날름 받아 먹기만 하지요. 그런데 말이예요 어머니가 가끔씩 짜증스러울 때에는 가만히 앉아서 받아 먹는다고 야단을 먹기도 하지요. 그렇게 크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요. 밥도 먹고 야단도 먹고 하면서 겄지요. 일나갔다가 허둥 지둥 돌아 오셔서 부엌으로 직행해서 밥을 지어 주는 어머니에게 안스러움을 못 가졌지요. 늘 엄마는 그래도 되는 것으로 알았지요. 경상도에서는 남자들이 음식을 다 먹고 난 다음에 부인들은 남는 것을 먹고, 연기 나는 부엌에서 쭈구리고 앉아서 밥짓고 빨래하고 밭에 나가서 일하면서 아이들을 등에 업어 키우면서 일생을 마치지요. 요즈음 시대에도 이런 경남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50대가 되면 그야말로 남자들은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고정 관념을 깨뜨려야 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부엌의 설거지나 청소도 시원하게 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의 분위기가 훈훈해 집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요? 경남의식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되지요. 남자도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기를 갈아주고, 육아 휴직을 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가정의 일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어 졌지요. 어제 24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는 총각김치를 했습니다. 24일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우리 집을 찾는 분들이 전통적으로 없어 왔기 때문에 김치를 했지요. 룻소에 가서 마늘을 한 뭉치  23일날 사와서 미리 까고 절구로 찌어 놓았습니다. 23일 아침에 한아름 가서 총각 무를 많이 사와서 절여서 김치를 만들었습니다. 무우를 다듬고 쪼개고 소금치고 절이는 것은 비전문가인 내가 해도 되는 일이지만, 전문 분야인 양념하는 일은 사모가 하는 일이지요부부가 협동해서 총각김치를 작년에도 24일날 만들었는데 올해도 그날 만들었습니다. 내년도 크리스마스 이브날 만들지 않을 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김치 만드는 일은 아녀자의 일이기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저 김치를 맛있게 먹어 주면 남자의 할일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남자의 할일의 전부가 아니더구만요. 김치 만드는 일이 의외로 힘이 많이 듭니다. 총각무를 다듬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좋더구만요. 다음에는 나도 양념을 어떻게 하는 가를 눈여겨 보았다가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도 배추 겉저리, 파김치, 깍두기, 총각김치, 등등의 김치 등등을 만들 수 있어야 되겠구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예수는 우리의 소망! 너의 소망, 나의 소망, 우리 소망, 더 나아가서 인류의 소망15:12-13<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전 8세기 예루살렘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이지요.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이십니다. 온 땅에 있는 수 많은 족속들의 임금들의 머리입니다. 그런 분이 누구의 혈통에서 태어 났습니까? 이새의 뿌리!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베들레헴 땅에서 다윗 왕이 나왔지요. 열방을 다스리는 분이 이새의 후손,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에 태어 났습니다. 그는 열방의 왕의 자격으로 태어 났습니다. 열방이 예수에게 무엇을 두어야 한다고요?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주전 587년에 망하지요.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나라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지요. 예루살렘은 폐허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상황을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탄식하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멸망한 다음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참담한 심정을 노래한 노래가 예레미야 애가이지요. 백성들이 그 날에 당하는 시련을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이라는 말로 표현했지요. 모든 것이 없어지고 사라진 것 처럼 보였습니다. 전쟁으로 다 잃어 버렸습니다. 폐허 더미 위에서 절망의 탄식을 품고 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인데, 그 소망은 왜 생기나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신실함! 이것 때문에 소망이 빛을 발합니다. 신실함이란 영어로는 faithful이지요. 하나님은 신실하다.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이 멸망을 당했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진멸 당하였다는 말이지요. 도무지 회복될 수 있으리라고하는 소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소망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다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 되지 아니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들의 조상에게 했던 약속이 살아 있고, 그리고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결코 폐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신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비록 구약의 백성이 잿더미에 앉아 있지만 그 약속을 신실하게 하나님이 지키실 것 때문에 소망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실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시다. 할렐루야-아멘! 딤후2: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쁨이라는 말은 이쁘다는 말이 아니고 신실하다는 말이지요.


/당신이 지금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 같습니까?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를 돌아 보아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까? 답답한 일을 당했습니까?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살 수 있겠다하는 소망마져도 끊어져 있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실하십니다. 아침이 되면 태양이 동쪽에서 떠 오르듯이 우리 하나님은 항구여일하게 그의 백성인 우리들을 향하여 신실하십니다.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렘애3:23-24<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주의 성실하심? 신실하심, 영어로는 faithful! 그러기에 우리 인생들은 우리 하나님을 기다려야 겠지요! 렘애 3:25-26<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30:18<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 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우리 인간들은 구원 문제 있어서 철저하게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절망감 속에서도 우리가 구원 되리라는 소망이 생겨 났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를 보낸다고 말했지요. 구약의 백성들에게 수없이 중첩되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낸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2천년 전에 그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으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지요. 이런 사상이 히1:1-2절에 기록되어 있지요<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2:8-14/지난 주일 설교 본문/목자들이 제일 먼저 예수 탄생 소식을 접하지요

