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25

금요기도회 :2/12/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1. 무엇이 영원한가? 우리 손에 가지고 있는 물질, 부와 명예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명백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이런 세상 것들이 인생의 전부인양 이것들을 얻기 위하여 아둥바둥 거리면서 살아 가고 있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는 인생의 표면적인 것들입니다. 살아 가는 동안 필요한 것들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시야가 넓지 않아서, 지금 뿐만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까지도 영원히 있을 것에 대하여는 추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영원한가? 하나님이 영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영원합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가졌고, 그리고 영원한 말씀, 즉 약속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무엇이 영원합니까?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말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영원한가?  예수 믿고 변화된 나의 모습, 그것은 영원합니다. 예수 믿고 나서 매일 매일 예수 닮아 가면서 내 성품도 인격도 바뀝니다. 이렇게 변화된 나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저 하늘 세계에 들어가서도 남아 있습니다.  내가 이룬 업적이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내 모습이 영원히 남습니다. 일과 업적이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인물이 되었느냐가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 설교 본문인 고후 3: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순종하여 살다가 보면 우리의 형상이 바뀌어 갑니다. 점진적으로 서서히 우리는 예수를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바뀐 형상은 영원히 없어 지지 않습니다.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동안 예수 믿고 변화된 인격,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성화되어 가고 있는 인격이라고 부릅니다만, 이것은 영원세계에 우리들이 가지고 들어갑니다. 내가 이 땅 위에서 이룬 업적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업적을 이룻는 동안 나의 변화된 모습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당신의 지금 영적인 성장, 영혼의 모습은 얼마만큼 예수를 닮은 장성한 영혼입니까?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예수 믿는 생활에 기쁨이 커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천국에 들어가서 더욱 큰 기쁨을 만끽하면서 영원히 살고 싶다면 이 땅에서 영적으로 크게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을 훈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고 순종하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순종하려고 하는데 잘 안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금요일마다 모여서 발버둥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순종할 수 있는 힘이 하늘로부터 임합니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둘씩 훈련해 나가면 나중에는 큰 것도 순종하게 되지요.

            인생들은 마치 소금 쟁이 벌레와 같습니다. 소금쟁이 벌레는 비가 온다음에 웅덩이 물 표면을 미끄러지듯이 달리는 벌레입니다. 이 벌레는 깊은 물이 필요없습니다. 물 표면만 있으면 됩니다. 얕은 물이라도 물 표면만 있으면 OK!  표면적인 인생을 사는 분들은 돈돈 거리면서 살지요. 돈을 준다면 영혼도 마귀에게 팔아 버리지요. 소금쟁이 벌레처럼 살지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면서 사십시요. 인생 살이의 지혜? 두 발은 땅에 굳건하게 디디고 서 있지만, 얼굴과 눈은 하늘을 향하여 들 수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3:1-2<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고 살고 있는가? 해변가에서 조개 껍대기 주으면서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저 깊은 대양으로 노저어 나가기를 원하는가? 

 

2. .진리.생명/1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모두 정관사가 붙어 있지요.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 이것을 히브리식 표현을 하면 예수는 진리와 생명의 길이 되지요. 즉 예수는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해 왔지요. 그러나 성경은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는 없는데,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께 이르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유일무이한 하늘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는 여러 진리 가운데 하나의 진리가 아니고 예수는 절대 진리이고, 예수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이 아니고 절대 길입니다. 자꾸 인간의 지성은 예수를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다원주의, pluralism의 입장에 서서 예수를 바라보고 싶어하는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최근에 예일 신학대학의 모교수가 무슬림의 하나님 알라나 기독교의 하나님 여호와가  같은 분이라는 말을 하면서 심각하게 우리의 신앙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망발! 그런 사상은 다원주의에서 나온 예수 이해이기에 무시해도 좋습니다. 그래도 신학대학교수가 한 이야기라고 경청할 필요가 있다는 분들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요. 최근에 또 시카고에 있는 휘튼 칼리지의 정치학 교수인 호킨스라는 여교수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지난 12월 강림절 기간에 히잡을 쓰겠다고 선언해서 대학 측과 마찰이 일어나서 교수직을 사임하게 되었지요. 휘튼 칼리지 같은 기독교 대학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니 말입니다. 예수를 영과 영으로 만나지 못하면 이런 사람들처럼 정신 나간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를 영과영으로 만나면 예수로 인한 절대 구원을 믿게 되지요.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어떻게 부처님 뒤에 계신 분과 십자가 뒤에 계신 분이 같은가? 엄연히 다른데, 종교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분들의 눈에는 같게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 불당에는 불심이 가득한 것이고, 교회 안에는 무엇이 가득한가? 예수가 충만히 거하신다. 아멘! 예수와 석존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는가?  죽음 저 너머의 세계에서는 예수가 계신 곳과 석존이 있는 데는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 예수의 말씀입니다. 알라신을 섬기는 이들이나, 부처님을 섬기는 이들은 예수가 있는 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처소가 예비되면 너희를 데리러 오리라.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 예수의 입의 말씀입니다.

