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64

금요기도회 :1/6/2017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214장 


1. 올해의 표어:주제는 회복입니다. 교회의 영성과 가정의 회복! 우리 켐연장 교회의 전체 영성 회복 뿐만 아니라 뉴잉글랜드 지역 교회의 영성과 우리 조국 교회의 영성과 온 세계 교회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하고, 또한 예수 믿는 이들의 각 가정의 회복이 있기를 바라는 한 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영성 회복에 집중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매년 송구 영신 예배 때 마다 <올해의 말씀>으로 설교를 했다. 송구 영신 예배 때 주신 말씀은 한 해 동안 우리들의 마음에 담아 두고 늘 실천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전도 12:11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과 같다고 했나요? 채찍과 같고 못과 같다고 했습니다. 채찍은 소를 뒤에서 몰고 갈 때에 엉뚱한 데로 가면 채찍으로 때려서 바른 길로 가게 하지요. 또 잘 박힌 못과 같다. 무엇이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말입니다. 벽에 무엇을 걸어 놓으려고 하면 목을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건을 걸어 둡니다. 만약에 못이 든든하게 박혀 있지 않으면 무거운 물건을 걸어 놓으면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벽에 못을 단단하게 고정을 해야 걸어 놓은 물건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벽에 단단히 박힌 못과 같아서 켐연장 교회가 <올해의 말씀>에 단단히 걸려 있기를 바랍니다. 


올해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단단히 박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의 일생 동안 살면서 어떤 말씀 위에 당신의 믿음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의 삶은 말씀에 견고하고 붙들려 있을 것입니다. 미국 아파트의 집의 벽에 못 박는 것 같아서는 안되겠지요. 아파트의 벽에 못은 장도리가 필요 없습니다. 엄지 손가락으로도 못을 벽에 박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무거운 것을 걸어 놓으면 금새 땅 바닥에 떨어져서 깨지지요. 얼마나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말씀들이 많나요? 비근한 예로 요1: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마6:33절<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요3: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행4: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당신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당신의 믿음과 삶을 어떤 말씀에 걸어 두었는가? 오늘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없는데요 하면 안되지요. 그러면 내 삶에 시련과 고난의 풍랑이 밀어 닥치면 부평초처럼 되어서 바람과 풍랑에 흔들려서 내 신앙과 삶이 망가지게 됩니다. 


/2017년도 한 해 동안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은 말 4:4-6절<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올해의표어: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소생케 하시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키게 하소서! 우선 4절에는 호렙이라는 장소가 나오지요. 호렙은 산인데, 다른 이름으로는 시내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호렙산, 즉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 한 지 한 달 후에 도착한 산입니다. 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받았지요. 4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례와 법도, 즉 율법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에서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 날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자주 자주 이야기 했던 날입니다.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아모스가 제일 먼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여호와 날은 역사의 종말을 가리키는 날인데, 이 날에 악인들은 모두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는다는 날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하나님이 모두 처단하시는 날이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과 승리의 날이지요. 그러니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매불망 이 날을 기다렸지요. 아모스가 여호와의 날을 이야기 한 이래로 30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런 여호와의 날은 아직 도래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말라기 예언자는 그런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은 역사의 종말의 날인데 그 날은 반드시 온다. 그리고 그 날이 도래하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오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라기가 말하고 있는 엘리야는 바로 아합 시대에 있었던 그 엘리야가 아니지요. 말라기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엘리야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지닌 그 어떤 다른 예언자를 가리키지요.오늘 신약 시대의 우리들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엘리야가 다름 아닌 세례요한인 것을 알고 있지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예언자가 와서 퇴락한 이스라엘 백성의 영성을 회복하라고 외칠 텐데, 그 말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6절 마지막 부분에는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이 있겠다는 말입니다. 어떤 심판입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저주를 직접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아끼는 백성인데, 그 백성들을 하나님이 저주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저주를 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땅에 저주를 퍼붓는다는 말씀입니다.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제대로 잘 지키지 않으면 언약적인 저주를 그 땅에 쏟아 붓겠다는 것은 어제 오늘 하신 말씀이 아니라 출애굽 당시에 시내 산에서 이미 말씀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곳 말라기 서에서도 다시 리마인드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언약적인 저주를 내리겠다고 말입니다. 또 다시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에게는 저주를 내리지 않습니다. 저주는 그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환경, 삶의 현장에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기 힘든 그런 나쁜 환경이 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황무한 땅으로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땅을 하나님이 저주하면 나타나는 일은 가뭄이 들거나 풍재 때문에 작황이 안 좋아지는 일이 생기거나, 또한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어서 가축들이 죽어나갑니다. 그래도 하나님 말씀 안 들으면 적군의 침략을 당하게 하여서 그 땅을 초토화시키지요. 그야말로 생존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이 그 땅에 이런 저주를 내리겠다고 선포하셨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내리신 언약적인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면 그런 언약적인 저주를 거두시겠다는 약속도 물론 했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수단이 바로 환경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를 살아 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 무한정으로 축복하시지만, 우리가 주의 뜻을 벗어나서 다른 길로 간다면 어떻게 할까요? 징계합니다. 징계는 일종의 매질과 같은 겁니다. 왜 징계하나요?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지요. 우리가 미워서인가요? 아니지요. 아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밉다면 그냥 그대로 나 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가면서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끝은 멸망이고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우리를 그 길에서 돌이켜서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가합니까? 징계를 가합니다. 그 징계가 힘들고 아프니 자신의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다시 한번 보게 되고 그러면서 그 죽음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 아닙니까? 


