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42

금요기도회 :7/22/2016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약한 나로 강하게>

 

1. 억척스럽게 모은다/나만이 누린다/이웃에게 베푼다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영적인 삶일까세상에는 억만 장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보통사람들보다 뛰어난 탁월하신 분들입니다그런 억만장자들 중에서 극히 일부의 부자들만이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있지요그렇게 베풀면서 사는 분들은 영적인 지혜가 있는 분들입니다윈스턴 처칠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생활은 가진 것으로 꾸려 가지만삶은 베푸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어떤 분의 말이 생각납니다빌어먹을 힘만 있으면 이웃을 돕고 베풀수 있다고 말입니다.  많이 벌어서 가진 다음에 이웃에게 베풀겠다 하면 끝내 베풀지 못합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 베풀기를 먼저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게 됩니다이것이 성경적인 진리입니다6:38<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지금 내가 모아 놓은 재산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어 주면 그것은 영원한 세계에 저축해 놓는 것이다영원히 그것은 내 것이 된다미련한 부자는 돈을 모아 놓기만 할 뿐죽을 때에 모두 땅에 놓아 두고 어떤 것 하나도 하늘 세계로 가지고 가지 못한다하늘 세계에서는 가난 뱅이로 영원히 살아야 한다그러나 이웃에게 베풀며 살았던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부자로 넉넉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지난 금요일날 읽었던 본문 바디메오의 눈 뜬 기사10:46-52절 읽겠습니다.

 

/이 기적은 바디메오가 우리 주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부르짖음으로 시작이 되었지요우리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러 댔고그 외침으로 바디메오는 행운남이 되었습니다많은 수의 거지가 여리고에는 순례자의 온정을 바라면서 구걸을 하면서 살아갔지요수 많은 거지들 중에서 바디메오에게만 눈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지요그 기적은 바디메오의 기도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입니다불쌍히 여긴다우리의 이웃이 당하고 있는 아픈 일이나 불행한 일을 보면서 참 안됐다하는 감정이 일어날 때에 불쌍히 여긴다라는 말을 씁니다감정적인 동조정서적인 공감이 일어날 때에 불쌍히 여긴다는 말을 사용하지요사고를 만난 이웃에게죽을 병이 걸린 이웃에게 대하여 우리는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이웃의 불행을 보면서 단순히 감정적인 공감만 일어나면 이웃을 불쌍히 여겼다라는 말을 쓸 수가 있습니다오늘 본문에서 바디메오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데바디메오가 우리 주님께 요구하는 긍휼도 이런 차원의 긍휼일까요아닙니다바디메오가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고 싶은 긍휼은 눈이 고침을 받는 일까지를 포함합니다.

신약.구약 성경에는 불쌍히여기다는 단어가 많이 사용이 됩니다.  특히 신약 성경에는 불쌍히 여긴다는 동사는  엘레오라는 단어와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두 단어를 씁니다스플랑크니조마는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실 때에 우리 주님이 그 과부를 불씽히 여기심으로써 기적을 일으키셨지요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동사도 대략 7-8번 사용이 되었는데모두 공감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을 행하실 때에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오늘 본문에 사용된 그릭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동사가 아니라  엘레오라는 동사가 사용이 되었습니다이 엘레오라는 동사도 불쌍히 여긴다긍휼히 여긴다민망히 여긴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지요이  단어가 출현하는 신약 성경의 여러 문맥을 한번 살펴 봄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 봅시다.  왜 이렇게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찾아 보아야 하느냐 하면 우리도 바디메오가 드렸던 그런 기도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15장에는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자가 귀신이 들려서 고생하는 딸 아이 때문에 예수님께 찾아 나옵니다그리고 예수님께 나아 와서 간구합니다무엇이라고 간구합니까15: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하되     이방 여인은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 주님을 찾아와서 소리질렀습니다무엇이라고 말입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입니다이 말은 바디메오가 우리 주님께 외친 외침과 똑 같은 동사를 사용했습니다이 이방여인의 외침을 듣고 우리 주님은 이 딱한 이방여인의 딸을 고쳐 주었지요.  이 이방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단순히 감정적인 공감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딸을 고치는 행동까지 했습니다예수께서 불쌍히 여겼기에 이런 기적이 일어났지요.

