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43

금요기도회 :7/29/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368<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 주사>

 

바디메오/10:46-52

1.우리들이 그렇게 많이 기도 하는데도 왜 그렇게 기도 응답이 없는가? 영국사람, 고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죠지 뮬러입니다. 죠지 뮬러는 한 평생 기도 응답을 5만번이나 받았다고 합니다거기에 비한다면 우리들의 기도 응답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들의 기도응답이 그렇게도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가? 기도 많이 하고 있지요. 그러나 응답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보다는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응답받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이 원하는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어떤 나병 환자가 우리 주님께 찾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우리 주님께 간구합니다. 1:40<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나환자는 누구의 원하는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고칠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나를 위하여 쓰시기를 원한다면 고쳐 주십시요라는 말입니다. 만약 주님이 원치 않는다면 그냥 그대로 나환자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보통 나환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쫓겨나서 마을 밖에 나환자 촌을 만들어서 살지요.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한 평생을 가족들과 분리되어서 살아야 하니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자신이 치료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런 입장인데도 자기의 원함보다는 자신의 낫는 것을 우리 주님의 원함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뜻과 우리 주님의 의지와 우리 주님의 원함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앞세우지 않았던가요? 마치 세 살 먹은 아이가 엄마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뗑깡쓰는 모습이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이 나환자는 몸은 병들어서 추했지만, 영혼은 건강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몸은 건강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나병처럼 병들어서 추한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나환자의 이런 간구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셨나요? 1:41-42<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우리 주님의 원함이 있자 즉시로 나병에서부터 치유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기도 제목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서 기도하기 전에 과연 나의 이 기도 제목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 제목인가를 먼저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내 고집을 세우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기도 제목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 제목인지를 알 수가 있을 까요? 요한 복음 15:7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5: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의 기도 제목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입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관계 없습니다. 영적인 것이든 육신적인 것이든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설거지를 하다가 눈에 들어 있는 콘텍트 렌즈가 싱크대에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한 후에 싱크대 배수구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와서 찾았다고 하는 간증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기도 제목도 응답이 되었지요. 큰 기도 제목도 응답이 됩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싸움을 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지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라고 기도하였지요. 그랬더니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족속들을 쳐서 이길 때까지 지구의 자전이 멈추었다는 것 아닙니까? 큰 기도 제목이지요.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에 3 6개월 동안 비가 안내렸지요. 또 바알과 아세라 섬기는 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에서 모두 처단 한 후에 무릎 꿇고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기도 제목이 크냐 적으냐는 기도 응답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주님이 원하느냐 아니냐를 묻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심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크고 힘든 기도제목인데 하나님이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의심하는 마음이지요. 의심을 품고 하는 기도는 응답이 안됩니다.

 

/아무리 큰 기도제목이라고 하더라도  단지 응답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를 영접하여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회개 하고서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고 하여서 기도응답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을 더 충족시켜야 무한한 기도응답을 받으면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우리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깨달아서 내 마음과 삶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저 멀리 떨어져 있고, 신앙 생활은 세상 방식과 세상 가치관대로 산다면 내가 기도하는 것은 모두 내 생각과 내 원하는 것을 따라서 기도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살아 있다면 그 말씀을 따라서 내가 살아가려고 하지요. 그런 말씀이 내 삶에 살아 있다면 나는 그 말씀을 가지고 그런 성경의 가치관을 가지고 기도하려고 하지요.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먹어서 내 심령과 삶에 갈무리 해 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원함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지요. 그러면 무슨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지요. 그러면 응답이 없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아 내기 위해서는 성경을 열어서 읽고,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귀 기울려서 듣고, 그 말씀의 바탕 위에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나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기도 제목이 당신의 원함인가 아니면 우리 주님의 원함인가를 기도 하기 전에 물어 보고 당신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말씀을 통하여 그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원하심임을 확신한다면 이루어 달라고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기도에 대하여 부연하고 싶은 것은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로 가져 갑니다.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소원들은 육신적인 욕망에서 나올 때가 많습니다정욕을 따라 기도하지 말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4: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이 우리의 원하는 것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쓸 것, 우리가 필요한 것을 채우십니다. 생존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 가는데 필요한 것을 채우십니다. 주의 나라를 전파하면서 선교와 구제를 하고, 교회를 받들어서 섬기고, 주의 종과 선교사들을 섬기는 일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달라고 간구하면 우리 주님이 들으십니다. 우리들의 욕심이 커져서 조금 더 큰것, 조금더 많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요구하면서 원하는 것을 구할 때에는 응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탐욕을 버리면 더욱 많은 기도 응답을 우리는 받아 낼 수가 있겠지요바른 신앙생활, 우리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가기 위하여 필요한 일들을 간구하면 우리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에 욕심을 가득 품고 탐욕으로 기도한다면 기도 응답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내 마음의 욕심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이 아닙니다.