/익명의 엘리야가 와서 그의 백성에게 외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지난 송구 영신 예배 때 이 말씀은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개별 가정에 주신 말씀이 아니고,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말씀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말라기 시대에 영적으로 무척이나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영성이 많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성이 다시금 이전의 그들의 조상이 가지고 있는 뜨거운 영성, 깨끗하고, 거룩한 영성을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소나무에는 늘 푸름이라는 정절이 있고, 대나무에는 대쪽 같은 절개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과 영성이 <정절과 절개>가 있는 믿음과 영성이었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너져 있었을까요? 말라기 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번 말라기 서에서 찾아 보도록 하지요. 


말1:6-7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공경하고 섬기는 제사장들의 타락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멸시하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께 진설병이라는 떡을 드리는데 그게 영 성가신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떡을 드릴 때에 더러운 떡을 드렸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부모님에게 밥상을 차려 드릴 때에는 정성을 다해서 차려 드리는데,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식탁을 매 안식일마다 차려 드리는데, 거기에 정성과 믿음을 싣지 않았습니다. 가장 경건하게 살고,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제사장이 신앙적인 열정을 잃어 버리고 이렇게 타락해 있다면 백성들은 오죽 했겠습니다. 


말1:8절에는 일반 백성들의 타락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하여 희생 제물을 자기의 양떼 가운데 소떼 가운데서 선별하여서 성소로 가지고 나와서 제사를 드립니다. 믿음이 있고 열정이 있는 때라면 소 떼 양떼 가운데서 가장 살찌고 멋진 것을 골라서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에는 영성이 무너질대로 무너졌기 때문에 희생 제물을 드리는데 눈멀고 병들어서 골골 하는 것을 골라서 드렸습니다. 드리기 싫으면 드리지 말지, 왜 그랬나요? 안 드리면 벌 받을 것 같고, 드리자니 아깝고 그런 영적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책망합니다. 너희들이 눈멀고 병들어 골골 하는 것을 너희의 총독에게 선물로 보내보라 그러면 너희의 총독이 그것들을 기쁘게 받겠느냐면서 책망했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은 확실히 옛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부분을 선정하여서 드리는데, 제일 좋은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제일 나쁜 것을 드렸습니다. 쓰고 남은 짜두리 양이나 소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입니다. 


