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17

금요기도회 :12/18/2015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191(내가 매일 기쁘게)

 

1.고정관념을 버리자/ 예화:코끼리와 나뭇가지/인도에서는 코끼리를 훈련 시켜서 여러가지 힘드는 일을 시키지요. 코끼리가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자면 큰 나무에 쇠밧줄로 다리를 묶어 놓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작은 나무 가지에 코끼리를 묶어 놓아도 코끼리가 나무를 부러뜨리고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무척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코끼리를 어렸을 때부터 커다란 나무에 쇠밧줄로 묶어 놓습니다. 아무리 어린 코끼리가 발버둥쳐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상태로 자라나기 때문에 후천적 무력감이 어린 코끼리의 뇌리에 쌓이게 됩니다. 달아나려고 무던 애를 써 보아도 매번 실패하게 되자 결국은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실패와 좌절이 쌓이게 되면 코끼리의 몸무게 수톤이나 나가는 성체 코끼리가 되어서도  코끼리는 도망칠 생각을 아예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 몸집보다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은 나무에 묶여 있는 것을 코끼리가 보고도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다를까요? 사람도 똑 같습니다. 우리도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고정관념에 묶여서 살아갑니다. 판에 박힌 삶을 살아가지요. 우리를 묶고 있는 그 고정관념을 깨뜨리면 훨씬 자유롭게 그리고 풍요롭게 살아 갈 수 있는데도 그것을 못 깨뜨립니다. 내가 현재 묶여 있는 그 가느다란 나무를 부러뜨리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요. 30 40년의 긴긴 세월이 필요하지요. 그 나마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깨뜨리고 나오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지요

 

2. 부흥에 대하여  8:1-12/어떤 부흥? Water gate 부흥 운동. 이 본문을 통하여 water gate부흥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를 살펴보고 이 영적 각성 즉 부흥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찾아 보고 우리 켐연장 교회 공동체에도 이런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미국에도 닉슨 대통령 때 water gate사건이 있었지요. 부패 스캔들 말입니다. Watergate 사건을 생각하면 미국의 전 대통령 닉슨이 생각이 납니다. 워터 게이트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었습니다. 이 스캔들 때문에 닉슨 대통령이 재 집권한지 2년만에 의회의 탄핵을 받아서 권좌에서 물러 났었지요. 왜 이 스캔들을 워터 게이트 사건이라고 명명하는가 하면 닉슨 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워싱턴에 있는 워터 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선발된 요원을 침입시켜서 도청장치를 하려고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그 건물 이름을 따서 워터게이트 사건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현직 대통령이 자신은 그 사건과 무관하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건을 처리하는 동안 그 사건과 깊숙히 관련이 되어 있었고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했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지요. 이 사건은 도청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현직 대통령이 국민을 속인 거짓말, 도덕성이 문제가 되어서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의회의 탄핵을 받아서 사임을 하게 된 사건이지요. 이 사건 때문에 사전적으로는 ''()이라는 뜻을 갖는 '게이트'(gate)가 권력형 비리 의혹, 부패스캔들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그 이후로 게이트는 권력 주변의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로비사건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박동선 씨가 관련된 코리아 게이트, 일본과 관련된 리쿠르트 게이트, 이란의 콘트라 게이트도 있습니다. 그리고 클린턴 전 대통령과 리윈스키와 관련된 성추문 사건에 대하여 사람들이 지프게이트라고 조롱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뭏든 게이트는 등용문이 아니라 어둡고 나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게이트는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사용이 됩니다. 주전 5세기 예루살렘에는 성문이 열개나 있었습니다. 그 문들의 이름이 문의 특성을 나타내 주듯이 따로따로 붙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문, 양문.어문,골짜기 문, 분문등등이 있습니다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문, 워터게이트는 길쭉한 예루살렘의 동쪽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문이니깐 물과 관련이 되어 있었겠지요. 이 수문 앞 광장에 주전 5세기 예루살렘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7 1일이니깐 유대인의 월력으로는 새해 첫날입니다. 로쉬 하사나! 대략 태양력으로는 9-10월 사이 정도되는 때입니다.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52일만에 완성한 후에 수문에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학사겸 제사장인 영적인 리더인 에스라가 인도하는 부흥집회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부흥 운동이 워터게이트에서 일어나서 많은 영혼들이 다시 살고 회복되고 세워지는 일이 일어 났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났던 워터 게이트 사건은 혼돈과 무질서를 일으켰지만 성지에서 일어났던 워터게이트 사건은 그 반대였습니다. 생명과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놀라운 Revival Meeting이었습니다. 옛 고도인 예루살렘의 워터게이트에서 일어난 부흥을 보면서 참된 부흥이 무엇이며 그 부흥이 우리 교회에도 일어나고 그리고 보스톤에도 일어나고 한국 교회에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수 많은 영적인 부흥이 신앙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 부흥에는 인간 편에서 볼 때에 일어날만한 조건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가하면 갈급한 심령!-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조건입니다. 이 조건이 없이는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갈급한 심령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갈급한 심령이라는 조건을 맞추었더라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겠다고 결정하시면 우리에게는 부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지만 인간편에서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부흥입니다.  워터케이트에서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 필수 조건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 오기를 청하매> 율법책, 하나님의 말씀을 왜 가져 오라고 했을까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영적인 욕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그들의 영혼이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욕구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오는 욕구입니다. 성벽 쌓는 고되고 험난한 일을 모두 마친 후 였기에 먹고 마시고 즐기는 축제를 열어도 됩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동안의 수고에 대하여 서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위로하면서 즐거워해도 됩니다. 그렇게 먹고 마시는 축제의 동안은 즐겁겠지만 그 축제가 끝나면 심령의 허전함은 더해집니다. 원하던 일, 바라던 일을 성취한 다음에 나타나는 허점함! 이것은 축제를 열므로써 채워지지 않습니다. 성벽 재건하는 동안 비어 있는 심령을 채우는 방법은 그들의 심령에 무엇이 채워져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축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다시 살리기 위한 부흥회로 모였습니다. 현대 교회들이 외부의 부흥사들을 모셔다가 심령 부흥회를 열듯이 말입니다.

