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32

금요기도회 :4/1/2016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552(아침 해가 돋을 때)

광고:내일 구역장 모임이 오후 6시에 있습니다. 구역을 맡은 구역장 내외분들 모두가 나오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식사가 제공됩니다.

 

1. 벌개미취? 단풍취? 참취? 곰취? 곰취는 깻잎과 비슷하면서 좀 더 둥글고, 참취는 곰취에 비해 잎이 뾰족한 편이다. 단풍취는 단풍잎과 닮았다. 벌개미취는  난처럼 얇고 긴 모양의 잎이 난다. 모두 봄에 나는 산나물입니다. 쌈 싸먹는 나물이지요. 모두 몸에 좋은 식재료입니다. 봄이 되니 우리의 몸이 한번 먹어 보았으면 하는 산나물이지요. 한국 가야 먹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달래.냉이.쑥 이런 봄나물이 그리워지지지요. 이름만 들어도 입안에 향기가 돌고 풋풋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2. 오늘 저녁은 어떤 밥상? 세 종류의 밥상이 있다. 상한 밥, 성한 밥, 식은 밥이 있습니다. 성한 밥은 좋은 식재료를 사용해서 따끈따끈하게 막 만들어 낸 밥을 의미하고식은 밥? 오래 전에 지어서 놓은 이미 식어 버린 밥상을 말합니다. 기름이 동동 뜨는 뜨거운 국물이 식으면 기름이 엉켜 붙어 버린 국과 이미 오래전에 지어 놓았던 밥은 밥통에서 누루스름하게 변하게 되지요. 이런 밥상은 먹기 힘듭니다. 배탈은 나지 않겠지만, 맛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한 밥상은 무엇일까요? 나쁜 재료로 만든 밥상입니다. 김치를 만들었는데, 고추가루에 톱밥을 섞어서 만든 고추 가루를 써서 만든 김치, 두부를 만들었는데, 회가루를 섞어서 만든 두부로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중금속에 오염된 해산물로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잡히는 해산물은 고농도의 세슘에 오염되어 있지요. 이런 밥상을 먹으면 탈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별 문제 없다고 하는데, 정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설교는 우리의 영혼의 밥상입니다. 어떤 밥상을 설교자가 만들어서 준비해야 합니까? 설교가 식었다는 것은 자기가 설교 준비를 안하고 남이 해 놓은 설교를 배껴서 사용합니다. 글자 한자 안틀리고 제목만 바꾸어서 남이 해 놓은 설교를 카피해서 자기 설교로 사용합니다. 그런 설교를 무엇이라고요? 식은 밥상이다. 설교가 따끈 따끈해야 하는데, 남의 것이니 다 식어 있겠지요. 남의 것이니 거기에 자신의 영과 마음을 실어 낼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상한 밥상은 무엇입니까? 설교 재료가 성경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도는 만담이나 시사거리나 혹은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아니면 심리학이나 상담 사례들을 설교의 주 재료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설교에는 안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무엇이라고 부른다고요? 상한 밥상이다. 이런 설교 들으면 우리의 영혼이 탈이 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한 밥상은 어떤 밥상입니까? 밥상의 주 재료는 성경입니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맛있게 요리를 해야 하지요. 설교자가 날 재료만을 성도들에게 먹여도 좋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조리고 삶고 기름으로 볶고 튀기면 훨씬 맛있지요. 이런 설교를 먹으면 우리의 영혼이 살지게 되지요. 저도 최선을 다해서 성경말씀을 재료로 하여서 영의 양식을 맛있게 요리해서 여러분들에게 먹이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영적으로 포동포동 살이 찌겠지요.영적으로 영양 실조 걸린 그런 교인들이 우리 교회에는 한분도 없어야겠습니다. 매 주일마다, 매 금요일마다, 그리고 새벽 기도회 때마다 풍성한 말씀 밥상이 준비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를 맞친 후에 목사인 내가 가장 듣고 싶은 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목사님 설교 참 잘했습니다. 열정이 넘치네요. 큰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소리일까요? 아마도 모든 목사님이 그 소리를 듣고 기뻐합니다. 나는 이 소리보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서 내 삶의 이런 모습이 변했습니다. 나의 이런 나쁜 습관, 이런 버릇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켐연장 성도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나에게 바뀌지 않는 고정관념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 고정 관념이 오늘 설교 듣는 시간에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나의 이런 중독증, 술 담배하는 그런 중독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가 절망 가운데 있었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소망이 생겨났고요, 그래서 다시 한번 열심히 인생을 살아야 겠다는 의지가 생겨 났습니다. 내 영안이 열려서 천사도 보았고요, 성령 은사도 설교 듣는 동안 받았고요. 설교 듣는 동안 천국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설교 들으면서 내가 그동안 기도를 너무 등한히 여겼는데, 기도에 힘써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새벽기도와 금요기도회에 힘써 참여해서 기도훈련을 받아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소리! 나는 이런 소리를 우리 성도들에게서 듣고 싶습니다. 우리 목사님 설교가 너무 좋습니다 또는 오늘 목사님 설교 참 열정적으로 잘하셨습니다와 같은 이런 소리는 듣고 싶은 소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저를 칭찬한다면 내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So what? 그래서요? 당신의 삶은 오늘 설교로 어떻게 변화가 되었느냐를 물을 것입니다. 설교는 잘 했느냐 못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얼마큼 변화시켰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의 심령과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실패한 설교입니다. 아무리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들었다하더라도 말입니다.

