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27

금요기도회 :2/26/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그 이름 비길 데가 어디 있나

 

 

1.373(고요한 바다로)-요즈음 켐연장에 환난과 풍파와 시련를 겪고 있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본인이 몸이 병들거나 약하여저 힘들어 하시는 분도 있고, 또 자식이 병들어서 그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린 분들도 있고(차라리 내가 병들려 몸이 아픈 것이 낫지 새끼가 병들어 누워 있는 것은 못 보겠지요), 부모가 병들고 약해져서 힘드신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병으로 고생하는 여러 지체들을 보면서 마음이 쓰입니다. 모두 병에서 놓임을 받아서 건강하게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서 광야 생활을 시작할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15: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왜냐하면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이기 때문이니라. 여호와-라파! 의사와 약은 도움을 줄 뿐,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치료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몸의 연약함과 몸의 질병으로 고통하지만,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무슨 소망 말입니까?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풍랑 때문에 뒤로 밀려가서 파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랑 속에서도 안전한 포구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373 2절 가사처럼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늘 포구를 향하여 나아가는 배와 같습니다. 이 배가 순풍을 만나면 그야말로 앞으로 팍팍 나가겠지요. 바다 바람이 배 뒤에서 불어 주면 그야말로 순풍이지요. 순풍에 돛을 달면 배는 앞으로 쭉쭉 나갑니다.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배를 타고 천국향하여 나아가는데 좋은 일만 일어납니다. 순풍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돕고 있다는 표시이지요. 그러나 인생 길 가다가 보면 역풍이 일어나고, 비바람 폭풍우가 우리의 가는 길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배 앞에서부터 맞바람이 배애 불어 닥칩니다. 그 큰 물결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환난과 시련을 가리킵니다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고, 가정에 일어난 우환일 수도 있고, 육신의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온갖 안 좋은 일들, 곧 재난을 가리킵니다. 이런 맞바람이 있다고 하여서 천국을 향하는 우리의 배가 뒤로 밀리는가? 뒤로 안 밀립니다. 2절 가사? 이 풍랑 인하여서도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갑니다. 돛단배가 삼각 돛을 이용하면 앞에서 맞바람이 불어와도 배가 뒤로 밀리는 것이 아니라 배가 앞으로 전진합니다. 물론 지그재그 형태로 배가 나아가지만 앞으로 나아갑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인생의 배도 천국으로 가는 동안 일어나는 폭풍우로 인하여 힘은 들지만 우리의 배는 천국으로 전진해 가고 있습니다. 질병 때문에 이모 저모로 고생하시는 분들, 오히려 이 풍랑 때문에 더 빨리 주님 만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삶이 가장 위험할 때가 바람이 안 불때이다. 성도의 삶에는 순풍이든지 역풍이든지 반드시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그래야 안정적으로 신앙의 항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바람이 안 불면 어떤 일이 일어나나?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안일한 삶을 살 때을 가장 경계 해야 합니다. 보스톤에서 삶이 우리를 영적인 잠에 빠지게 합니다. 보스톤의 육신적인 삶이 얼마나 안일하던가요이 안일함 때문에 하나님을 자꾸만 멀리하게 되지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신앙생활하고 있지요.

 