 

/에스라가 나무로 만든 강단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내려 갔습니다. 즉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새벽부터 언제까지 정오까지입니다. 6시간 동안을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은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는 태도는 또 어땠습니까? 에스라가 5절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율법책을 펴자 모든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6시간 내내 일어서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왜 일어섰을까요? 아침 일찍 나왔으니 잠이 모자라서 졸음이 오니깐 졸음을 좇으려고 일어섰나요? 아니지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지요. 일어서서 받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중세의 개혁 교단 안에서도 이와 같이 설교 시간 내내 예배하는 백성들이 서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설교가 20 25분으로 짧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길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몇 시간이나 설교가 계속되지요,. 설교 내내 서서 설교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아마도 설교 시간 내내 서 있으라 하면 불평이 여간이 아니겠지요.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들은 6시간 동안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아이쿠 지겨워, 아이쿠 보링해 하면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고는 등 잠에 빠져 있습니까? 아니지요. 온 마음을 집중해서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영적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하여 말입니다. 갈급한 심령이 되어서 말씀을 받아 먹는 일이 부흥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으로 인한 부흥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이 선포되는 그 현장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겨 넣어 두는 일이 부흥입니다. 부흥 운동, 영적 각성운동은 말씀 운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부흥은 우리의 심령이 다시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고 다시 살게 만드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시편 85 6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기뻐하게 만들어 달라는 말씀입니다.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생명이 있어야 하지요. 사자, 즉 죽은 자에게는 기쁨이라는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다시 살리신다면 우리가 다시 살 수가 있습니다. 다시 산다는 것 이것이 부흥입니다. 하박국 3 2절에도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흥케 해달라는 말과 시편 85:6절의 다시 살게 해달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똑 같은 단어입니다. 산다는 히브리어 동사 하야의 강세형인 피엘형입니다하박국도 이 수년 내에 다시 살려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참된 부흥, 영적인 부흥은 영혼이 다시 사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요. 교회의 모든 지체들 하나하나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이 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수가 증가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직한 부흥이 못됩니다. 참된 부흥은 개개인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서 그 결과로 교회가 성장하는 일입니다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을 느껴야 하고, 진리에 대하여 목이 타는 갈증을 느끼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나타난 반응은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손을 들고 입으로는 아멘 아멘하면서 응답했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 아멘이라는 말을 하십시요. 마음으로만 아멘하지 말고 입으로 아멘이라고 시인하십시요. 할렐루아-아멘! 아멘이 무엇입니까? 내 귀에 들어온 그 말씀을 마음에 들어가도록 하는 장치가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들은 그 말씀을 시인하는 것이고, 그것이 참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귀로 들은 말씀을 내가 입으로 시인하면서 아멘 할 때에 내 마음에 그 말씀이 새겨집니다. 그러니 아멘을 소리 높이 외치기 바랍니다. 그러니 찬송을 부르다가도 그 가사가 마음에 와 닿거든 아멘이라는 말을 입으로 하십시요. 손으로 박수를 치고, 때로는 손을 높이 들고, 소리 높이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십시요.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 말씀을 듣다가도 그 말씀이 은혜가 되거든 아멘이라고 시인하면서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서 심령에 갈무리 하십시요. 그러면 우리 심령의 배고픔이 해결되고, 우리 심령의 목마름이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15:16<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컫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다. 음식을 보고서 배부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에 배부름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서 힘이 넘치는 영혼들이 되어야 겠지요. 그래야 살아갈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인류 역사의 끝날까지 쉬임 없이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무엇하기 위하여 말입니까? 영적인 배고픔 때문에 헐떡이고 있는 그의 자녀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말입니다4:4<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이 말은 현재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분사는 지금도 계속해서 흘러 나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강단에서 지금 선포되고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말씀입니다.    

