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38

금요기도회 :5/20/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복음송<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1. 예수의 제자 키우기: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가 참 어렵습니다특히 나보다 약한 상대인 어린 아이들 가르칠 때에 우리는아이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내 생각, 내 가치판단, 내 삶의 철학을 주입시키려고 하지요. 상대방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사람들은 흔히 사랑,혹은 애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특히 자기 자녀들에 대하여 부모가 바라는 것을 자식의 원함과는 상관없이 만들어 가지요. 이것을 대리 만족이라고 부르지요. 자신의 삶에 실패한 것을 자식을 통하여 이루고 싶어서 자녀들의 의사에 반하여서 자녀들에게 그것을 이룰 것을 강요하지요.

우리들이 영적인 스승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제자 훈련을 할 때에 우리는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내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내 손아귀에 넣고 통제하고 좌지우지하는 유혹에 빠지지지요. 내 손아귀에 들어와서 내 말 한마디면 내 말대로 따라 오는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예수의 제자를 만들기 보다는 나를 닮은 내 제자를 만들어 가는 실수를 범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내 약점, 내 허물들도 마치 장점인양 그것을 배우도록 강요하지요. 내가 제자를 키우면서 그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폭군 같은 존재가 되지요. 늘 우리는 제자 훈련을 할 때에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내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제자를 만들어가야 하나요? 예수의 제자를 만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아동부,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들은 늘 교사 사역을 행할 때에 자신을 살펴보면서 경계해야 합니다. 28장의 너희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것은 ‘너의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를 삼으라는 말입니다.

 

2.  헤 아가페! 일본 전범 미망인들이 세운 동상에 새겨져 있는 글귀!   하나님이 나를 얼마큼 사랑하시는가? 이만큼! 손을 옆으로 펴면서~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로 만들어진다. 위 아래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표시하고 양옆은 사랑의 넓이 즉 사랑의 폭이 넓음을 의미한다.  

렌즈 조리개를 활짝 열기:15:9-10<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나님이 현재,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아 보기 위하여 열심히 더욱 기도하고, 열심히 하나님 말씀 순종하고 헌신하면서 금식도 하고 이웃을 봉사하고 섬긴다면 하나님이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사랑하지 않을까요? 보통 우리는 이런 이해 속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여서 헌신 하면 하나님이 나를 지금보다 더 사랑하신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공로 중독증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성서적인 깨달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대로의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비록 내 허물과 죄악과 약점이 많지만 말입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 천국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이 지금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 이대로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더욱 거룩하게 되어도 지금과 똑 같은 크기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46:3-4절 참고! 하나님의 사랑은 더하고 덜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더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더욱 깊이 한다면 똑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느낌과 체험이 다를 뿐입니다.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그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체험하는 부분이 넓어 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나의 의식이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태양 광선이 어떤 거대한 렌즈 위에 비추고 있습니다. 렌즈에 빛을 조절하는 조리개가 달려 있어서 조리개가 닫혀 있는 동안은 빛이 렌즈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리개를 반쯤 열어 두면 빛이 어느 정도 렌즈를 통과하겠지요.조리개를 활짝 열어 두면 빛이 렌즈에 닿는 모두가 렌즈를 통과하겠지요. 렌즈에 조리개가 닫혀 있을 때나, 반쯤 조리개가 열려 있을 때나, 혹은 활짝 열려 있을 때에도 렌즈에 닿는 빛의 양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 같습니다내게 내려 오는 하나님의 사랑도 그와같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내는 나의 의식, 나의 영혼이 확대되면 될수록 내 안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커집니다. 이 땅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체험하는 만큼 체험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나에게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나의 의식이 확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내야 겠지요. 의식이 닫혀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크게 임하더라도 받아 낼 수가 없습니다. 나의 현재의 모습 이대로 우리 하나님이 나를 끔직이도 사랑하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할렐루야! 아멘! 나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체험이 크고 넓어 지기 위한 길은 성령이 내게 더욱 충만하게 임하는 길 밖에는 없다. 성령이 내게 임하여 있는 분량 만큼 나의 의식이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여 열려지게 되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크게 느낍니다. 5: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이 내게 얼마만큼 임하여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폭이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오늘도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내게 성령을 다시 충만하게 내 심령에 부어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에 덮혀 있는 가리개를 제거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3.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신다: 주의 일은 누가 하는가? 내가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시는가? 주의 일, 교회 일을 하면서 우리는 그 일들을 주님의 도움으로 우리 자신이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요 14: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 말씀의 의미? 예수께서 지상 생애 3년간 하신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일들이다.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친히 찾아가셔서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들을 살려내고,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들이지요.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일들을 하셨지만,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셔서 친히 하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예수가 누구인가하나님의 가장 큰 아들! 가장 영적으로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다. 가장 영적으로 장성한 아들인  예수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 속에 들어오셔서 일을 하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영적으로 애기들인데, 더더욱 주의 일을 할 때에 더더욱 우리 주님을 의지해야 하지 않는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들은 더더욱 우리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힘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영적 무력감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들 가운데 들어오셔서 주의 일을 우리 주님이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교회 일을 하면서 내가 내 능력과 지혜와 힘을 가지고 주의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했다고 생각되는 주의 일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내  안에 거주하시면서 예수께서 하셨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렇잖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의 일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 복음을 가르치는 일, 또한 이웃들을 구제하고 섬기는 일들을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주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 내 안에 거하기 위하여 내 안으로 들어 오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를 사용해서 주님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15: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음 안에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주님 예수께서 친히 내 안에 계시면서 능한 일을 행하신다. 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내가 믿음 안에서 선한 소원이 생겼다면, 그 소원의 출처는 어디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가? 나의 소원을 누가 이루시는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누구?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내게 선한 소원을 내 마음에 넣어 주셨고, 그리고 그 소원을 친히 이루신다. 나는 그 믿음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된다. 오늘 이 밤에 우리들은 예수께서 친힌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는 것을 목도하기를 바랍니다.

