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33

금요기도회 :4/8/2016

대표기도:중보기도+선교부

찬송가:324장/예수 나를 오라 하네!

 

1. 교회가 2천년 동안 지켜 오고 있는 전통을 파기할 것인가 아니면 굳게 지키면서 계승.발전시킬 것인가? 교회의 전통이 무엇인가?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예배 드리는 날이 매주 일요일입니다. 달력에 빨간 글씨로 되어 있는 날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잡아서 예배하는 날로 삼고 있는 파가 유대교이고 안식교입니다.토요일이라기 보다는 정확하게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가 유대교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일요일날을 예배하는 날로 정했을까요? 그것은 초대 교회가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거의 대부분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예수 믿는 사람들, judeo –Christian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토요일날도 안식일로 모였고, 그리고 일요일날도 따로 모여서 예배하면서 성만찬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방인들이 대거 교회로 모여 들게 되었고, 이방인 교회가 우후 죽순 생기면서, 로마 제국에 대하여 유대인 봉기가 주후1- 2세기에 일어나면서 유대나라는 완전하게 멸망하게 되었고, 기독 공동체는 유대 공동체에서부터 완전 분리되면서 토요일날 모이던 관습을 버리고 일요일날만 모이게 되었지요. 자연스럽게 예배 드리는 날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면 토요일날을 버리고 일요일날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했을까요? 유대인 공동체와 차별을 두기 위하여? 물론 외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이렇게 선택하게 데에는 신학적인 성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일 새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일날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 공동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토요일이 아니고 일요일날 모인다는 것입니다. 1년 52주간 동안 주일날은 무슨 날이라고요?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도 사순절 기간 동안에도 주일날은 금식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이해와 성찰이 있기 때문에 일요일날을 예배하는 날로 기독공동체는 정해 왔고,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날을 지켜야 합니다.  안식교는 이런 의미를 버리고 과거로 회귀했지요. 토요일을 예배하는 날로 정해서 유대교들처럼 과거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교회가 지키는 전통을 파기하고 버렸지요. 옳지 않지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은 주일날이고 그리고 예배에는 예수의 부활이 들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켐연장 공동체는 부활공동체다!

 

/크리스찬 공동체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귀한 전통이 하나 있지요. 무엇이지요? 성만찬 전통입니다. 성만찬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귀한 예전입니다. 예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귀한 피를 흘려서 구원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예전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나타내 줍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사용하지요. 포도주를 사용하는가? 다른 사용하면 안됩니까? 예를 들면 붉은 포도주 대신에 포도주를 사용한다거나, 아니면 포도주 대신에 소주를 사용하면 안됩니까? 떡을 먹고 컾의 소주를 마시면서 성만찬 예전을 하면 안되느냐 말입니다. 교회는 2천년간 붉은 포도주를 사용해 왔는데, 그것도 하나의 옛날 전통이니 전통을 넘어 서기 위하여 소주로 성만찬을 거행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대학 시절 친구,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만, 친구가 동아리 모임에서 성만찬 예전을 하면서 포도주 대신에 소주를 가지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소주를 가지고 한번 성만찬 볼까요? 그렇게 하면 절대로 안되지요. 왜요? 전통을 넘어가자면서요? 전통 가운데 깨뜨리고 넘어 가야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결코 넘어 가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만찬에서 붉은 포도주를 사용해야 하는 것은 파기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고요? 붉은 포도주는 피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소주는 물처럼 하얗습니다. 하얀 피를 가진 사람 있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붉은 피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만찬을 거행하면서 붉은 포도주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피를 붉은 포도주가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이것 지켜야 합니까? 지켜도 됩니까?  복음을 믿는 사람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모두 폐기하거나 완성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말입니다.  십계명은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심으로써 폐기한 구약의 율법은 의식법입니다. 도덕법을 폐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의식법은 무엇입니까?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하는 잡다한 규정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먹을 있는 동물은 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져 있는 것만 먹을 있었습니다. 돼지는 먹으면 안되지요. 옷도 두개의 다른 실로 옷, 이것을 혼방이라고 하지요. 이런 옷을 입으면 안됩니다. 이런 잡다한 규정들을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실 때에 모두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덕법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등등의 도덕법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켜야 합니다. 더욱 철저하게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지켜 내야 합니다. 세속법으로는 간통법이 폐기 되었지만,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더욱 철처하게 지켜 내야 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승, 전통은 출애굽 전승, 광야 전승, 가나안 정복 전승, 제 2 출애굽 전승. 이런 전승군들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이것 뿐입니까? 교회는 십자가 전승과 부활 전승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 재림 전승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전승을 자손 만대까지 전해야 하고, 전승을 계승 발전시켜야 필요가 있습니다. 굳게 지키면서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2. 걸어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고, 고민과 두려움이 있고, 근심과 염려와 우환 같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내가 보스톤 하늘 아래에서 걷고 있는 길은 무슨 길인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실까? 우리는 우리의 길에 생긴 장애물이 생겼는지를 모릅니다. 가는 앞길에 놓은 장애물이 죄와 때문에 생겼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하여 놓아 두셨는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그냥 앞에 있는 것인지 ~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장애물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장애물을 어떻게 하면 없어지는가?

