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63

금요기도회 :12/30/2016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91장:슬픔 마음 있는 사람 


1. 올 한 해 동안 우리는 ‘남은 자가 되게 하소서!’라는 표어 아래서 신앙생활 했습니다. 사6:13절<그 중의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 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상수리 나무나 밥나무가 잘려 나가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이미저리를 사용해서 남은 자 사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남은 자들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겠지요? 남은자들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믿음을 끌까지 지켜 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 다음에 그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이 남은 자들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여서 믿다가 낙심하여서 믿음을 저 버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박해와 핍박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변절자나 배교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상 유혹 때문에 믿음을 팽개쳐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은자들입니다. 


/남은자라는 용어는 참 좋은 용어입니다. 이단들이 이 단어를 사용해서 자기들을 변호하는 데 썼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이 남은자들이라는 용어를 여호와의 증인이 된 멤버들에게 사용을 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이 자기네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 즉 남은 자들이라고 주장하지요. 또 안식교들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 남은자들이라고 주장을 하지요. 신천지 이단들도 마찬 가지로 신천지 멤버들을 남은자라고 주장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남은자들을 자기네 교리를 추종하는 자들로 아이덴티파이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은자들은 이단이 말하는 그런 류의 남은자가 아닙니다. 남은 자들은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이 남은 자들 가운데는 유대인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 분들입니다. 주데오 크리스찬들! 이 분들은 유대교를 믿는 자기 동족들에게 많은 핍박과 질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 동안 말입니까?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말입니다. 또한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진 카톨릭 교회 교인들도 많습니다. 또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교단 그리고 루터교 등등의 개신교회 속해 있는 성도들 가운데도 남은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교파만이 자기들만이 남은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편협하고 자기 중심적인 남은자 이해입니다. 


/온 세상이 핍박과 유혹으로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 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믿는 믿음을 끌까기 붙들고 죽으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남은자들입니다. 어떤 교파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조국 교회인 한국교회들이 무력해 지고, 교회가 문을 닫고, 교회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런 상황을 우리는 맞고 있습니다. 교회에 청년부와 아동부와 중고등부가 점점 사라지고 없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장래가 염려 됩니다. 영적인 근심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럴지라도 소망은 있습니다. 어떤 소망? 로마서 11:5절 말씀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세상이 온통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가득 차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을 따라서 예수 믿는 신앙을 지키는 남은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엘리야 시대에 온 세상이 온통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가득 차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우리 하나님이 7천명이나 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남긴 사실을 통하여 자기 시대에도 핍박과 박해가 극심하지만 여전히 남은자가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무엇으로 우리들의 시대에 남은자가 있으리라 확신합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의 확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 주신 로마서 11:5절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소망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지금보다 세상이 더욱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핍박과 박해가 심해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남은 자들을 그 시대에도 남겨 놓으십니다. 비처럼 쏟아지는 폭탄 세례 속에서도 참호 속에 살아 남은 자들이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서 남은 자들이 반듯이 있습니다. 그 남은 자들을 하나님이 그 시대를 심판하실 때에 증인들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사도들은 극심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는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찾아 가면서 무엇이라고 권면했나요? 예수 믿는 믿음 가운데 있으라, 주께 붙어 있으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으라라는 말로 권면했지요. 행11:23-24절<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또 행13:43절<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천국 들어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초대 교회 상황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요. 오늘 보스톤과 같은 자유로운 세상 속에서는 핍박보다는 유혹에 저항하면서 살아야 한다. 세상 재미 보면서 살다가는 우리의 영혼이 죽는다. 안일과 방종이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 있다. 부와 평안이 쌓여 감으로 우리의 영성은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남은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신앙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훈련을 거쳐서 자라납니다. 겨자씨 한 알 같이 작은 믿음이 큰 겨자 나무로 자라납니다. 믿음이 성장하자면 어떻게 하면 자라납니까? 성경을 읽고 듣고 하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내 삶에 순종하면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이 쉽던가요? 잘 안되니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삶에 육화(incarnation)되기 위하여 말씀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 힘 가지고 순종하고 나면 아 그 말씀 진짜 구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쑥쑥 자라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슨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성경 공부 반이 있고, 또 무엇이 있습니까? 금요기도회가 있고, 또 무엇이 있습니까? 새벽 기도 프로그램이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하나 하나 경험 되어 질 때마다 내 믿음은 자라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경공부, 금요 심야기도,새벼기도 하는 정도는 그저 좋은 병사 만드는 훈련입니다.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훈련이 있다면 그것은 하사관 훈련이고 또 장교를 만드는 사관학교 훈련이 있을 것입니다. 때때마다 홀로 금식하고 때때마다 밤새워 철야 하면서 기도하는 훈련 말입니다. 이런 훈련들이 되어 있어야 극한 상황에서도 나 홀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인내하면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사탄이 우리를 감옥에 가두고 몇 몇일 동안을 먹을 것도 안주고 마실 것도 안주면서 겁주면 변절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금식 훈련이 되어 있고 철야 훈련이 되어 있으면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언제 말입니까? 지금과 같은 편안한 보스톤 생활에서 말입니다. 유비무환! 당신들은 한 해 동안 영혼과 믿음이 얼마만큼 자랐다고 생각하십니까?