/나의 현재의 기도 제목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인가를 물어 보고, 두번째로는 나의 필요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나의 욕심에서 나온 것인가를 물어 보기를 바랍니다.

 

2. 구약 성서의 시편은 150편이나 되지요. 모두 주옥 같은 시들입니다. 이 시들은 성격이 유사한 것을 따라서 분류가 되지요. 제왕시, 지혜시, 탄식시,감사시,등등이 있지요. 시편 가운데 특히 많은 것은 탄식시로 분류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기도가 많이 수록되어 있지요. 기도 가운데서도 특히 부르짖음의 기도가 많이 나옵니다. 진퇴양난의 어려움 속에서 시편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일 밖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 성도가 놓여진다면 할 수 밖에 없는 일은 하늘을 향하여구원하여 달라고 하늘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34:15<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하나님의 구원은 성도들의 부르짖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로 시작이 되었습니다2:23-25<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을 선지자 예레미야로부터 우리는 듣습니다. 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우리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오늘 본문에서도 여리고에서 구걸로 연명하고 있던 바디메오가 우리 주님을 만나면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그는 그의 눈을 치유받았습니다.   

 

3. 바디메오/10:46-52

바디매오가 눈을 뜬 후에 무슨 일을 했는가? 52절에는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따라갔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예수와 예루살렘까지 동행했겠지요이 따른다는 말로 쓰인 동사는 전문술어입니다. Technical term!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나의 가치관,세상 사는 기준과 방법을 버리고, 예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수의 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서 예수를 따라 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도 에수의 부름을 입어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자들, 즉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지요.

 