 

 

3. 세상은 영어로 코스모스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무엇일까요? 세상을 낙천적으로 보시는 분들은 세상이 아름답고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한 세상 멋있게 웃고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시는 분들은 세상이 너무 어둡고 악하기에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세상을 슬프게만 봅니다. 그래서 늘 얼굴과 마음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세상 모든 걱정을 짊어 지고 우울하게 살아가게 되지요. 자 우리는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확실히 세상은 어둡고 악한 곳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지었지만, 악한 자의 손에 떨어져 있어서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눈물도 있고, 고통도 있고, 한 숨도 나오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보았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생 살이가 기쁩니다. 어떤 비전? 어떤 소망?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의  돌들이 되게하셨습니다. 성전은 돌로 된 집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 성전 돌들로 만들기 위하여 나를 훈련 하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 하나님의 작업장은 세상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 작업장? 우리 하나님이 나의 구원 완성을 위하여 일하신다. 어디에서? 세상에서! 세상은 내 영혼을 빚어가시는 장소다. 자연석 그대로인 나에게 끌과 정을 대어서 나를 다듬과 빚은 다음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한 부분으로 세우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공간이 세상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다.성전은  거룩한 곳이다. 내가 없으면 성전의 한 부분은 비어 있어서 성전이 볼품이 없어집니다.      

 

/솔로몬 성전- 1성전(주전959년 왕상6:1-38)/스룹바벨 성전- 2성전(주전 516년 완공BC.516; 6:15-18)  2 성전은 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확장해 나갔는데, A.D.63년경에 확장 공사를 마쳤다그후 7년이 지난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하여 제 2 성전도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전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나라가 멸망하는 때가 성전이 불타고 파괴되는 때이다. 유대인은 나라 없는 족속으로 온 세상에서 diaspora로서 살다가 1945년에 나라를 재건했다. 현재는 예루살렘 성전 터 위에 무슬림 사원(Dome)이 세워져 있다. 유대인들 가운데 다시 성전을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은밀히 준비하고 있다. 그 성전을 제 3 성전이라고 부른다.

 