 

3.지난 주에 우리는 므낫세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므낫세가 50년간 곁길로 나갔지만, 죽기 몇 해 전에 회개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회에 부흥이 일어났었지요. 바알과 아세라 섬기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온 것은 므낫세의 통회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사에 있어서 부흥이 있는 현장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다고요? 죄고백이 있고, 회개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우리는 모세 시대에 있었던 회개 운동을 살펴봅시다. 32-33장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본문으로 32:30-35까지 읽습니다.

 

/30절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말?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죄를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큰 죄란 무엇입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경배하고 섬겼던 일이지요. 금송아지를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금 장신구를 모아서 그것을 녹여서 아론이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를 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공표하고 그 앞에서 제단을 쌓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뛰놀았습니다. 이 금송아지는 이스라엘이 4백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면서 애굽에서 보았던 우상들이 참으로 많았은데 그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대단히 친숙한 형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섬길 목적으로 만들었지요. 십계명 중 제 2계명 위반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기는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했다는 말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에게 절하면서 섬기지 말라고 제 2계명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죄는 이스라엘이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서 가아난 땅에 들어가서 늘상 짓던 죄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은 언제나 형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그런 생각에 동화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을 육신의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한 죄는 큰 죄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으로 표현 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영은 육신적인 모양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영적인 어두움은 자꾸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하지요. 

 

/모세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했던 일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지적했습니다. 32:30절 상반절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모세가 에둘러 말했나요? 아니지요? 직설적으로 정곡을 콕 찔렀습니다. 교회 강단은 이런 죄에 대하여 강한 톤으로 지적해야 합니다. 죄악을 부드럽게 합리화하여서 슬쩍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통렬한 아품과 수치가 일어날 정도로 죄악을 지적해야 합니다. 이런 설교를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예언적 설교! 안면을 접고서 무안할 정도로 강력하게 지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기를 촉구해야 합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는 너무나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나요. 아니면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까봐 두렵고 무서워서 말입니다. 그저 아픈데를 잘 어루만져 주어서 위로해 주는 설교가 최고라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마사지가 아니라 무엇이라고요? 메시지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메스를 가지고 병든 곳을 오려내고 잘라내는 도구입니다. 그러니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행사가 나쁘다고 지적해야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두려움 없이 임금 의 죄악을 강하게 지적할 때가 있는 가 하면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사회의 어두움을 지적하면서 회개하기를 촉구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인 멸망이 찾아 오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위기 상황인데, 지도자들은 갈팡 질팡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요청했지요. 58:1<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알리라> 멸망,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기에 심령이 다시 살아 나는 부흥이 임하기 위해서는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회개에로 초청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강단이 책임져야 할 몫입니다. 싸매고 치유하는 일이 먼저가 아니라 먼저 우리들이 지은 죄가 빛 가운데 드러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내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성도들이 짓는 윤리적.도덕적인 죄악들도 강력하게 지적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지 못하는 부분들을 지적하고 바로 세우는 일이 일어나야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윤리적, 도덕적인 일탈은 바로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약병에 독약을 넣어 두었습니다. 약병에 붉은 글씨로 무엇이라고 써야 합니까?  Danger! 위험이라는 데인저를 써 놓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해골바가지와 뼈를 교차해 놓은 그림을 넣어놓았습니다.  그러면 그 약을 먹지 않게 되지요. Danger위험을 단거, sweetness로 읽어서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죽습니다. 성경과 강단은 부단히 세상을 향하여 죄악을 지적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한 다음에 모세가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환부를 잘라 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불러 모습니다. 26절에 레위인들이 모두 모세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에게 칼을 차고 가서 우상숭배하는무리들을 모조리 처단하라고 명합니다. 그날에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레위인들의 칼에 죽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이웃이 자기의 이웃을 칼로 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우상숭배의 죄악을 근절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믿음이 순결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환부를 모조리 제거한 다음에 모세가 하나님께로 다시 올라가지요.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살려 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30절 후반절에 보면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속죄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받았던 십계명의 두 돌판은 어떻게 되었나요? 모세가 시내산을 내려 오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송아지 앞에서 제사드리고 뛰노는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서 그것을 산 아래로 던저셔 깨뜨려 버렸지요. 왜 모세가 그렇게도 소중한 언약의 두 돌판을 깨뜨려 버렸을까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계약이고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서 돌판에 기록해 주신 건데 말입니다. 만약 이 계약을 살아 있게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이 계약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잘 지키면 하나님은 저들의 아버지가 되어서  저들을 지켜 줄 것이고, 잘 안 지키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모두 죽게 됩니다. 이것이 이 계약의 골자입니다. 그러니 그 계약을 모세가 깨뜨려 없애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다면 이스라엘은 모두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3천명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6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두 돌판을 산아래로 던져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계약이 무산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도 요즈음 아파트나, 자동차나 집이나 이런 것을 계약할 때에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그런데 그 계약을 취소할 경우에는 사인한 계약서를 찢어 버리면 계약이 무효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분노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게 되는 하나님과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서둘러서 언약의 두 돌판을 파기해 버렸지요.

