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15

금요기도회 :12/4/2015

대표기도:중보기도+<선교부>

찬송가:183(172)

 

 

1. 부흥! 35:1-15/벧엘로 올라가자! 무엇하기 위하여 제단을 쌓기 위하여! 1절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야곱은 3절 그의 권속들에게 제단을 쌓자라고 말한다! 야곱의 말이 지금이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아 올릴 때라는 말이지요.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세겜이라는 곳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했던 일이 무엇일까? 직전 컨택스트에서는 창33:18-20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지요. 장막을 쳤다. 장막은 거주 공간 즉 살 집이지요. 텐트를 쳤고 그 다음에 한 일은? 제단을 쌓았다. 제단의 이름은? 엘 엘에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제단을 쌓았지요. 무명의 제단이 아니라 제단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제단이지요. 간혹 구약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난 다음에 그 제단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름이 붙어 있는 제단은 유명한 제단이 되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을 이긴 다음에 모세가 세운 제단이 <여호와 닛시>입니다. 닛시라는 말은 깃발, 기를 가리키는데 승리를 의미하지요. 사사기에 들어오면 기드온이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의 이름을 무엇이라고요? <여호와 샬롬>이라고 명명했지요.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시 되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지만 죽지 않았기에 제단에 그런 이름을 붙였지요. 야곱이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는 제단을  세겜이라는 곳에서 세웠지지요. 이곳은 옛날 그의 조부인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 왔을 때에 맨처음 여호와께 단을 쌓았던 곳이지요. 이곳에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또 단을 쌓았지요그리고 나서 야곱이 세겜을 떠나서 어디로 갑니까? 벧엘로 갑니다. 무엇하려고요? 제단을 쌓으려고 말입니다왜 당시 번화한 이스라엘의 도시들이 많은데 왜 하필 벧엘입니까? 아버지 이삭이 사시는 브엘세바도 있고, 고대의 큰 도시인 헤브론도 있고요. 왜 하필 벧엘입니까? 벧엘이라는 곳을 야곱은 잊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도망을 칠 때에 벧엘의 어떤 한적한 들판에서 자기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요. 벧엘에서 유숙할 때에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분명하게 하게 되지요. 벧엘이라는 곳은 야곱의 일생에서 잊을 수가 없는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이 브엘세바에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벧엘 이 한적한 곳에서도  와 계시거든요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그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거든요. 아버지 이삭이 섬기는 그 하나님을 이제 my God,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가 이제 그 하나님을 다시 만나려고 세겜에서 벧엘로 올라가려고 하지요. 그는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까지 했지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는 길에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이끌어 이곳, 벧엘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고, 베게하고 누웠던 돌을 성전의 초석으로 삼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 왔으니 응당 벧엘로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벧엘-자신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아마도 야곱은 그곳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세겜에서 지체했습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벧엘로 가는데 몇 년 걸렸습니까? 10년 걸렸습니다. 세겜에서 벧엘 까지는 약 50Km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 거리를 몇 년? 10! 이해가 되나요? 안 되지요. 그런데 교회 일 처리는 다 이렇게 오래 걸립니다. 예를 들면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피아노를 여기서 저기로 옮겨 놓는데 꼭 1년 걸렸다고 하더군요. 피아노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데, 10m정도인데  회의에 회의를 거쳐서 결정을 한 다음에 조금씩 옮겨서 만 1년 만에 옮겼다고 합니다. 야곱은 50km를 이동하는 데 10년 걸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 왔다면 제일 먼저 가야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벧엘로 직행을 해야 하는데, 세겜에서 10년 동안을 빌빌 거리면서 방황했습니다제단을 세겜에서 한 번 쌓은 이후로, 제단을 쌓는 삶을 10년 동안 멀리하고 게을리 했습니다.  