 

/스가랴4:7절<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스룹바벨은 누구인가? 여호야긴 왕의 손자입니다. 스룹바벨이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을 약 5만명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지요. 그리고 무엇을 했나요? 제사장 예수아와 함께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하게 되지요.  일을 먼저 착수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구심점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통하여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모을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슨 성전이라고 부르나요? 제 2 성전이라고 부르지요.  1 성전은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파괴되고 불타 버렸지요. 무너진 성전 위에 유대인 정치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 예수아에 의하여 2 성전을 우여곡절 끝에 완공하게 되지요. 때에 도왔던 예언자들이 누구이지요?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2성전을 건립하는 동안 주위에 있는 족속들의 방해공작이 극심했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공작이 특히 심했습니다. 성전 건축이 16년간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기되어서 주전 516년에 완공되었지요. 산과 같은 장애물을 스룹바벨과 당시의 유대 백성들이 이겨내고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산과 같은 장애물이 무엇이 된다고요? 평지가 되리라! 누구 앞에서 말입니까? 스룹바벨 앞에서 말입니다.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이라는 엄청난 일을 맡고 있는 정치지도자입니다. 앞에 놓여 있는 산과 같은 장애물을 하나님이 없애 준다는 말입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의 머릿돌을 놓을 때에 이것은 성전 건축의 시작을 의미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일을 맡아서 진행하는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계속해서 부어 달라고 말입니다. 지도자가 낙담하여서 하나님의 은총을 떠난다면 성전 건축은 진행될 수가 없지요. 성전 건축이 시작부터 이웃 족속들의 방해과 핍박 같은 장애물과 또는 내부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관심과 경제적인 부담등과 같은 장애물도 있지요.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인 장애물들로 인하여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루어질 있을까하는 염려와 근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전 재건 공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기에 어떤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어도 하나님이 성전을 완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주일에 우리에게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라고 말입니다. 성전 시작인 머릿돌을 놓는 일은 알파이고, 성전 완공은 무엇이라고요? 오메가 입니다. 성전 건축과 같은 선한 사업은 하나님이 시작했고, 하나님이 마친다는 말이지요. 아무리  장애물이 태산과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넉넉하게 장애물을 제거하실 있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그런 장애물이 제거 되나요? 어떻게, 비결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이곳 보스톤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어 가는 시점에 장애물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4:6<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내 힘과 내 능력으로는 제거할 수 없다. 무엇으로 제거 된다는 말입니까? 오직 나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제거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그러니 오늘 밤 우리들이 기도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내 삶에 개입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성령께서 막힘 없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열어 드리면 됩니다내가 지은 죄를 제거하고, 내 마음에 있는 의심을 제거하고, 내 욕심들을 내려 놓고, 성령님을 환영하면서 모셔 드리면 성령께서 큰 권능으로 내 앞에 있는 태산 같은 장애물을 평지처럼 만들어 버리십니다이 시간은 우리는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성령이여 오소서우리들의 태산 같은 장애물들-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질병,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또는 재정.경제적인 압박과 궁핍-이런 장애물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3. 귀로 듣는 신앙에서 이제는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살자!  옛날에는 라디오로 가수의 노래를 듣기만 했는데, 요즈음은 텔레비전이 나옴으로써 노래를 들으면서 가수를 볼 수 있게끔 되었지요. 동영상! 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귀로 듣기만 한 신앙은 그냥 가르침을 받아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눈으로 보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귀로 들었던 그 말씀을 눈으로 보고,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목사나 장로나 권사 혹은 선교사의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귀로 듣고 자라난 신앙인들입니다. 교회 중직들의 자녀들은 신앙 밖의 세계를 잘 모릅니다. 그냥 교회안에서 어릴적부터 말씀을 들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행동이 몸에 배여 있지만 아직 하나님을 1:1, 혹은 영적으로 체험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에 있기에 연약한 믿음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귀로 들었던 말씀이 삶 속에서 체험되어 질 때에 어떤 믿음으로 바뀐다고요? 눈으로 보는 신앙인이 됩니다. 