 

/하나님 앞에 선 모세의 중보기도?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하였음을 자백했습니다. 죄고백! 회개에 대한 묘사 중에서 전형적인 표현이지요:우리가 죄를 지었나이다 혹은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죄를 고백할 때에 화려한 수식어 필요 없습니다. 비록 투박할 지라도 진솔하게 우리의 마음을 주님 앞에 표현하면 됩니다. 모세의 말: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나이다.모세의 중보기도이지요! 우리들이 매일 매일 짓는 죄를 무슨 죄라 부릅니까? 자범죄! 이런 자범죄는 하나님께 자백해야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짓는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모두 용서해 놓았습니다. 이 진리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우리 하나님의 용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가 지은 죄를 고백해야만 됩니다. 그냥 우리의 죄를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묻어 놓아서는 결코 우리가 죄에서 자유로와지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놓았지만, 그러나 죄의 권세가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여전히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죄를 인식하고 그리고 주께 자백한 후에 비로서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집니다.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호모+로게오=같은 말을 하다.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가 지은 죄를 알고 계시지요. 우리 하나님이 보고 알고 있는 그 죄를 우리가 지었다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호모 로게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어떤 간청? 32절에는 그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 죄사함의 요청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그 다음에 자백된 죄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이 용서해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실 요량이라면 어떻게 해 달라? 내 이름을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지워버려 달라! 주께서 기록하신 책이란? 생명책을 가리킵니다. 생명책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책인데, 그 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곳곳에 이 책이 소개되어 있고, 또한 신약 성경에도 곳곳마다 생명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명책에 당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가? 어떻게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확신하는가? 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확신이 드는가? 그러면 당신의 이름은 확실하게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은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어떻게 이런 간구를 할 수 있을까? 이런 기도가 말이 되는 간구인가?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는 간구는 무슨 소리인가? 오늘 우리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옥에 보내도 좋다는 말이 아닌가?  이 백성들이 지은 죄를 사하시든가? 아니면 나를 지옥에 보내든가? 둘 중에 하나를 하라고 하나님을 모세가 욱박지르고 있습니다. 내가 지옥에 들어가도 좋을 만큼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있을까? 모세에게는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을 자신이 버림 받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정도로?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숭배한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을 지옥에 보내는데, 그렇다면 자신만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지옥에 가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지 않으실 요량이라면 나를 지옥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보내라는 간구는 빼어난 의인들만이 할 수 있는 간구입니다. 당신은 이런 간구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무슨 일을 희생해서라도 천국 들어가기를 소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동포와 나의 이웃이 지옥에 가 있다고 하여서 내가 천국을 버리고 지옥에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간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도 그랬거든요. 사도 바울도 롬9: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의인의 눈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지옥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이지요. 그정도로 원함이 크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인의 간구를 글자 그대로 받아 들여서 하나님이 바울이나 모세를 지옥에 보낼까요? 네가 원하는 것이니 지옥가라하지 않지요. 하나님은 바울이나 모세가 이런 요청하는 말 뒤에 있는 깊은 백성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헤아려 아시지요. 모세의 요청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가 풀리지요. 모세의 간구를 듣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누그러졌나요? 34절에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렸다는 말이지요.  진노가 다 풀렸다는 것은 아니지요.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내가 올라가다가 너희가 또 불순종하면 너희를 모두 진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자를 하나 보내서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이겠다고 약속하지요.