/제단은 무엇하는 덴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돌이나, 나무나, 흙으로 또는 놋으로 만들었지요. 그 제단에서 소나 양 같은 가축을 희생 제물을 삼아서 하나님께 태워 드렸지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말입니다. 10년 동안 야곱과 야곱 식솔들이 제단 쌓는 삶을 하지 않았다면 영적으로 무감각해져 있었을 것이지요. 영적으로 무척 후퇴하였을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야곱의 일족은 영적으로 방황할 뿐만 아니라 어두움의 삶을 살았으리라 짐작되고도 남습니다교회를 10년 동안 안 나오고 교회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면 심령이 황폐해지고 삶이 메말라질 것은 당연지사입니다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배 드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교회와 멀어지고 예배 드리는 것에 흥미를 잃어 버려서 예배를 건너 뛰다 보면 우리의 삶은 힘들고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제단이라는 낱말을 한번 살펴 보지요. 제단은 히브리어로 미즈베아흐라고 발음을 하는데, 네개의 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문자 멤,자인,베트,헤트- 4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단이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첫 글자 멤은 용서라는 낱말의 첫 글자로 이해됩니다. 즉 제단에서는 우리 하나님의 용서(mechila)가 선포 되는 곳입니다. 제단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와 정죄가 선포되는 곳이 아니라 무엇이 선포된다고요? 용서가 선포되는 자리가 제단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소와 양을 끌고 제단에 오지요. 그리고 소와 양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 소와 양을 희생 제물로 삼아서 태워 연기를 하나님께 드리지요. 그리고 나면 제사장이 그 죄지은 사람에게 죄가 사하여졌다라고 선포하게 되지요. 그러면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죄사함의 기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잘 수가 있지요. 죄를 지으면 다리를 쭉 뻣고 잠을 못자고 어떻게 자나요? 넓은 침대 위에서도 다리를 쪼그리고 자게 되어 있지요.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지은 죄 때문에 죄가 그 사람을 얽어 메기 때문입니다. 제단에서부터 죄사함의 소리를 듣는다면 다리를 쭉 뻗고 잘 수가 있게 되지요. 우리는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하여 죽음이라는 심판을 당하여도 싸지요단 한번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상습적으로 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들의 연약함과 우리들의 죄성을 고백하면서 제단으로 나아갈 때에 그 제단으로부터 우리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용서를 받습니다. 참 크신 은혜이지요. 이게 하루만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고서 삽니다. 죄악에 눌려서 평안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죄사함으로 인한 평안과 기쁨을 매일 매일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어디에서 말입니까? 강단에서 선포되는 죄 용서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강단에서는 매일 매일 이 죄사함의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너의 죄 사해 주사 기억아니 하신다는 메시지교회 강단에서는 죄사함을 알리는 메시지가 선포 되어야 합니다. 제단이라는 단어의 두번째 문자는 자인인데 이 낱말은 제쿠트라는 단어로 이해가 됩니다. 제쿠트는 순결.정결.정직입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살라는 메시지가 제단에서 나옵니다. 성전안에서는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었는데 세상 밖으로 나와서 게차반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도 예배의 연장이라는 말이지요. 성전안 제단에서 죄사함을 받은 자는 세상에 돌아가서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 용서 받았으니 세상에 가서 아무렇게도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강단에서의 죄 용서는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면서 살도록 요구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결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제단을 구성하는 세번째의 문자는 베트입니다. 이것은 축복이라는 말을 나타내 줍니다. 제단에서 선포되어야 하는 것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혼이 잘 되도록, 그리고 손 대는 사업들 마다 형통하기를 그리고 육체가 강건하기를 선포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을 통하여 전하여져야 합니까?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러한 축복이 세상에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정의한 다면?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의 복이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흘러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이러기에 강단에서는 부단히 무엇이 선포되어야 한다고요? 