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26

금요기도회 :2/19/2016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복음송: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273<나주를 멀리 떠났다>

 

 

1.흔히 승리를 표현할 때 영어로 승리(victory)를 뜻하는 글자의 첫 문자 ‘V’를 두 손가락으로 만들어 보인다. 예수는 나의 승리!   14:6절에서 예수님은 Via()이시다. Veritas(진리)이시다. Vita(생명)이시다. 라틴어로 길을 ‘비아’(Via), 진리를 ‘베리타스’(Veritas), 생명을 ‘비타’(Vita)라고 하는데, 첫 문자가 모두 ‘V’자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3V’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는 예수를 승리하신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주님의 선포? 세상을 이기었다! 이길 것이다라는 미래 시제가 아니라 완료시제입니다. I have overcome  the world! 우리 주님이 싸우시게 될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승리의 판결은 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루밤 자고 나면 내일 있게 될 십자가사건 앞에 서서 결정적으로 이미 자신이 승리했다고 선포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 말은 우리들이 매일 매일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도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싸움에서 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 없이 싸우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 주님이 이겨 놓았기에 우리도 싸움에서 반드시 이깁니다. 이런 싸움을 무슨 싸움이라고 부릅니까? 스파링! 마귀는 우리의 스파링 상대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사탄,마귀가 우리의 삶에 환난과 시련을 가져다 줍니다. 그 환난과 시련을 사탄마귀가 우리에게 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게 할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마치 누구에게 처럼 말입니까? 욥에게 있었던 고난처럼 말입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환난과 시련 뒤에 있는 사탄마귀를 인식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쫄지 말고 담대하게 말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대항해야 하지요. 1:18-19절 말씀<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가 40년 동안 눈물의 선지자로 예언활동을 했지요. 대적들이 예레미야를 공격했지만, 예레미야는 이겼지요. 대적들이 누구입니까? 유다의 왕들이고, 그 땅의 지도자들이고, 제사장들이 아니었던가요? 온 사방에 대적들이 달려 들었지만 예레미야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온 세상이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우리는 승리합니다.

 