 

/부흥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면 무슨 행동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육신의 배가 고프면 밥을 때려 먹으면 포만감이 생겨나서 만족감이 생깁니다. 그러면 소파에 앉아서 불러온 배를 두드리면서 편안히 쉽니다. 영적으로 갈급하여서 배고픔을 느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난 후에도 그렇습니까? 비어 있던 내 마음이 가득 차 올라서 충만함을 느끼게 되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니지요! 수문 앞 광장에 모인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자 울었고, 슬퍼했고 근심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통회했다는 말이지요. . 8절과 9절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 하반절에는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10절 중반절에도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음을 깨달아 알고서 마음을 찢고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 운동이라는 하나님을 떠나온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는 곳에는 회개 운동이 일어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회개 운동은 말씀 운동이지요. 이것이 또한 성령운동입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환상 보는 일만이 성령 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갈무리하고 회개에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 성령 운동입니다. 올바른 성령 운동이 오늘 우리 켐연장 교회 공동체 위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는날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귀, 심령의 귀로 듣는 사람들은 내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구나라고 고백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하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그렇게 통회하는 사람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심령을 어루만지면서 위로하십니다. 그렇게 위로를 받을 때에 또 눈물이 나지요. 기쁨의 눈물 말입니다. 성도는 두가지의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회개의 눈물과 기쁨의 눈물 말입니다. 이 두 눈물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매일 매일 흘려야 할 눈물들입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나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시는 분 계십니까? 하나님께로 돌아 오십시요. 그 길 만이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저 하늘 위에서 심령들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영혼들을 찾나요? 51: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화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상한 심령의 소유자! 마음이 산산히 부서진 심령, 이것은 죄로 인하여 마음이 갈기 갈기 찢겨진 심령의 소유자를 하나님이 찾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그 영혼을 위로하고 살리기 위하여 말입니다. 당신의 심령 상태는 어떻습니까? 심령이 갈기 갈기 찢겨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라는 모르핀으로 아편 주사를 맞아서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어가고 있는 지를 모르는 그런 비참한 상태는 아닌가 말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회개에 힘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나님께 물어 보면서 말입니다.

 

/자 정리해 봅시다. 부흥 운동은 무슨 운동이라고요? 말씀 운동입니다. 또 무슨 운동이라고요? 회개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갈급한 심령은 복된 심령입니다. 갈급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고서 하나님께로 부단히 돌아가는 운동이 부흥운동입니다. 이런 영적 각성 운동이 오늘 우리 켐연장 교회 공동체에도 이 밤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흥 운동, 말씀 운동, 회개 운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분의 역사가 없고는 이런 운동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분도 성령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게 만드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통회하게 만드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 밤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넘치기를 기도하십시요.

 

/부흥이 일어나자 어떤 결과가 맺히어 졌습니까? 말씀이 선포된 자리인 수문 앞 광장에서는 눈물 바다가 되었지만, 그 후에 그들은 무슨 일을 합니까? 레위인들과 느헤미야의 가르침을 받아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셨습니다. 또한 준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회개의 자리에서는 감정적으로 슬퍼하고 울었지만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삶의 자리에 나갔을 때에는 이웃들에게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울고 회개해야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의지적인 결단을 하면서 말씀대로 삶의 현장에서 살아 내야 합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교회 안에서 부흥 성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가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까지 뻗어 나가야 합니다. 신앙 따로 삶 따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부흥 운동은 오늘 본문 말씀이 끝이 아닙니다. 부흥운동은 성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문을 넘어서서 삶의 구석 구석으로 부흥의 여파가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 나가야 합니다. 느헤미야 13장에 가면 느헤미야의 대 사회 개혁운동이 기술되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사회 각 구석 구석에 개혁과 변화가 일어납니다. 회개 운동이 사회 전반에 퍼져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가 교회 안에서만 갖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속해 있는 사회 전반에 개혁이 일어나고 사회에 정의와 사랑이 실현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살려 내시는 의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생명력을 부어 넣었습니다. 그 생명력은 사회로 흘러 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입니다. 이 사회에 소외된 그룹들을 찾아서 돌보아야 하고, 동시에 이 사회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그런 책임이 교회에 맡겨진 책임입니다. 교회는 이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역사 의식이 없고,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기독교의 신앙이 무당 종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당들은 사회가 멸망을 당해도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문제가 없지요. 그러나 기독 신앙은 다릅니다. 사회가 더럽고 타락하여서 불의와 탐욕이 가득차서 망가지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저 신앙을 통하여 무병 장수하고 부귀영화만 누리면 됐다고 한다면 우리들이 무당들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 하나님이 교회에 생명을 다시 살게하심은, 이것을 부흥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교회 밖의 세계인 사회와 국가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지금도 저 하늘 위에서 주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를 찾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아모스가 되어서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대에 예언을 할 것인가? 켐연장 교회도 그 중에 하나가 된다면 좋겠습니다아모스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모스!

 

 


켐연장

2015.12.21 08:37:18

2015년 12월 18일, 금요기도회 음성파일은 기술적 문제로 업로드하지 못하였습니다.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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