축복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또는 그런 복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메시지도 선포되어야 하고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그런 복을 받기 위한 그릇이 준비되어야 하지요. 그런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축븍을 담을 수 있나요? 예컨데, 그 그릇이 금이 가 있고, 깨진 그릇이라면 축복을 받아도 그 축복은 모두 새어 나가 버리지요. 그릇이 또한 준비 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무엇으로 받을레요? 심령 그릇을 준비하는 작업까지도 강단에서는 선포되어야 하지요. 마지막으로 제단을 구성하는 네번째의 문자는 헤트라는 문자입니다. 이 문자는 생명을 뜻합니다. 제단에서는 생명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생명이라는 글자는 들어도 들어도 좋은 글자입니다. 우리의 선조 할머니가 누구입니까? 하와! 하와라는 글자의 의미가 생명입니다.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인생들, 생자필멸의 법칙이 있는 이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을 운명입니다. 인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태어 났기에 죽어야 합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인생들에게 죽음을 정복하고 극복하고 이기는 생명의 메시지가 제단에서 흘러 나온다는 말입니다. 누가 죽음을 이겼는가? 예수 밖에는 없다. 기독교는 빈무덤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죽음을 이겼기에 우리도 이겼고, 또한 현재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죽음의 공포와 불안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말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강단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 5:19-20<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 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6<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사람의 죽어 있는 영혼이 무엇으로 살아 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강단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고 죄 때문에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하는 인생들에게 참된 살길이 강단에서 선포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받았는가? 굳게 불들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제단 쌓기를 10년 동안 하지 않았다. 이 소리가 무슨 소리입니까?매일 매일 짓는 죄로부터 죄사함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리고 정결하고 깨끗하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매일 매일 영혼과 삶이 잘 되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소리도 못 들었고, 또한 야곱의 삶에 제단으로부터 꺼지지 않는 생명을 매일 매일 전수 받아야 하는데, 이것도 못 받아서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꺼져 가고 있다면 그의 삶이 이 10년 동안 어떠했을까요? 물어 보나 마나 이겠지요. 답답하고, 컬컬하고 어둡고 힘들었겠지요. 이런 상황인데도 결단을 못내리고 있습니다. ? 세겜 땅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겜은 비옥한 땅입니다. 야곱과 같이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의 땅입니다. 드넓은 초원이 있고, 물이 있고, 기후 좋고, 무엇하나 나무랄데 없는 동산입니다. 이것을 구약식 표현을 따른다면 물댄 동산입니다. 이런 안락하고 편안한 곳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저 멀리 가야 할 곳은 알고 있지만, 현실이 너무 좋으니 결단하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렇잖아요? 가야 할 곳은 저하늘 저 천국인데, 현실의 삶이 너무 편안하고 좋기에 이것을 버리기가 너무너무 아까운 것이지요. 야곱도 세겜에서의 삶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결단하고 떠나도록 사건을 일으키셨지요. 어떤 사건입니까? 디나 사건입니다. 34장에 기록되어 있지요. 야곱과 레아 사이에 태어난 일점홍! 디나가 밧단 아람을 떠나 올 때는 조그마한 딸 아이였는데, 세겜에 거한 10년 동안에 훌쩍 커 버려서 멋있는 처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디나가 세겜 성에 나갔다고 세겜 성 추장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지요. 이 사건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성 추장의 집에 복수를 하였지요. 세겜성 추장의 집안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았고, 감금되어 있는 디나를 구출하여서 서둘러서 세겜을 뜨게 되지요. 이것이 오늘 본문의 정황입니다빨리 떠났더라면 디나의 망가짐을 면했을 텐데 그것을 못했기에 이런 참담한 일을 당하게 되었지요. 이런 황망한 일을 당하였기에 이제서야 잊고 살던 하나님을 찾으려고 했고, 또한 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단을 기억하고 찾게 되었습니다. 잃었던 하나님, 잃었던 신앙을 되찾는 lesson비가 무엇이었습니까? 참 아픈 대가를 취루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아마도 회복하기에는 힘든 그런 상처를 남겼잖아요.