/우리 교회의 두번째 기도 제목? <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교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를 당할 자가 세상에는 없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간구이지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 마느냐는 어디에 달려 있습니까? 그 일을 하면 성공할 것 같은 가능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 가운데 주님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일 가운데 우리 주님이 계시면 묻지 말고 착수하고, 그 일이 아무리 우리 눈에 선하게 보이고 성공할 가능성이 있어도 우리 주님이 그 일 가운데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서 주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겠지요. 이런 기도가 영적인 기도입니다. 주여, 내 영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우리 주님이 그 일 가운데 계심을 보았다면 그 다음에 간구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주의 일이니 반드시 사탄은 방해를 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탄의 방해를 좇아 버리기 위하여 우리는 권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권세가 무엇이라고요? 철장권세! 2:9<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철장은 쇠막대기입니다. 쇠막대기로 진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을 부수는 일은 얼마나 쉽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미 철장 권세가 우리의 손에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권세입니다. 28: 우리는 이 권세를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2. 절대 신앙을 갖자! 절대 신앙이란? 상황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말씀하셨기에 하나님이 능히 이루신다고 믿는 것이 절대 신앙입니다. 나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 주님이 원하신다면 그것을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이 무슨 믿음이라고요? 절대 믿음! 누구에게서 우리는 이런 신앙을 볼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4: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바랐던 것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후손이 태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래 전에 약속했던 일이지요. 그련데 아브라함의 나이가 이 때가 언제입니까? 100! 사라의 나이는 90세입니다. 4: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 자기가 처하여 있는 상황을 보면 결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어찌 100세나 된 할아버지가 그리고 90세가 된 할머니 사이에 애기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몸에서 애기가 태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언제요? 사라가 나이가 89살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두명의 천사들을 대동하고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가는 길에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장막에 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만났지요. 그리고 융숭한 대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은 후에 사라에게 애기를 주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지요. 이런 이야기를 사라가 내실에서 엿듣고서 피식거리면서 웃었습니다. 피식 웃는 바람에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이 웃음을 뜻하는 이삭으로 지어지게 되었지요. 89세가 된 노파를 할망구라고 부릅니다. 할망구는 바랄 망자에다가 구는 90을 뜻하지요. 그러니 할망구는 90을 바라보는 89살의 노인을 가리킵니다. 할망구는 결코 비속어,통속적으로 쓰는 저속한 말이 아닙니다. 사라는 수태 고지를 하나님으로부터 들었을 때에 나이가 89, 즉 할망구였습니다. 1년간의 기한이 차서 90이 되어서 이삭을 순산했지요.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요약한다면, 신약 성경은 결혼 안한 처녀인 동정녀가 애 낳는 이야기이고, 구약은 나이가 90이 된 할망구가 애 낳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구원사가 바로 이 두 여인의 출산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모두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하나는 남자 없이도 처녀가 애를 낳는 것이고 하나는 90난 할머니가 애 낳은 이야기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에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그만 웃기십시요라고 말했나요? 아니지요. 믿었습니다.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4:20-21<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나이가 100세가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가졌다고요? 절대 믿음을 가졌습니다. 상황을 바라보니 결코 약속이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어떤 믿음이라고요? 절대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큰 믿음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 났나요? 아니지요. 믿음은 자라납니다.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자라나지요. 창세기 12 1-4절까지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그들에게)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 하는 자에게는 내가 (그들을)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갈대아 우리에서 아브라함이 월신 숭배자들과 함께 살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너가 만약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7개의 축복을 부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7가지가 무엇이지요?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 복을 준다,네 이름이 크게 된다,복이 된다,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한다,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한다,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 이상의 7가지 축복 말입니다. 얼마나 맘에 와 닿는 축복입니까? 아브라함은 이 7가지의 축복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무엇일까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75살이나 되었고, 사라는 65살이나 되었는데 무엇이 없습니까? 자식이 없어요! 요즈음은 무자식이 상팔자다라는 말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옛날 구약 시대에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솔깃한 하나님의 약속이고 축복입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무엇을 합니까? 이에 아브라함이 온 가족과 종들과 가축떼를 대동하고서 약속의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75세나 되는 노인이 머나먼 길을 떠나서 이주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순종했는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달콤한 축복을 말입니다. 이런 믿음을 무슨 믿음이라고 합니까? 아멘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에 아멘 하면서 그 약속을 마음에 받아 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제 이런 아멘의 신앙을 가졌나요?75세 때입니다. 2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라는 불임이었습니다. 25년 정도 지나면 후사를 보는 일은 포기할 만 하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루신다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절대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25년간의 긴긴 기다림 속에서 아멘의 신앙은 무엇으로 절대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25년간의 긴긴 기다림은 그리 순탄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넘어질 때도 있었고, 일어날 때도 있었습니다.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 거릴 때도 있었고, 다시 높은 곳에 서기도 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자식이 늦어지자, 롯을 후사로 세우려고 했었고, 또 자기 집에서 길리운 신실한 종인 엘리에셀을 후사로 세우려고 했었고, 또 사라의 생각이지만, 애굽의 여인인 하갈을 첩으로 주어서 이스마엘을 후사로 세우려고 했었지요. 모두 하나님께서 거부하셨고,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후사가 될 것을 말씀하셨지요. 그런 과정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멘의 신앙에서 절대 신앙으로 자라나게 되는 축복을 얻었지요. 하나님께서 그냥 아브라함에게 75세때 순종하였으니 곧 바로 이삭을 주었더라면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라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절대 믿음은 이런 시련과 역경을 통하여 자라나게 됩니다