/예수의 부름에 대하여 어떤 응답을 하는가?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달려 나왔습니다우리 주님이 그에게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그 청년이 자신은 계명을 어릴 때부터 지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 청년을 보시고 사랑하사 이런 말씀을 덧 붙였습니다:네게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즉 네가 계명을 다 지지키긴 했지만 아직도 영생을 얻기에는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너에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는 말을 하셨지요. 그랬더니 이 청년이 어떻게 했나요?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이웃을 구제했나요? 우리 주님의 말씀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슬퍼하면서 우리 주님을 뒤에 두고 떠나 버렸지요. 우리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서도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믿읍시다라고 전도하면 어떤 반응을 하던가요? 예수 믿으면 술 못 마시게 되고, 예수 믿으면 담배 못 피우게 된다고 손사레를 치면서 교회 안나겠다고 하지요. 교회 나가게 되면 내가 좋아 하는 세상 재미를 못보게 되니까 예수 안 믿겠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름을 입고서 우리의 가치관을 버리고 모두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우리 가운데는 두 종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하나는 풀타임 사역으로 주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있고, 다른 하나는 하프타임 사역으로 주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있습니다. 풀타임은 주의 부르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의 뒤를 따르는 분들, 목사와 선교사들이고, 하프타임은 주의 부르심에 따르기는 하는데, 자기의 직업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 주의 뒤를 따르는 평신도 사역자들입니다. 모든 평신도들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주의 뒤를 따르는 분들입니다. 장로들, 집사들, 권사들은 주의 뒤를 따르는 주의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는 레위, 마태라는 제자가 있지요. 이 제자는 세무 공무원, 즉 세리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돈을 잘 버니 선망의 대상이었고, 로마의 압잡이니 매국노로서 질시의 대상이었지요. 그런 마태가 가버나움 세관에서 업무를 보다가 우리 주님의 부름을 받고서 세리를 그만두고 예수의 뒤를 따르게 되었지요. 마태는 무엇을 버렸습니까? 직업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를 때에 마태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풀타임 사역으로 주님를 따랐습니다. 그 반면에 여리고라는 세관에 세관장으로 있는 삭개오라는 인물은 어떻던가요? 그도 예수를 만나면서 삶이 변화되었습니다.그러나 그는 세관장이라는 직업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직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리고의 세관장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믿으면서 여리고 세관장으로 앉아 있으면서 무슨 일을 했을까요? 이전에 하던 대로 불의한 행동을 했을까요? 그는 공정하게 세관 업무를 보았을 것입니다. 세관장으로 변화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디메오가 눈 밝은 자가 되어서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 갔지요. 바디매오는 예루살렘까지 우리 주님과 함께 따라 갔을 것입니다. 바디메오가 눈이 띄어진 후에 주님의 뒤를 따르기 전에 했던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겉옷을 챙기는 일입니다. 겉옷! 역사 비평적인 시각을 갖는다면 바디메오는 겉옷을 먼저 챙기고 우리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50절에 보면 우리 주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자 야가 무엇을 내 버렸습니까? 겉옷을 내 버리고 뛰어 일어나서 우리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아마도 겉옷에 있는 동냥돈도 모두 버렸을 것입니다. 눈이 치유되고 난 후에 맨 먼저 한 일은 겉옷을 다시 취했습니다. 주님 뒤를 따르기 전에 내 던졌던 겉옷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겉 옷을 왜 취했을까요겉옷의 원래의 의미대로 쓰기 위하여, 낮에는 입고, 밤에는 이불로 사용한다. 눈 밝은 자 되어서도 겉옷을 동냥 돈 얻는 데 쓰는 돗자리로 쓸 것인가? 아니지요.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직업이 무엇인가? 돈 벌이, 밥 벌이, 생계유지(job)-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웃을 위한 섬김! 직업은 calling이라는 것! 직업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주님의 뒤를 따를 때에 우리 모두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당신의 직업관? 이 직업을 통하여 세상을 섬기고 ,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우리 교회의 8번째의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직업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청교도들이 이 나라를 세울 때에 바로 이런 직업관을 가지고 이 나라를 세웠습니다. 성도들은 각자의 자기 직업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30 40년간 닦은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4. 바디메오! 우리 주님이 선택했는데, 무엇을 위하여 선택했는가? 예수의 메시야 됨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선택된 그릇이다. 구약 성경에는 역사의 종말인 메시야 시대가 되면 나타나는 메시야 표적이 맹인이 치유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세례요한이 마케루스 감옥에 유폐되어 있을 때에 그의 제자 두명을 예수께 보내어서 질문을 합니다. 무슨 질문을 합니까? 예수께서 오실 그이인지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묻습니다. 이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세례요한은 요단강가에서 그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명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의 정체를 밝혔지요. 그러다가 헤로디아의 일로 마케루스 감옥에 갇히지요. 마케루스 감옥에서 그는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로마가 망하고 온 세상에 소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뚝 땅위에 세워질 것을 기대했는데 그런 일이 안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조바심이 나서 그의 제자 둘을 예수께 보내어서 예수가 메시야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질문을 하게 되었지요. 이런 질문을 받고 우리 주님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라고 일어 줍니까? 11:5절에 기록되어 있기로는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지요. 예수께서 하신 이 말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면 일어나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 중에 맹인이 보게 된다는 것-이것은 메시야 시대의 표적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마케루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확신하고서 헤롯에 의하여 참수 당하지요바디메오-많은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같은 신세인데, 이런 그가 메시야를 세상에 드러내는 귀한 도구와 그릇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그가 가진 믿음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이 그의 믿음을 타고 바디메오에게 흘러 들어가자 그의 눈이 치유되었습니다. 그의 이런 믿음은 오랜 세월 동안의 한을 통하여 성장하지 않았을까요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 만큼 우리는 세상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우리 삶의 주변에 보여주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믿은은 어떤 믿음인가?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면 날수록 우리는 우리의 삶의 주변에 우리의 하나님이 위대하심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 경멸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믿음과 깨달음 만큼 우리 하나님을 우리은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켐연장

2016.08.01 10:44:46

2016년 7월 29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729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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