 

4.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예수는 누구인가? 16:13-16<예수께서 빌리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당신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이것은 예수에 대한 어떤 신앙고백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기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의 제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를 선지자들 중에 하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는 고난 받은 예언자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고난 받는 예언자로 믿고 있다면 구원 얻지 못합니다. 구원 얻지 못한다는 것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지요. 열심히 예수를 믿고 따라 다녔지만, 천국에 못들어간다면 그것보다 허망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identify하든지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어떤 신앙 고백을 해야 합니까?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이고,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지요.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면서 베드로를 칭찬하셨지요예수는 조상적부터 기다려 오던 바로 그 메시야라고 말입니다. 메시야라고 말하면서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라는 정치적 메시야가 많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열심 당원들 중에는 자신이 유대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그런 정치적 메시야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부추키시면서 로마에 대항하게 만들므로써 많은 사람들이 반역죄로 로마 군대에  죽임을 당하였지요. 갈릴리에서는 로마에 반역하면 십자가 형틀에 달아서 죽였지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그런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무슨 메시야라고요메시야긴 한데, 무슨 메시야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 즉 영적 메시야를 의미합지요. 예수님은 영적인 메시야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유대를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독립시켜서 해방시킴으로써 정치적인 자유를 가져다 주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우리 인생들을 죄와 사망과 영원한 심판에서 건져 내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영적이면서 보다 근본적인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야입니다. 예수를 이런 메시야로 볼 수 있는 눈은 어떤 눈?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실 때에야 비로소 예수를 이런 메시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눈을 가진 분들이 복된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눈을 가진 분들에게 천국 기업을 누릴 특권을 주셨지요.

 

/예수에 대한 위격이 321년 니케아 종교 회의를 거쳐서, 451년 칼세론 종교 회의에서 결정되었지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유사 본질이 아니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짝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명품을 베껴서 만든 명품 비슷한 물건을 짝퉁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짝퉁 물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여 참 인간이시다. 신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완전하고, 인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완전하다. 예수는 양성을 가지고 있다. 신성과 인성! 신성은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다. 예수는 우리와 비슷한 분이 아니라 우리와 똑 같은 분이십니다.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과 한 본체 안에서 보전되고 함께 역사한다두 본성은 연합되었는데, 두 본성은 섞이거나, 변화하거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이것을 풀어서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는 God-man이다.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이시다. 신성과 인성이 서로 섞여서 이상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다. 검정색과 흰색이 섞이면 회색이 되지요. 검은 것도 아니고 흰것도 아닌 것이 회색입니다. 우리 주님은 회색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보다는 뛰어나고 하나님보다는 못한 그런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예수는 육신을 입고 있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똑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했고, 또 다른 말로는 ‘도성인신’이라는 말을 쓰지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사건은 2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요. 예수께서 인간 비슷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우리와 똑 같은 혈과 육을 지닌 인간이 되었습니다. 우리와 똑 같기에 우리와 교감할 수 있는 분이지요. 성서는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나 무엇이 없다고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심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르면서 예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2: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예수의 인성이 부인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예수는 또한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고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인간들이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많이 있어 왔습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신성에 대하여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우선 부활하신 예수님을 도마가 만났을 때에 도마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어떤 신앙 고백을 했습니까? 20: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다> 우리 주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 만진 후에 도마가 했던 멋진 신앙 고백이지요. 이것을 우리 주님이 거부했나요? 아니지요. 그의 신앙 고백을 accept했습니다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행동입니다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도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14:9절에서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졸랐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 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 요청에 대하여 우리 주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대답하셨지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너가 보지 않느냐 어떻게 또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시면서 그것이 믿어 지지 않거든 무엇을 가지고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예수의 말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병자를 치유하고,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였고,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켰고.,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를 걸으셨고, 죽은 자들을 살려 냈고요. 이런 엄청난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에서 자신과 성부 하나님은 하나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10: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나님과 자신은 또 같은 본질을 가진 분이라고 선언했지요.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예수는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이런 선언이 어떤 영적인 환경에서 주장되었습니까? 다신교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신이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어디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지배하는 유대 사회에서 우리 주님이 자신은 여호와와 동등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바입니다. 만약 다신교가 지배하는 그런 사회였다면 예수도 그런 만신전에 모여 있는 신들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회에는 유일신 사상이 주장되고 있는 사회입니다.여호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들은 가짜이고 거짓된 신입니다. 이런 영적 환경에서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고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신성을 굽히지 않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으뜸 피조물이 아닙니다. 예수는 만유의 주 즉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또한 예수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백보좌에 앉아서 인류를 모두 심판하여서 천국과 지옥에 들여 보내는 재판장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는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인데,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인생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선언하셨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고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 가운데 죽을 것이고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8: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께서 그이다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반인, 반신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임을 세상에 천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는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아 마땅한 삼위 일체 하나님 중에 제 2위에 있으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는 주! 예수는 그리스도주님이라는 칭호를 구약의 성도들이 여호와의 대체명으로 사용했는데,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이라는 칭호를 예수께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의 황제에게 로마의 시민들이 주라고 불렀는데, 초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로마의 황제를 주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원형 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어 죽어 가면서 예수를 주라고 불렀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야입니다. 영원무궁토록 존귀와 영광을 우리 주님 예수께 돌립시다.

 

 


켐연장

2016.05.23 08:20:13

2016년 5월 20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520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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