누구의 믿음 때문에 이삭이 세상에 나왔는가? 아브라함인가 아니면 사라인가? 11:11-12<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여기에서는 잉태할 수 있는 힘, 즉 생산하는 힘은 관용구로 사용이 되었는데, 여성에 대하여 쓰는관용구가 아니라 남성에 대하여 쓰는 관용구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았지만, 자식을 생산하는 힘을 얻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믿음으로 아브라함도, 단산한 사라와 함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누구의 믿음 때문에 이삭이 사라에게서 태어납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던가요? 아브라함의 절대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는 사라가 아니고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을 인생이 없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이룰 수 있는 인생이 없다. 우리 교회의 두번째 기도 제목이 바로 이것이 잖습니까? 첫 번째가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8복중 첫번째! 우리 교회의 지체들은 모두 천국을 소유한 자로서 한 세상을 살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이 있으면 무슨 일도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교회즉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막을 인생이 없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의 약속은 택한 백성의 연약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폐기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25년간의 긴긴 기다림 끝에 이루셨고, 아브라함은 그 긴긴 기다림 속에서 그의 믿음이 절대 믿음으로 자라났습니다. 성도들이 땅 위에서 살아 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절대 믿음을 따라서 살아 가야 합니다. 이 절대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두라 평지에 세워 둔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무불에 던져질 형벌을 느브갓네살로부터 받았습니다. 느브갓네살이 이 젊은 세 청년을 아꼈습니다그리고 회유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좋으니 마음을 바꾸어서 금신상에게 절하면 용서하겠노라고 말입니다. 느부갓 네살 임금에게 세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3:17-18<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왕이 화가 나서 풀무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맹렬히 불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 넣었지만, 머리터럭 하나 그슬르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가진 믿음이 어떤 믿음이라고요? 절대 믿음입니다풀무불 가운데서도 전혀 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풀무불 가운데서도 살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 절대 믿음을 통하여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지요. 이런 세청년의 믿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은 믿음입니다. 11: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 직전 컨텍스트를 보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였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일도 당했고,돌에 맞고, 톱으로 켜서 죽고, 칼에 죽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나 결코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지 않은 인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다. 세상이 감당 못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그런 믿음의 사람을 담아 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보다 큰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구름에 달 가듯이 표표히 한 세상 살다가 세상을 떠나야 겠지요세상 가운데 살아 가지만,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고후1:8-10<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사도 바울 일행이 선교단을 이루어서  선교에 힘쓸  때에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극심했습니다. 심각한 고난 속에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연속적인 고난 속에서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죽을 위기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했더니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구원 체험들이 쌓여 가면서 믿음은 절대 믿음으로 바뀌어 갑니다. 절대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자꾸 커져 갑니다. 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Impossible이라는 단어에서 첫 글자 I와 두 번째 글자 m사이에 어퍼스트로피가 하나 찍히면 Impossible I’m possible로 바뀝니다. 나의 삶에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에 우리 주님이 들어 오시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뀝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던 불가능에 어퍼스트로피인 우리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나는 불가능하나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해 진다는 신앙 고백은 절대 믿음 속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합시다. 어디에서 말입니까? 우리들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해야 겠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세아 예언자가 그렇게도 강조해서 말했던 그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지요. 신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었는데, 정작 속을 까보니 그들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몰라도 그렇게 모를 수가 없었거든요.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소와 양을 끌고 와서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 백성이 주전 722년에 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를 망국 직전에 보내서 하나님을 알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알고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지 않느냐 말입니다. 예배 드리는 이 현장에서 예수-체험을 여러분은 하고 있습니까? 예배 드리면서 예수 체험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죽은 예배입니다. 요한 복음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에수-생명이 강같이 흐르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 4: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오늘 이 예배의 자리는 우리 주님 예수를 새롭게 체험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고 체험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에수께서 이 예배의 자리에 충만하게 임하여 계십니다. 불당에는 부처님이 충만하게 임재하듯이 이곳 교회에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 충만하게 임하여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도 성령께서 우리 주님을 체험케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다시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충만하게 덧 대어 주시길 소망합니다. 이 자리는 우리 주님 예수를 영과 영으로 만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몰랐던 우리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체험 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 주님, 예수를 새롭게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 성령이여 오소서! 충만하게 내게 임하소서! 내가 체험한 만큼 세상에 우리 주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절대 믿음으로 세상에 우리 주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믿음을 훈련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새로운 하나님 체험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켐연장

2016.02.23 08:09:04

2016년 2월 19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219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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