/ 1성전-솔로몬 성전은 기초 석(큰 돌/영어로는 coner stone이라고 부름)이 놓이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서 석조 건물로 지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석조 건물이었다. 성전을 지을 때에 성전 건물에 쓰일 돌들은 채석장에서 뜨고  정으로 다듬은 다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 와서 조립식으로 맞추어 넣었다. 성전 구내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왕상6:7<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에 대하여/연합을 강조하는 세가지 비유가 신약에는 나온다: 사도 바울이 말한 지체 비유-12:4-5(연합을 강조, 이 비유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이다, 고전12장의 지체 비유, 1),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인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든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members,들을 가리킨다. 또 다른 연합을 강조하는 비유는 요15:1-7에 등장하는 포도 나무 비유이다. 예수는 포도 나무이고 우리는 포도 나무 가지이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연합에 대한 비유가 하나 더 있다. 성전과 성전돌! 벧전 2:4-8(2:20-22)-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전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구약 성전은 기초석 위에 돌들이 놓여져서 석조 건물을 이루고 있다. 그 기초석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전의 하나 하나의 돌들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택함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고, 우리들은 산 돌 같아서 신령한 집(spiritual house/성전, 상징적인 집)으로 세워진다고 말했다. 돌 하나 하나가 성전을 이루어 가는데 요긴한 돌이다. 그 돌이 없으면 성전이 완공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이 돌들을 얻었는가? 세상에서! 세상 속에서 선택했고, 훈련시켰다. 석수장이가 끌을 가지고 돌을 쪼아서 돌을 준비했고, 그것을 성전에서 조립함으로써 성전을 완공했다. 소리 내지 않고 지어진 성전! 이 세상은 우리들이 성전의 돌이 되게끔 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이 석수쟁이 모양으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쪼아서 성전의 돌 되게끔 합당하게 만들어 가시는 곳이다.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지금 내가 처한 현 상황이 하나님이 나를 빚어 가시는 의도가 있는 자리다! 감사하라! 성전 돌로 쓰시기 위하여 아픔을 참아내라!

 

/성전의 목적이 무엇일까?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이다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무엇인가? 성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성전이다. 교회 건물이 성전이 아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생각는 것은 신학적인 오해다. 신약 시대로 접어 들면서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북박이 성전, 교회 건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하나님이 계신다고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성전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불 필요하다고 스데반이 주장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이런 스데반의 사상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예수께서도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지 않았던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예수 믿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눈에 보이는 건물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비유적으로 기초 석에 두고, 성도들을 하나 하나의 돌로 비유하는 성전 즉 예수의 공동체 가운데 임재하신다) 이런 공동체는 미완성 공동체! 지금도 under  construction! 언제까지?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성전은 계속지어져 간다. 2:20-22<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오늘 이 금요기도회에 모인 이 모임이 무엇이라고요?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우리 주님 예수께서 임재하십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이 건물은 성전이 아니고, 무엇이라고요? 교회 건물일 뿐입니다. 교회 건물을 성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께서 계시고, 예수 믿는 우리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인용한 구약 성경-이사야28:16, 118:22/벧전 2:6절은 사28:16절 인용인데 여기서는 기초석(, 무사드)을 의미하고, 벧전 2:7절은 시118:22절의 인용인데, 이것은 관석(: 로쉬 피나, cap stone)을 가리킨다. 예수를 기초석이라고 할 때에는 coner stone(기초석)을 가리키기도 하며,또한 cap stone(관석, 기둥 위에 두는 돌)을 가리키기도 한다.     

 

 