/제단을 쌓기 위해서 해야 하는 사전 작업은 무엇입니까? 우상과 이방신을 버려야 한다. 몸에 부착하고 있는 이방신을 상징화하여서 나타내고 있는 모든 문양들, 이것이 우상입니다. 제단을 쌓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야곱에게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우선 라헬이 그녀의 아비에게서 훔쳐 온 드라빔이 있었겠지요. 드라빔은 라반의 집의 족장 계승권자의 권리를 나타냅니다. 유산 상속권을 가지지요. 동시에 그러면서 드라빔은 섬기는 우상단지였습니다. 우선 이것을 처리하는데, 어떻게 처리했나요땅에 묻었습니다. 땅에 묻는다는 것은 시신 취급을 한다는 것이죠. 다른 우상은 또 뭐가 있을까요? 세겜 지역은 가나안에 정착해 있는 7족속 가운데서 히위 족속이라는 족속이 오랬동안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손에 차고 있는 장신구, 귀에 달고 있는 귀고리 등등 이런 것들은 장신구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우상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면서 그것이 액막이 구실한다고 하는 그런 부적 신앙이 들어 있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물건들을 몸에 부착하고서 제단에 나가 제사를 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우상들이 모두 금으로 만들었을 텐데 값이 나가지만 야곱은 그것을 수거해서 땅에 묻었습니다. 우상과는 단절한다는 말입니다. 지난 10년동안 우상단지를 아주 가까이 놓아 두고 살았는데, 이제는 우상과는 상관이 없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아울러 또 하는 일은 의복을 갈아 입으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의복은 그 사회의 문화를 나타내지요. 이방 문화에 깊이 잠겨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방 종교와 세속 문화가 유행하고 있지요. 예전에는 청바지가 한 때 유행했었고, 또 한 때는 자매들이 배꼽 티 입는 것이 유행했고, 한 때는 남자들이 히피가 유행했고, 여성들이 올림픽 파마 같은 것들이 유행했지요. 요즈음은 어때요? 명품 가방에 명품 옷에 명품 신발 이런 것들이 유행하지요. 집안 형편이 되면 가져도 되겠지만 형편이 안되는 데고 빚을 내서 허세 때문에 들고 다녀서는 안되지요. 모두 세속 문화를 따름이지요. 세속 문화를 따름 속에 사탄과 어둠의 영이 가세하지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에게서 떠나게 만들지요. 그래서 야곱은 식솔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 해야 하는 사전 준비 작업이 이방 종교와 세속 문화를 제거하는 일을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식솔들이 군말 없이 모두 따라 주었습니다. 신약성경인 히브리서에도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는 성도들은 이런 준비를 하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10: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신과 우상을 버리라는 의미는 무엇으로 다가옵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우상은 무엇입니까? 대웅전에 가서 부처님에게 불공드리는 분은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노천에 세워진 20m, 30m 짜리 돌로 만들어진 부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우상을 섬기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기도 하지요. 맘모니즘이 한국 교회안에 하나님 처럼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신앙보다는 돈이 교회에도 앞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사랑과 헌신과 정성보다는 다른 그 무엇에게 더 많은 사랑과 헌신과 정성을 바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우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3:5절에서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탐심이 우상숭배니라> 온갖 종류의 세상 것에 대한 탐욕,욕심이 우상입니다. 사람마다 탐욕의 대상이 다릅니다. 어떤 이에게는 돈, 어떤 이에게는 자식, 어떤 이이게는 명예나 세상 권세, 참 사람마다 섬기는 우상이 다양합니다우상 숭배는 누구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아닙니다. 우상 숭배는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바람과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의 영안을 흐리게 만들고, 우상은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상을 흐리게 만듭니다. 고전10:14<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요일5:21<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14:*<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정말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사는 부흥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이 다시 사는 일이 일어나나야 합니다. 심령이 다시 사는 것이 부흥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심령과 삶의 주변에 눌러 붙어 있는 우상을 떼어 내야 합니다. 우상은 우리의 삶과 아주 들러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무엇인가를 이 시간 찾아 보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가득차 있는 탐욕의 마음을 모두 비워내야 합니다. 그래야 빈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것 아니겠습니까? 야곱이 올라갔던 그 벧엘, 우리에게는 그 벧엘이 어디입니까? 오늘 이 자리, 켐연장 교회의 금요기도회가 아니겠는가? 이전에 하나님과의 좋았던 관계를 다시 한번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벧엘, 우리의 벧엘에 올라 왔습니다. 우리의 우상을 지금 내어 버릴 때입니다. 그리고 함께 부르짖어 기도합시다:주여 은혜 베푸소서!

 


켐연장

2015.12.07 08:00:37

2015년 12월 4일, 금요기도회 음성파일은 기술적 문제로 업로드하지 못하였습니다.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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