/8-그 지역에? 베들레헴 지역이지요. 우리가 알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어디 사람입니까?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만삭이 되어서 베들레헴에 있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로? 로마의 황제가 호적을 정비할 필요가 있어서 호적을 고향에서 하게끔 명령을 내렸지요. 그래서 요셉이 유다지파에 속해 있기에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내려 갔었지요. 마침 그 때가 마리아가 만삭이어서 애기를 낳을 즈음이었습니다. 만약 만삭이 아니었다면 마리아는 출산을 어디서 했을까요? 그야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곳이겠지요.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 예언했나요? 5:2<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지요. 미가라는 예언자는 주전 8세기 유다의 예언자입니다우리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를 해산할 시점을 맞추어서 베들레헴 땅에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9, 10절에는 주의 사자=주의 천사, 10절은 그 천사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 의지, 생각을 전하는 천사를 가브리엘 천사라고 부르지요. 가브리엘 천사가 들판에서 양들을 돌보고 있는목자들에게 전한 소식이 무엇입니까? 10<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모든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미치게 되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 났는데, 그 아기가 구주,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소식입니다. 그 동안 눈 빠지게 기다려 오던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소리이지요. 아기 예수의 신분이 구주이면서 동시에 주님입니다. 구주와 주는 다른 개념입니다. 구주는 건지시는 분,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구주라는 말이지요. 마태복음 1장에 의할 것 같으면 1: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예수아라고 부르지요. 예수아라는 성명은 구원하다는 동사에서 유래된 명사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 고백을 드러내 놓고 공공연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은밀하게 예수 믿는 신앙을 나타냈지요. 물고기 모양의 문양을 가지고 자신이 예수 따르는 사람임을 나타냈습니다. 물고기는 그릭으로는 익두스라고 표시하지요.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네 단어의 첫글자를 따서 조합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조합으로 만들어진 단어가 물고기라는 단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물고기 모양의 문양을 사용하게 되었지요. 우리 주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따라 오라 그러면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과도 일맥 상통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은 그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야라는 히브리어를 그릭으로 번역한 말이지요. 예수는 메시야다라는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기 예수는 그리스도이고, 예수는 구주이시고,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삼중적인 칭호를 가졌습니다.


/14절에는 천군천사의 우렁찬 합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천사들의 이 합창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호의를 소용한 사람들, 영접한 사람들이지요. 즉 성도들이지요예수의 탄생 소식은 저 높은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낮고 낮은 땅에서는 성도들 가운데 평화라는 말입니다평화? 어떤 평화?  <예수의 평화>! Pax Christi!  이 당시에는 로마가 지중해 연안을 모두 정복했기 때문에 반란도 전쟁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을 로마의 평화라고 부르지요. 라틴어로는 Pax Romana! 팍스는 로마 신화가운데 등장하는 여신 이름인데 평화를 나타냅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 제국에는 법대로 통치 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안정이 있었고 경제는 부흥하고 있었고, 내란과 폭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것을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Pax Christi는 이런 로마의 평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평화입니다어떤 평화일까요?

 

이 평화는 외면적이고 정치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이 평화는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어떤 평화? 인간이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죄를 인간이 지었기에 하나님과 인생들 간에 적대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드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원수 사이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태어 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맺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예외없이 하나님과 원수 관계를 맺은 채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냈다는 말입니다. 그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면서 말입니까? 그는 우리 믿는 자들의 화평이라고 말입니다. 2:14절에는 예수는 우리의 화평!   /


/이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무언가 해야 하는 사역이 있는데 그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아직 계시가 안되었지만 성장하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보여 주시겠지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었습니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적대감이 사라지고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1: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래서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 복음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10:36절에는 화평의 복음이라고 부르지요. 로마의 국력이 최절정에 있었던 그 시절에 로마의 평화가 이루져 있던 그 시절에 우리 주님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그 평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즉 우리들이 사는 이 지구촌 곳곳에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위에서 내려 오는 평화와 옆으로 이루어지는 평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의 평화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적대감을 없애고 하나 되게 하셨고, 분리 되었던 집단들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 야만인과 그릭인들의 차이와 대립과 차별을 없애셨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맺어지기만 하면 이런 싸움과 갈등과 알력은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 평화는 공동체 내의 이웃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사회 속에서도 널리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Pax Americana! 미국이 20세기 이후에 헤게모니를 잡아서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의 평화가 외쳐 지는 곳에서 우리는 예수의 평화를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분을 무엇이라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알려 주셨나요? 우리는 화해의 대사라고 말입니다. 고후5:18-19<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우리의 신분은 화해의 대사이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인데, 하늘 왕국에서 파송된 대사들입니다. 무엇을 하려는 대사인가? 화해를 이루기 위한 대사입니다. 내가 가는 곳곳마다, 분열과 대립이 있는 화해가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화해의 대사입니다. 내가 들어가는 곳마다 평온하던 곳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되지요. 예수 믿는 분 가운데 이런 분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대사라는 직책을 주시면서 세상에 보냈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가정과 내가 속한 사회에 화해의 대사 노릇을 잘 해야 겠습니다.

 


켐연장

2015.12.28 09:03:18

2015년 12월 25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5/12251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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