2.  8:16-17<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난도 함께! 영광도 함께!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할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자들이다. 그런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고난도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야 한다! 고난이라는 것을 모두 싫어 한다.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고난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강과 세상 복이 자동으로 넘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슨 신학이 활개치는가? 번영의 신학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기치아래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너무 많다. 세상일들 잘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으면 신앙은 타락하고 영성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칩니다. 정신 차리십시요. 신앙생활은 세상에서 입신출세하는 일이 신앙 생활의 목표가 아니란 것을 명백하게 아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도 있고 거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결과일 뿐입니다. 신앙생활 잘 했더니 하나님이 그 결과 부와 명예를 주셨다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귀영화를 안 주셔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우리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 엇입니까? 저 영원한 천국을 상속하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땅에 있는 과자 부스러기 주워 먹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눈을 들어 저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라! 저 천국의 영광은 보스톤 다운 타운에 있는 높고 큰 빌딩 모드를  소유한 영광보다 더 하지 않는가? 천국의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무엇을 하라고 명하시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으라! 영광도 그리스도와 함께,고난도 그리스도와 함께!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주님과 함께 고난 받으시길 바랍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는 자들이 아니라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 가운데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위장된 축복이다. 참된 축복은 고난으로 코팅되어 있다. 영의 눈이 뜬 자는 고난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 기꺼이 고난도 받으려 한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십자가로 기독교의 신앙이 끝난다면 믿을 필요 없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기에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어떻게 참았을까? 십자가 저 너머 부활의 세계를 보셨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실 수 있었다. 오 우리 주님,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내 영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기업을 상속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고난 받았지요. 십자가 고난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우리는 접붙임을 받은 자들입니다. 저도 어릴 때 외삼촌이 감나무에 접붙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감나무에 큰 감이 주렁 주렁 달리게 하기 위하여 고욤나무를 사용합니다. 접붙임을 위하여 우선 고욤나무의 밑둥을 잘라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에 좋은 감나무 가지 하나를 끼워 놓고 줄로 칭칭 동여 매어 놓으면 큰 감이 몇해 지나면 열리게 됩니다. 고욤나무가 밑둥부터 잘려 나가지요. 이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좋은 감나무의 가지 하나를 선택하여서 그 가지를 쐐기 모양으로 만듭니다. 왜 쐐기 모양으로 만드는가하면 고욤 나무와 닿는 면적을 넓히기 위하여 그렇게 만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쐐기모양으로 만들기 위하여는 감나무 가지를 칼로 다듬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고욤나무에 쐐기 모양으로 만든 감나무 가지를 끼워 넣으면 접붙임이 끝납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과 이렇게 접붙임되어서 우리 주님의 자양분을 받아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쐐기 모양으로 깎여 나가지 않으면 접붙임, 즉 연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접붙임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현재의 고난과 시련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고난과 시련이 온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우리 주님이  자신과의 연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약간의 시련과 고난을 주었습니다. 이런 의도로 우리 주님이 우리가 현재에 당하는 시련을 주었는데 우리 주님을 원망하시겠습니까? 조금 지나면 그 시련으로 인한 상처도 아물고 우리의 삶에는 무슨 열매가 가득해 지지 않던가요? 성령의 열매가 가득 가득 주렁 주렁 맺히게 됩니다. 나의 현재의 고난은 무엇 때문에? 우리 주님과의 연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15: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            예수께서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이 연합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예수와 우리의 연합은 포도나무와 그의 가지의 연결과 같은 연합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와 연결이 되어 있으면 그냥 열매를 맺게 되고, 떨어져 있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의 실험? 포도 나무를 심어 놓고, 거름을 잘 주고 난 후에 다른 모든 가지는 제거하고 하나만 계속적으로 남겨서 키워 냈더니 포도 나무 줄기 하나가 약 900m 정도 자라났다고 합니다. 900m 끝에 있는 포도 나무 가지에 포도 송이가 맺혔을까요? 예 맺혔습니다. 포도나무는 봄에 나는 새순에서 열매를 맺지요. 오래된 포도나무 줄기에서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교회 생활 한 지 30-40년 된 권사 장로 안수집사들은 새 신자 전도를 잘 못합니다. 예수 믿은지 1 2년된 새신자들이 전도를 잘 하지요. 이것이 포도 나무는 새순에서 포도 송이가 맺는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포도나무 줄기에 아주 가까이 있는 가지를 1mm정도 잘라 놓았습니다. 이 포도 나무 가지에 열매가 맺힐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도 나무와 분리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포도 나무에 가까이 있어도 분리 되어 있으면 열매 맺을 수가 없습니다. 켐연장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더라도 포도 나무와 분리 되어 있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켐연장 교회를 떠나 있는 담을넘은가지들이 있는 그곳에서 열매를 맺고 있지 않습니까? 거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켐연장과 연결되어 있어서 포도 열매를 맺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시간 이 자리에 모인 켐연장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과 연합되어 있습니까? 그것을 무엇으로 아는가? 내 삶에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로 알 수 있다. 그냥 우리 주님과 연합된 채로 있기만 하면 소담한 포도 송이를 맺는다. 못 맺고 있다면 연합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여러분이 주 안에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내 안에 있는 지를 점검하기를 바랍니다. 포도 나무에서 분리된 가지는 죽은 가지이고 죽은 가지에는 포도송이가 달리지 않는다. 열심히 교회는 나오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예수의 형상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 3:2-3<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여기서 그는 누구일까요?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메시야가 불과 잿물을 사용하여서 자기의 백성을 정화시켜 나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예언자는 주전 4-5세기 어간의 예언자이지요. 말라기가 말하는 그는 메시야를 가리키는데, 메시야는 우리 주님 예수님을 가리키지요. 우리 주님이 무엇처럼 임하시는가? 마치 금.은을 제련하는 제련사처럼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시는 이유는 우리를 연단하여서 우리를 순금, 순은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시대에 은과 금을 어떻게 제련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옛시대에는 금광석이나 은광석을 탄광에서 채굴하여서 잘게 쪼갭니다. 그리고는 그릇에 담아서 불을 붙입니다. 활활 불이 타오릅니다. 그러면 찌꺼기는 먼저 날아가 버리고 순은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불순물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순은이 99.99%이상이 되었음을 어떻게 알 것인가? 요즈음이야 계측기가 있으니 그것을 보고서 불을 끄면 되지만, 예전에는 계측기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순은이 되었음을 어떻게 알까요? 만약 순은이 이미 축출 되었는데 계속 불을 지피면 순은 마져도 모두 날아가 버리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순은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은 제련업자는 불이 붙어 있는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옆에 꼭지키고 앉아 있다가 남아 있는 순은에서 자기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면 불을 끕니다. 순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믿음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시련의 불을 붙였습니다. 모든 찌꺼기가 날아 가버립니다. 우리 주님은 시련을 겪고 있는 우리 곁을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들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그 시련의 불을 통하여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만들어져 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의 형상! 우리 주님이 우리 속에서 선명한 예수의 형상을 보시면 그 시련의 불을 끄십니다. 아직도 나는 시련 중에 있다는 분들은 빨리 빨리 선명한 예수의 형상을 이루어 가십시요. 어물 어물 거리지 마십시요. 그러면 그럴수록 고난의 시간은 길어집니다. 빨리 깨닫고 예수의 형상을 이루십시요. 그러면 머지 않아 시련의 불은 꺼집니다. 자동으로 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예수의 형상이 세상과 혼잡하게 섞여 있어서 거무틱틱한 모습이 아니던가요? 예수의 형상은 선명합니다. 깨끗합니다. 우리가 그런 선명한 예수의 형상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과 탐욕이 말입니다. 회개하라! 내가 당하고 있는 현재의 이 시련은 내 속의 예수의 형상을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액션임을 잊지 마십시요.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의 형상은 영원한 세계에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적어도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때에 빈손은 아니지요. 그러니 감사해야 하지요. 나는 천국에 들어갈 때에 빈털터리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참 부요한 자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십자가의 우편 강도가 아니라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자로서 들어가게 됩니다.