 

/마가복음 5장에는 우리 주님이 거라사 지방을 방문했습니다그랬더니 거기에는 군대귀신 들린 어떤 청년이 무덤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우리 주님께서 그 청년에게 포제스 되어 있는 수 많은 귀신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심으로 그 청년을 고쳤습니다그 청년이 고침을 받은 후에 우리 주님께 주님의 뒤를 따라 다니도록 요청했습니다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거절하면서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8-19<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이 청년에게 나를 따라 오지 말고 가족에게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족들에게 간증하라고 명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너를 불쌍히 여겼다에서도 똑 같은 그릭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주께서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이 문맥에서도 감정적인 공감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청년에게 붙어 있는 군대귀신을 모두 추방하고 그 쳥년을 치유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겼다여기에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17장에는 어떤 아버지에게 귀신 들린 아들이 있었습니다그 아버지가 절박한 심령이 되어서 예수께 찾아 나왔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예수님의 변형되는 사건이 산 위에서 일어났지요이 사건을 예수님의 변모사건이라고 부르지요산 아래에는 나머지 9명의 제자들이 있었는데그 아버지가 9명의 제자들에게 아들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좇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제자들은 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마침 그 때에 우리 주님이 하산 하셨고그 아들에게 포제스 되어 있는 귀신을 추방하여서 그 아들을 고쳤습니다이 사건에서도 그 아비가 우리 주님께 이렇게 요청하지요17:15<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여기서도 동일한 그릭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불쌍히 여긴다는 이 단어 속에는 단순히 감정적인 동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도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열명의 나병 환자들이 우리 주님을 찾아 나아왔습니다그들은 나병 환자들인 고로 우리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의 병을 치유해 달라고 우리 주님께 요청했고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로 돌아가서 너희들이 치유된 몸을 보이라는 명을 받아서 그 명령대로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모두 치유되지요.  누가복음17:13절에는 그 열명의 나환자들이 우리 주님께 소리를 높여서 외친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에서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같은 그릭 동사가 사용이 되었습니다우리 주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너 참 안됐구나라는 정서적인 공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때에 비로서 불쌍히 여겼다라는 동사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라고 할 때에 그 불쌍히 여김은 감정적인 연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을 베풀어 주실 때에 쓰이는 동사입니다엘레오라는 글자는 우리를 깊은 수렁에서 건져 올리시는 실제적인 구원을 베푸신 후에 사용하는 글자입니다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면 영적인 구원이든내 삶의 딜레마에서 구원하는 실제적인 구원이든일어납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는 두 사람의 비유를 듭니다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은 일 주일에 두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드리고 정의로운 삶을 산다고 자랑을 늘어 놓았습니다그러나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내 놓을 만한 공로와 업적이 없었습니다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어떻게 기도합니까18:13<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우리 주님의 평가가 14절에 기록이 되어 있지요누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냐바리새인이 아니라 바로 세리라고 말입니다세리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이 기도가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였다는 말입니다감정적인 공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롭다하심까지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바디메오처럼 기도해 보셨습니까나의 하나님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높이 부르짖어 보셨습니까한 밤을 지새워 가면서 소리 높여 외쳐야 하는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주님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런 기도가 바로 영적인 기도입니다밤새도록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는다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냐고 반박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마태복음 6장에 보면 이방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는데너희는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지요중언부언은 했던 말을 또하고계속적으로 주문 외우듯이 하는 기도라고 이해하고 있지요그러나 그 문맥에서 중언 부언 기도는 그 기도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또한 그 기도의 말에 우리의 마음 전부를 싣지 않을 때에 그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이지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하여서 중언 부언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에 우리의 마음 전부를 실어서 한 밤을 지새워 부르짖는다는 것은 중언부언 기도가 아닙니다마음이 안 실려 있는 채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반복한다면 그것은 중언부언기도이지요이런 기도 못해 보셨지요.

보통 기도한다면 실패와 좌절로 꺽여 있는 내 사업이 성공하게 해 달라는 기도내 몸에 찾아온 불치의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우리 아들 딸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는 기도청년들은 나에게 좋은 남편달라나에게 좋은 아내달라는 기도,,, 보통 이런 기도가 대부분이지요조금 신령하다는 분들은 우리 교회 성장하여서 큰 교회가 되게 해달라선교 사역 성공하게 해달라는 등등의 기도이겠지요내 심령 깊은 곳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부르짖음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이런 기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영적으로 나는 거지구나하는 것이 느껴지면 내 심령 깊은 곳에서 영적으로 이런 비참한 삶을 사는 나의 모습을 내 밖에서 볼 수가 있다면 이런 부르짖음이 터집니다한국 있었을 때에 몇일 전에 여의도 금융가에 있는 큰 건물 지하에 가 보았습니다천국이 따로 없습디다휘황찬란합니다여기가 천국인데 무슨 간구가 또 있겠습니까그러니 한국 교회가 텅텅비는 것 아니겠습니까물질적인 부와 평안을 누리고 있는데무슨 기도가 필요합니까하나님 없이도 삶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굳이 하나님께 요청할 일이 없지요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육신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부족함이 없지만영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들이 현재의 삶은 거지중의 상 거지들입니다우리 주님의 사랑우리 주님의 기쁨우리 주님의 평강우리 주님의 자유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영적인 거지들입니다내 상태가 이렇게 영적으로 비참한 거지구나라는 자각이 일어나야 비로서 우리 주님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면 못 이룰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낼 수가 있습니다모든 것을 받아 내기 위한 첫 단추가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야 합니다그러면 나머지 실제적인 도움은 거기서부터 내게 임합니다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데 돈 내노라 사업 내노라하면 하나님이 주시겠습니까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야 내게 구원이 임합니다속담: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김치국물부터 마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우리의 상태를 꼭 찝어서 나타내 주는 속담으로 생각됩니다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금 긍휼히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저 아들저 딸 참 불쌍하구나하는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가지도록 그런 삶을 살아 가고 있습니까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그런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자 힘쓰는데여러가지 방해 요소들 때문에 무너져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도우시는 것이지하나님을 뒤에 두고 세상 재미가 내 삶에 넘쳐서 세상 따라 가고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긍휼히 그에게 있겠습니까하나님의 긍휼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징계가 그를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힘쓰십시요금요기도회에 나오신 분들은 나오지 않는 분들에 비하여 훨씬 하나님의 긍휼을 더 덧입을 수 있습니다금요 기도회에 나오신 분들을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하나님의 긍휼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땅에 있는 나를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 보고 계실까주전 8세기 북 이스라엘 예언자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렇게 듣습니다11:8-9<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이런 사랑과 긍휼은 구약의 백성특히 주전 8세기 북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지요이런 사랑과 긍휼이 주전 6-7세기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 백성들에게 다시 전해 집니다.  31:20<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의 백성을 향한애 끓는 우리하나님의 긍휼!