 

/이 일 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백성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약속한 천사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33 12절 이하에서 다시 하나님께 요청하지요. 금 송아지를 섬기다가 죽을 뻔 한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는 모세의 간청을 하나님이 가납하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나요? 14절에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내가 친히 간다=내 얼굴이 간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너와 같이 간다는 의미이지요. 사자만 달랑 보내겠다는 이전의 약속보다 더한 것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와 같이 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마음을 쉬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도 목이 곧아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 안고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16절에는 모세가 여호와께 우리와 함께 행하여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것도 하나님이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17절에 네가 말하는 이일도 내가 하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가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의 함께 행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오셔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사건이지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누구든지 예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기도는 우리의 안식이라는 점! 기도가 우리의 도피처가 아니라 무엇이라고요? 안식처! 도피처는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과 스트레스를 당하면 포장마차에 들러서 술을 한잔 걸칩니다.술이 무엇입니까? 도피처입니다. 술은 안식처가 아니지요.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술로 달랩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해소 되나요? 안되지요. ? 도피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처는 다릅니다. 안식처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서 넉넉하게 고난과 시련과 스트레스를 이기에 해 줍니다. 기도는 우리의 도피처가 아니고 무엇이라고요?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오늘 우리는 이 기도의 자리가 우리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나면 평안함이 임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선물이지요. 내 눈물과 아픔과 괴롬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평강을 부어 주십니다. 평강이 무엇이라고요? 하나님께서 너의 기도를 내가 받았다라는 표시입니다. 기도를 밤새도록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부르지어 기도했는데도 심령이 평안하지 않다고 한다면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5분 기도했는데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평강이 임하였다면 더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은 내 속에서 솟아난 평강이 아니라,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의 평강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우리들에게 내가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

 

/옛날 십수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인디안 호피 부족에게 처음으로 단기 선교를 가려고 하던 때의 일입니다. 거의 7년 가까이 매년 아리조나에 있는 인디안 보호 구역에 단기 선교팀을 꾸려서 갔습니다. 인디안 호피 부족을 섬기고 있던 장두훈 목사와 연결되어서 모든 계획을 잡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호피 부족에 거주하면서 선교하고 있던 장두훈 선교사가 자동차 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지요. 그래서 단기 선교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교회로서는 고민이 깊었습니다. 우리를 초청하는 장두훈 목사도 없고, 참 난감하지요. 인디언 부족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 건물을 빌려서 쓸수 있을 지도 불투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봄 고난 절 기간에 이 문제 때문에 금식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금식 마지막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근심하고 있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평강을 부어 주십디다. 그런 평강은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평강이 없어지지 않습디다. 그렇다고 하여서 호피 부족들에게서 좋은 소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교회의 예배당을 쓸 수 있게끔 해 주겠다는 연락이 온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지만,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임한 평강은 사라지지 않습디다. 이런 평강이 주 예수의 평강입니다. 그래서 몇 달 지난 뒤에 호피 부족에게로 단기선교 팀을 꾸려서 갔지요. 가 보았더니 상황이 그리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예배당을 써도 된다는 허락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야영했습니다. 토요일날 도착해서 토요일 밤을 야영했지요. 텐트 속에서 하나님, 그날 금식하면서 내가 너를 쉬게하리라 하시던 그 약속이 이것입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내일 주일부터는 예배당에서 먹고 자게 되리라는 확신을 부어 주십디다. 그래서 주일날 에배를 드린 후에 예배당을 써도 된다는 허락이 났지요. 중간에 통역하는 분이 또 말을 잘못 알아 듣고 주일 밤만 교회에 머물고 나머지 날들은 밖에서 텐트치고 자야한다는 말을 해 주어서 적잖이 실망이 모두들에게 컸는데, 그것은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잘못 알아 들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내내 현대식 건물인 예배당에서 먹고 자면서 인디안 호피 부족 단기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가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너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는 것을 평안을 통하여 주셨기 때문이지요. 오늘 이 밤에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이런 평강을 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 제목에 대하여 기도할 때에 주 예수의 평강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쉼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켐연장

2016.02.14 23:53:09

2016년 2월 12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212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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