/우리는 야곱이라는 족장에게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야곱이 젊은 시절에 에서와의 갈등 때문에 외삼촌 라반으로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브엘세바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들판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돌베게를 베고서 잠이 들었습니다. 한 꿈을 꾸었지요. 그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28장에는 야곱이 꾸었던 꿈과 꿈 속에서 있었던 일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그 꿈에서 사닥다리를 하나 보았는데 사닥다리가 윗쪽은 하늘에 닿아 있고, 아랬쪽은 땅에 있었습니다. 그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신비한 꿈을 꿉니다. 꿈에서 눈을 들어서 바라보니 사닥다리 위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그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야곱이 듣지요: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가 누어 있는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그리고 네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겠다. 그리고 너를 이끌어서 이 땅으로 돌아 오게 하겠다. 내게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이 화들짝 놀라면서 잠이 깨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합니까? 28: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일지 못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어디 계신다고요? 여기 한적한 땅인 벧엘에도 계신다는 말입니다. 어제까지는 아버지인 이삭이 있는 브엘세바에만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꿈을 통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과 함께 이곳 어디? 벧엘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버지 이삭이 믿고 있는 하나님! 그 그늘 아래에서 신앙생활했습니다. 그저 아버지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곳 벧엘에서 이제는 이삭이 섬기는 그 하나님, 여호와를 야곱이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귀로만 들어서 가지고 있던 신앙이 이제는 눈으로 보는 체험적인 신앙으로 바뀌었지요.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의 하나님이 이 벧엘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자신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벧엘에서 만난 나의 하나님!이라고 야곱이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곳 보스톤 땅에서 이런 신앙고백과 신앙체험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MK들이 많습니다. 비전 청년부에 있는 선교사 자녀들, 선교사인 아버지 어머니의 그늘 아래서 신앙 생활하다가 보스톤 땅에 유학을 와서 대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신앙이 야곱처럼 바뀌기를 바랍니다. 주예수를 내 주님으로, my saving Lord로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보스톤 땅이 내 영혼의 고향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귀로 듣던 신앙이 아니라 이제는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신앙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보스톤 땅에서 만난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그의 일생 다가는 동안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에 대하여 간증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에 고난과 시련이 다가 올 때마다 그는벧엘에서 만난 그 하나님에게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스톤에서 이런 체험이 일어난다면, 내 인생 여정 다가는 동안 내 인생에 먹구름이 몰려 올 때마다 보스톤에서 만난 나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담임목사로서 여러분의 신앙을 이렇게 훈련 시키를 원합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문제를 하나님과 1:1로 대면하여서 해결해 나가는 그런 신앙인으로 자라게 하기를 원한다. 기도의 능력을 체험해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붙들고 하나님 앞에 심령기도를 할 수 있는 성도들로 커 나가기를 바랍니다. 


4.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바르고 건강한가? 그렇기 때문에 기도라는 것을 규칙적으로 해야 하고, 또한 바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르게 기도해야 하는데, 그릇되게 기도한다면 시간 낭비이지요. 4:2-3<~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구하기 기도하는 의도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좋으라고 말입니다. 세상 정욕으로 잘못 쓰려고 말입니다. 어떤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어떤 여자 집사님이 입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이 몸을 빠져 나와서 천국에서 우리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 여집사님에게 여기를 보라고 하더니 부흥회하는 자기네 교회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교회에 누워있고, 자기 주위에 교회 안에는 온통 꿀돼지들이 꿀꿀거리면서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어쩨 거룩한 예배당 안에 더러운 돼지들이 저렇게도 많이 있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너희 교회 성도들이 탐욕과 정욕을 품고 기도하고 있기에 꿀돼지처럼 보이는 것이란다라고 말해주었다는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 속에는 욕심이 있고, 이기적인 동기가 있고, 탐욕이 가득하고, 세속적인 성공과 번영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고, 더 나쁜 것은 미움과 질투가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가득한 것을 비우고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을 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을 이루어달라고 떼를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국의 남북 전쟁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남북 전쟁에서 이겨서 미국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남북 전쟁할 당시에 아브라함 링컨이 이끌런 북군이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에 비하여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승리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측근들인 참모들이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셔서 이겼다고 링컨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링컨이 정색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었기에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었기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여 드리기 보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하나님이 비로소 내 편이 되어서 나를 위하여 싸워 주십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 들이는 믿음보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믿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욕심과 정욕을 내려 놓지 못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들어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들어 오실리가 없지요. 내 욕심과 정욕을 내려 놓으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의 뜻이 밝히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지요.  이시간 당신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오늘 이 금요기도회 시간에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바는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내려 놓아 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 밝히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살 길은 내것을 버리고 하나님 편에 서는 일입니다.


켐연장

2016.04.11 08:53:00

2016년 4월 8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408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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