오늘 21세기를 이곳 보스톤 땅에서 살아 가고 있는 우리들의 영성은 어떻습니까?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주 예수가 우리의 전부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예수가 맨 나중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가 전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짜두리 시간을 드리고, 짜두리 돈을 드리지 않았던가요? 내가 하루라는 시간에서 물론 제일 많이 쓰는 시간은 직장의 일이고 학생이면 전공과목에 쏟는 시간입니다. 비즈니스 하면서 가게 운영하시는 분들은 자기 비즈니스에 가장 많은 시간을 씁니다. 물론 어디에 시간을 제일 많이 쓰느냐 하는 것은 신앙 생활 잘 하느냐 못하느냐를 분별하는 파라메타는 아닙니다. 직장 하시는 분들이 직장의 일보다 신앙의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가 전부인 분들은 아무리 직장 일이 바쁘더라도, 아무리 학교의 공부가 밀리고 바쁘더라도, 그리고 사업의 일이 정신 없이 바쁘게 돌아가더라도, 내가 내 영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따로 떼어둔 그 시간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전부인 분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하나님과의 은밀히 기도하면서 교제하는 그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바쁘면 대부분이 기도하는 시간과 말씀 묵상하는 시간은 skip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가 전부인 분들은 바쁘면 바쁠수록 주님과의 시간을 더욱 지킵니다. 세속 일이 바쁘면 바쁠수록 기도의 시간, 명상의 시간을 더 자주 갖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를 위하여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짧은 시간을 주를 위해 쓰더라도 그 시간을 어기지 않고, 그 시간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면서, 그 시간을 다른 어떤 시간들보다 높은 위치에 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하루의 시간을 쓰는 데 있어서 priority no 1에 두고 있습니까? 하루에 10분을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에 드린다면 아무리 바빠도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에수를 중심에 두고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또는 우리들이 벌어서 쓰는 돈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번 돈으로 쓰는 목록을 한번 작성해 보십시요. 무엇에 얼마를 쓰고 있는 지를 보면 내 마음을 어디에 고정하고 사는 지가 확 드러납니다. 아마도 집이 있는 분들은 몰기지를 내는 데 제일 먼저 버는 돈이 나가야 하고, 그 다음에 자동차 페이먼트와 보험비가 나가야 하고, 그 다음에 자녀 교육비, 그 다음에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쓰는 생활비가 들어가고 그 다음에 외식비나 문화 생활을 위한 잡비가 들어갈 것이고 또 헌금도 드립니다. 가장 내게 필요하고 사랑하는 것에 돈을 제일 많이 쓰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내가 매달 버는 돈을 안 먹고 안 쓰고 몽땅 교회에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앞뒤가 꽉 막힌 신앙인의 헌신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산다면 보스톤에서 삶이 몇 달 만에 끝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번 돈으로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하고, 보험도 내야 하고, 또 헌금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우선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우선권을 어디에 두고 삽니까? 경제적으로 조금 쪼들리게 된다면 제일 먼저 삭감되는 것이 헌금입니다. 조금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지면 드려야 겠구나라고 보통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행동합니다. 물론 당장 내야 하는 몰기지나 월 페이먼트를 안내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제일 먼저 떼어서 하나님께 드린 후에 나머지 돈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는 것이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놓아 두는 분들의 삶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경제적인 삶이 쪼들리게 되면 제일 먼저 줄어드는 것은 헌금입니다. 헌금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지 않더라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금, 비록 그것이 내 번 돈의 작은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니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구별하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내 삶의 프라이오러티 넘버 one인 신앙생활입니다. 헌금이 많고 적음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드릴 때에 그 헌금 속에 담긴 정신이고 정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1불을 하나님께 드릴 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니 미리 다른 것에 지출 하기 전에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두었다가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서 몇 등 이실까? 하나님은 내 삶에서 늘3삼등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1등은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 원하는 일이고, 2등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3등은 시간이 나면 하는 일입니다. 시간이 되고 여유가 있으면 하는 것이 3등입니다. 신앙은 레저가 아닙니다. 신앙은 여가 선용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 삶의 priority no 1이어야 합니다. 비록 하루의 적은 시간을 주님께 드려서 기도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분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1등으로 모신 분입니다. 또한 비록 작은 돈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구별하여서 다른 지출보다 우위에 두고 드린다면 그 분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1등으로 모신 분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priority no 1에 두고 있습니까? 마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고 말했지요. 먼저 드릴 것을 먼저 드리라는 말이지. 전부다 몽땅 드리라는 말이 아니지요.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 먼저 드려야지 쓰고 남은 자투리를 드리지 말기 바랍니다. 먼저 드릴 것을 먼저 드리는 영성을 소유합시다. 내가 드리는 것이 많든 적든 상관 없습니다. 사람들은 양이 적으냐 많으냐를 따지지만 하나님은 양이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질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믿음과 정성과 깨달음을 실어서 하나님을 섬기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항상 예수, 오직 예수, 다만 예수! 우리의 삶에 가장 존귀한 위치를 우리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올해 우리들의 교회에 주신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믿음의 조상들은 어떤 영성으로 살았을까요? 신6:4절<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제 일 되는 계명입니다. 이 명령을 따라서 이스라엘의 옛 믿음의 조상들은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먼먼 옛날의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는 가까운 과거인 조선 시대 말엽이나 혹은 일제 치하에서 시련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조선 시대 말기에 선교사들이 많이 순교했습니다. 또한 일제 치하에서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하여서 많은 분들이 순교했습니다. 또한 신사참배 반대 때문에 옥중에서 고생하면서 믿음을 지키다가 석방된 옥중 성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 믿는 믿음만 버렸다면 그렇게 옥 중에서 고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믿는 믿음이 목숨보다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교회 성도들을 뒤로 하고 감옥에서 쓸쓸하게 생을 보냈습니다.왜요? 예수가 그렇게 도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선배들을 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원하 건데 우리 조상들의 이런 순수한 믿음이 그들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런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에서 이탈되어 있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이 가진 영성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주신 올해의 표어입니다. 이런 회복은 우리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온 지상 교회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힘에 지나도록 넘치게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힘에 넘치도록 시간을 드려서 헌신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라고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릴 때에 쓰고 남은 자투리를 드리지 말고 제일 먼저 떼어서 구별하여 두었다고 주님께 드리라는 말이지요. 믿음과 정성과 열정을 담아서 하나님을 섬깁시다:항상 예수 오직 예수 다만 예수!


켐연장

2017.01.09 10:37:08

2017년 1월 6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106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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