 

/4:13-14<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모래는 바람에 날리나, 물 속에 잠긴 모래는 바람에 날리지 않는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물 속에 잠긴 모래와 같은 사람입니다.예수를 믿으면서도 진리를 알지 못한 채로 사는 성도들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온갖 세상 잡다한 교훈을 받아 들여서 혼잡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신앙이 다른 신앙과 섞여 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무아미 타불주지 목사님 계십니까? 예수를 바로 알고 믿고 신앙생활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를 잘 알지 못한다. ? 성경을 안 읽기 때문이다. 성경이 누구를 증언하는가?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에 대하여 증언하였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가 하신 말씀과 사역들이 증언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그 성경을 열어 놓고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일자무식 성도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를 영으로 만난 성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진리를 깨달아서 우리의 구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 예수가 누구인지는 알기는 아는데 믿음을 섞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를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믿음이 더하여져야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불완전한 신앙 인격이 됩니다. 우리들이 사실 오랬동안 신앙생활 해 왔기에 들은 소리가 많아서 예수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은 크지만 그러나 믿는 부분은 아주 적습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성장한 성도가 되지 못했다는말입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믿는 부분은 적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속에 잠겨 있는 모래가 되지 않으렵니까? 23: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왜 내 삶에 부족함이 있고, 공허함이 있어서 영적으로 헐떡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충만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 기쁨은 모두 어디로 가버리고 나는 내 심령의 메마름을 경험하면서 텅비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는가? 이 문제는 무엇이라고요? 예수님을 나의 목자라고 알고는 있지만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목자가 되기 때문에 나의 삶의 전부를 맡기고 살아야 하는데믿지 않는데 맡겨 지나요? 내 삶이 얼마나 내게는 소중한데, 내가 신뢰하지 않는 목자에게 맡깁니까? 내 생명과 내 영혼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인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목자라고 알기에 이해는 하는데,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기쁨도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심령에 뭔가 부족함을 느끼면서 헐떡 거리는 것이지요

 

/당신은 예수를 아는 지식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일치되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런 신앙 인격을 만들기 위하여 기도하러 나왔습니.. 이렇게 지식과 믿음이 일치된 사람이 장성한 사람입니다. 지식은 크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에 비하여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영적으로 어린아이라고 부르지요. 당신은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입니까?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우리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자라지 못한 애기는 엄마의 품에 안겨서 갈 뿐입니다. 그러나 자라난 장성한 아들은 엄마와 함께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걷고 싶으십니까? 당신의 인생 여정 끝내어서 하늘 나라 이를 때까지 우리 주님과 동행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켐연장

2016.02.28 20:27:17

2016년 2월 26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226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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