2. 지난 주 성탄절에 선포되었던 성경 말씀은 사11:1-7입니다. 사 11:6절<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언자 이사야는 누가라 그랬지요? 주전 8세기에 예루살렘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었지요. 남 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입니다. 이 예루살렘에서 이사야가 예언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 한 아기, 한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8세기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원자인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그 메시야가 한 아기로 이스라엘에 보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메시야의 이름이 무엇이라고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평강의 왕! 5가지로 불리워지고 있지요. 기묘자와 모사를 히브리어 특성상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기묘한 모사라고 말입니다. 기묘한 모사라는 말은 놀라운 모사, 경이로운 모사, 영어로 표현하면 wonderful한 모사라는 말입니다. 어떤 누구도 감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계획을 세우시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사실 그렇지요?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께서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려는 계획은 인간은 물론,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몰랐습니다. 성 삼위 외에는 어떤 존재들도 몰랐습니다. 인류 구원의 이런 계획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33-34절에서 이렇게 찬송했습니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거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하나님 곁에는 모사, 즉 카운셀러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모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놀라운 모사입니다. 어떤 누구도 우리 주님의 꾀와 지혜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메시야는 뭐라고요? 지혜가 있는 기묘한 모사라고 말입니다. 이 지상에는 청와대도 그렇고 백악관도 그렇고 모두 정치 자문단을 가지고 있지요. 자문단이 있어서 대통령에게 정책을 충고하고 조언을 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하늘에는 자문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모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강력한 용사인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원수도 능히 물리칠 수가 있는 능력을 겸비하신 용사라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지혜자는 용맹이 없고, 용맹이 있으면 지혜가 없는데, 메시야는 지혜와 용맹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묘한 모사일 뿐만 아니라 용사라는 말입니다. 영존하신 아버지입니다. 영원히 살아 있는 아버지라는 말이지요. 우리 인생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쏟아 주실 분이라는 말이지요. 마지막 이름은 평강의 왕입니다. 전쟁을 그치고 하고 온 땅에 평화를 가져 오는 왕이라는 말입니다. 공평과 정의로 온 세상을 다스릴 왕이라는 말이지요. 이 네 가지 이름은 왕명이라고 지난 주일날 설교 했습니다. 메시야의 개인 이름은 예수이지만, 그의 공식적인 이름,즉 보좌명, 왕명은 위의 네 가지가 될 것임을 이사야는 내다 보았습니다:기묘한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왕이 대관식을 갖게 되면 왕명을 갖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한 아기가 장차 태어나서 하게 될 일이 무엇이라고요? 조금 전에 읽었던 사 9:6절 중반 부에는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 정사가 무엇입니까? 통치한다는 말입니다. 그 아기가 자라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뿐만 아니라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들에는 각종 술수와 음모와 부정과 부패가 어두운 가운데 자행 되지만, 메시야의 나라에서는 오직 공의와 정의만이 있게 되리라는 예언입니다. 


/공의와 정의로 메시야가 통치하는 나라가 되면 세상에는 무엇이 있게 되나요?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된다고 기록되었지요. 그 기쁨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사9:3절<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면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 하오니> 메시야와 메시야의 왕국이 도래하게 되면 나타날 기쁨과 즐거움을 어떤 이미저리로 사용해서 표현해 주고 있나요? 두 개의 이미저리입니다. 하나는 추수꾼의 줄거움과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입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태양 빛 아래서 땀을 흘리며 여름 내내 수고한 결실이 무엇입니까? 추수가 아닙니까? 황금 물결 데치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농부는 기뻐하면서 즐거워합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적군들에게서 빼앗은 물건, 즉 전리품을 챙기면서 나눌 때에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면서 두려움도 있었지만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았고 승리해서 적군의 물건을 노략질 해서 나눌 때의 기쁨과 같은 기쁨을 메시야 통치로 나타나는 즐거움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에는 아기 예수가 태어 났을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늘의 천사들이 노래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오시면 제일 먼저 혜택을 받을 곳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유대 왕의 보좌가 있는 예루살렘입니까?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어디 입니까? 사 9:1-2절<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어디에 있을까요? 갈릴리 바다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기름진 땅입니다. 이사야 시대는 갈릴리가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지만 마치 이방 땅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당시에 이 땅은 늘 앗수르라는 강대국에 의하여 짓 밟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수탈을 당하고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 사망의 그늘진 땅에 있는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북방의 강대한 세력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침탈을 당하고 노략질 당하고 죽고 포로로 잡혀 가는 갈릴리 땅!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는 그 땅에 메시야가 먼저 오신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 예언대로 우리 주님 예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했지요.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갈릴리 바다 옆에 있는 가버나움이라는 큰 도시에 선교 본부를 두고 갈릴리에 있는 타운들을 다니시면서 갈릴리 사역을 행하셨지요. 그의 공생애 사역에서 초반부 사역은 모두 갈릴리에 집중한 사역이었습니다. 중반부와 후반부를 넘어 가면서 베뢰아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면서 복음 전파의 사역을 했었지요. 모든 사람이 멸시하고 무시하던 그 갈릴리 땅에 우리 주님이 가셔서 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지요. 


/복음은 갈릴리 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인가? 아닙니다. 복음은 온 인류에게 필요합니다. 해 아래는 어디나 억압이고 압제가 있고 멸시와 천대와 어두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자들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소외된 계층을 위하여 복음이 존재하는 것 아닙니다. 이런 사회적인 핍박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지요. 우리 주님은 온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서 죄와 죽음과 심판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매고 있는데 이것을 없애기 위하여 오셨지요. 우리는 빛으로 오신 우리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번 주일날 설교에서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우리가 가진 세상 빛이 너무 밝다 보니 참 빛이신 예수의 빛이 가리워져서 그 빛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의 빛은 우리가 가진 세상 빛이 모두 꺼질 때에 찬연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빛, 내 영혼의 빛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자각하면 할수록 예수의 빛은 나의 삶에서 더욱 밝게 빛날 것입니다. 시련 18:28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켐연장

2017.01.02 12:55:46

2016년 12월 30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1230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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