 

오늘 이 시대를 살아 가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십자가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멸망인 지옥으로 들어가야 할 너와 나를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어 달게 함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심판에서 건져 주셨습니다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2천년 전 우리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 달리실 때에 거기에 나타나셨습니다애끓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우리는 이런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넘치게 받고 있습니다지금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강같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 오고 있습니다예수 믿는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삶의 현재의 모든 딜레마로부터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무엇 때문에 이런 실제적인 삶의 차원에서 구원이 일어납니까불치의 병이 낫고기울어져 가는 사업이 회생하고엇나가는 우리의 아들과 딸들이 내게로 돌아오고무너진 이웃과의 인간관계가 회복이 되는 일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우리의 믿음이 줄충하기에 일어나는가아닙니다우리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이 믿고 굳게 붙들고 있는 십자가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십자가 안에 숨어 있습니다9:32<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우리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아낌 없이 내어 주셨다면 다른 모든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가예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그냥 덤으로 주는 선물입니다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 하나님이 그냥 공짜로 덧대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면 하나님이 나를 위한 구원의 액션을 펼치신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유1:2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1:21<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오늘 이시간 우리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긍휼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주전 8세기 예언자 호세아가 고멜에게서 둘째 딸을 낳았을 때에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으라고 했지요-루하마 즉 긍휼이 없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했을 때에 그 딸의 이름을 루하마로 바꾸도록 하셨자요루하마가 무엇이라고요긍휼이 있다라는 말입니다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가 가득하던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긍휼이 가득함으로 바뀌었습니다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금요기도회에서 우리들도 바디메오처럼 부르짖어 봅시다: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3. 바디메오가 우리 주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할 때 귓속말로 그랬나요아니지요부르짖었습니다큰 소리로 외쳤습니다단말마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심령을 가지고 이번 기회를 꽉 붙들었습니다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디메오의 부르짖음 때문에 성가심을 느껴서 조용하라고 핀잔을 주었지요.그러나 아량곳 하지 않았습니다더욱 담대하게 외칩니다더욱 소리를 높여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그 말: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이 말에 바디메오의 한이 서려 있습니다서러움과 한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성가신 소리이지만 이 말은 우리 주님의 마음에 불을 질렀습니다우리 주님은 영의 사람입니다그 말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한과 서러움을 우리 주님은 영으로 감지하셨지요그래서 바디메오를 부른 다음에 그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소원대로 눈을 치유하셨지요바디메오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너무나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말입니다그리고 자신의 부르짖음에 자신의 모든 것을 실었습니다한 평생의 아픔과 눈물과 한을 실으니 그것이 우리의 주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성도 여러분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 소리에 여러분의 마음 전부즉 영을 실어서 기도할 수 있는가영을 실어서 기도하면 목소리가 높아 질 수 밖에 없습니다물어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이 살려달라는 소리를 귓속말로 하던가요혼신의 힘을 다해 사력을 다해 부르짖잖아요우리들도 우리들의 기도 말에 우리의 영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힘과 우리의 전부를 실어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실험숲속의 새

 

/구약 시대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구약의 백성들이 노예살이가 힘들어서 그들은 자신의 하나님께 구원하여 달라고 간구하지요어떻게 간구합니까부르짖었습니다.  구약 성경 출2:23-25<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등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예레미야 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의 상황이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마태복음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에 따르면 베드로가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에 내려서 저벅 저벅 주님께로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고서 무서움이 일자 그만 바다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지요베드로가 다음에 취한 액션은 무엇입니까주님께 소리질렀지요무엇이라고 말입니까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입니다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우리의 상황을 바라 보게 되면서 주저 앉아 버리게 되었습니다이 시간 부르짖어야겠지요무엇이라고 말입니까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켐연장

2016.07.25 10:59:07

2016년 7월 22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722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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