4. 하나님이 어떤 분일까? 요일1:5<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어둠이 전혀 없는 빛이신 하나님!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은 그냥 상징어일 뿐인가? 문자, 즉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한가? 아니다. 실제적인 빛이다.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실제적인 빛이시다. 지구를 밝게 비추는 것은 태양-별이다.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과 별이 지구를 비추이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빛이다. 영계를 비추이는 빛도 실제적인 빛인데, 그 빛의 근원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영계를 비추이신다딤전6: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우리 하나님이 불멸을 가지고 있고, 또 빛 가운데 거하시는데, 그 빛은 인생이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빛입니다. 왜 가까이 갈 수 없는가? 가까이 가면 불에 타 죽습니다. 벧전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기이한, 놀라운  빛 가운데 있는 분이시다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그 빛, 그 얼굴 빛을 우리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적으로 이 어두움의 인간 세상에 비추이고 계신다이것은 희소식이고 복된 소식입니다. 이 빛이 우리의 심령에 감광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회개가 일어난다. 인간이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 가는 일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빛이 인간의 어두운 심령에 비칠 때에 돌 같이 굳은 심령이 녹아 내리는 것 아닙니까? 돌 같이 단단하고 차가운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부드러워지고, 뜨거워질 수가 있는가? 하늘, 영계로부터 우리 하나님의 얼굴 빛이 둘러 비추일  때에 비로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회개하면서 죄악에서 돌이킨 일이 우리가 가진 장점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9:3-5<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멕섹에 가까이 이르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는 예수라>정오의 태양이 내리 쪼이는 날에 해 보다 더 밝은 빛이 사울에게 비추이었습니다. 사울이 꼬꾸라졌지요. 돌 같은 사울의 심령에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우리 주님 예수의 빛이 비추이었습니다. 그러니 돌 같은 사울의 심령이 녹아 내렸지요. 회개가 일어나지요우리는 다니엘이 이런 기도했던 것을 압니다. 9:17<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지금이 무슨 상황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의 침공으로 불타 버렸습니다. 성전이 노략을 당하고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성전과 예루살렘 성의 회복을 위하여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상황입니다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벨론을 보내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합니다. 무슨 기도를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황폐한 성전 터 위에 주의 얼굴 빛을 비추어 주어서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까그러니 오늘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주여 비추소서! 그 빛을 어디에 켐연장 교회 위에 말입니다. . 그리고 어디에 보스톤 땅 위에 주의 얼굴 빛을 비추어 달라고 말입니다. 청교도들의 순수했던 그 믿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말입니다. 보스톤 땅에 있는 교회들이 무너져서 황폐화 되어 있지 않던가요?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마음에 돌 같은 그들의 심령에 빛을 비추어 달라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한국에 있는 사람이든, 아니면 보스톤에 있는 사람이든, 우리의 친구든지 우리와 원수 관계에 있는 이들이건 간에,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달라고 말입니다. 완고하고 단단한 그들의 마음이 녹아져서 예수를 영접할 수 있게끔 말입니다. 무슬림 땅에도 우리 주님이 빛을 비추어 주시고, 중국 땅에도 빛을 비추어 주시고, 캄보디아 땅에도 주님의 얼굴 빛을 비추어 주소서라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4:6<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구체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이방인들의 이름을 불러 가면서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 빛이 필요하지 않는가? 우리에게도 절실히 우리 주님 예수의 얼굴 빛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심령, 영혼은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18: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 영혼이 비록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 들였지만 여전히 내 심령은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 가지 않습니다. 내가  매일 매일 그 하나님의 빛을 받고 또 받으면 내 심령 구석구석이 밝아 집니다. 우리 지체들 가운데 어떤 형제, 자매는 깊고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때에 우리 하나님이 비추어주시는 그 빛을 보고서 어두움을 떨쳐 버리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지요.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그 어두움이 심령을 덮고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의 얼굴 빛을 더 받아야 합니다. 단 한번으로 그 얼굴 빛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그 빛을 받아야 우리의 흑암 같은 어두움이 걷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한 번 빛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빛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영계에서 심령에 비추이는 강력한 빛입니다. 이 빛을 받으면 회개가 일어나지요. 이 빛을 받고서 깊은 나락에 빠져 있던 우리들이 그 죄에서 돌이켰지요. 그리고 우리 주님의 손을 붙들고 내려 갔던 계단을 되 밟으면서 올라 오고 있지요. 매일 매일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기도에 힘쓰면서 회개 할 때 하나님이 내 눈을 열어서 보게했던 그 빛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내 영혼이 밝아 지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매 금요일 마다 마음을 정하고 내가 회개할 때에 받았던 그 주님의 얼굴 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 속에 있는 어두움이 걷히는 만큼 나는 밝은 생명의 빛 가운데, 영적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면서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8:12<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빛을 영안이 열리면 보이는데, 이 빛을 못 보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회개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곳에는 내가 그 빛을 보지 못했더라도, 누구처럼 바울처럼 말입니다만, 그 빛을 하나님이 내 영혼에 비추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요. 실제로 하나님이 주님의 얼굴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 주님의 얼굴 빛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빛과 진리! 보이지 않는 영계의 그 빛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는 진리라는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인 성경 말씀 속에서 그 영계의 빛을 봅니다. 오늘은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 깨달음이 우리 하나님이 오늘 내게 비추이는 얼굴 빛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받아 들이면 내 영혼의 어두움이 걷히게 되지요. 우리는 말씀 속에 하나님의 얼굴 빛을 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빛을 보고 감광할 수 있는 영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켐연장

2016.04.04 07:55:12

2016년 4월 1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401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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