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62 

금요기도회 :12/23/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1. 예수를 만나서 회심을 하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삶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 마태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는 동방의 박사들이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서 경배했습니다.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탄생 축하 선물로 드렸고,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돌아 가지요. 사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서 동방에서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별이 이 박사들을 이끌어서 예루살렘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별이 나타남은 메시야가 나타남인데, 이것 때문에 예루살렘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권좌에 앉아 있는 대 헤롯이 박사들을 불러서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당부합니다. 아기를 찾으면 자기에게도 기별을 해 달라 그러면 자신도 그 아기에게 가서 경배하겠노라는 말을 하지요. 대 헤롯의 이 말은 거짓말이지요. 잠시 사라졌던 그 별이 박사들 앞에 나타나서 그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했고, 아기 예수가 있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이 아기께 경배했지요. 그리고 밤에 그들은 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꿈 속에서 하나님께서 박사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말고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고, 박사들은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마2:12절<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다른 길로 간 사람들! 본문의 의미는 박사들의 원래의 귀국 코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대 헤롯을 만나 뵙고 아기에 대한 정보를 주고 고국으로 돌아가게끔 되어 있었지만, 그런 예정된 루트를 버리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 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런 본문의 의미와는 달리 우리가 이 구절을 이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상이라고 그러지요. 우리의 상황을 투영해서 본문을 읽은 것을 말입니다. 예수를 만나게 되면 이전의 삶의 방법을 버리고 다른 삶의 길을 따라서 살게 된다고 말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삶이 얼마나 달라졌나요? 이전과 똑 같나요?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예수 믿기 전과 똑 같다면 예수를 똑바로 바로 만났는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기는 만났는데 정면으로 똑바로 만난 것이 아니라 비딱하게 만나면 자신에게도 교회 공동체에도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되지요.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일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인생의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세 종류의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육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교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이 모두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입니다. 비록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산다고 해도 여전히 육의 사람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인물일 지라도 여전히 육적인 사람일뿐입니다. 이런 육에 속한 자연인들이 자기의 마음의 문을 열고서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시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들도 두 종류로 나누어지지요. 육신에 속한 성도와 영에 속한 성도로 나누어집니다. 육신에 속한 성도는 예수를 영접하기는 했지만 예수를 자기의 생애에 왕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골방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더 심한 분들은 골방에 넣어 두고 밖에서 자물쇠로 채워 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는 믿습니다만,생활은 누구를 따라서 삽니까? 나의 육신의 욕구를 따라서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예수가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영에 속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영접하면서 예수를 자기의 인생의 왕좌에 모십니다. 이분들은 부단히 자신의 욕망과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힘씁니다.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이전의 예수 믿기 전에 살던 옛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활을 하게 됩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대로 ‘다른 길로 간 사람들’입니다. 


/눅19:1-10절에는 삭개오의 회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여리고라는 세관의 세관장이었습니다. 꽤 높은 지위에 있었고, 돈도 많이 번 요즘 말로 하면 성공한 세리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 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온 여리고가 떠들썩 거렸습니다. 그래서 먼 발치로나마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 사람들이 가리고 있어서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길목에 있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를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뽕나무 아래에 가서 나사로를 불러 내렸습니다. 나사로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 있어야 겠다고 말입니다. 그저 한 번만 보는 것도 감사한데 하루를 유하시겠다고 하니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집 안의 모든 식솔들과 함께 식사의 교제를 하면서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삭개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치유했습니다. 삭개오가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눅19:8절에서 이와 같이 말합니다: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이런 행동의 변화는 심령의 뭔가 변화가 있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 삭개오의 이후의 삶이 어떠했을 것 같은가요? 모든 재산을 다 팔아 버렸나요? 그리고 노른자위 같은 여리고의 세관장을 그만 두었나요? 그리고 예수의 뒤를 따라 다녔나요? 오늘 본문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가 어뗳게 살았을까요? 아마도 그는 우리 주님께 말한 대로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서 가난한 모든 자들에게 구제했을 것입니다. 여리고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놀랐을 것입니다. 구두쇠 같은 여리고의 세관장이 바뀌었거든요. 이 당시에 있어서는 유대인들에게 구제라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품 나누어 주는 선행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실천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는 창기와 같은 레벨의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삭개오의 변화는 여리고의 사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삭개오는 자신의 이전의 직책인 여리고의 세관장이라는 직책에 머물러 있으면서 정직하고 공정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을 것입니다. 세리로서 세금을 착복하는 것이나 토색하는 일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된 삶은 삭개오가 예수를 바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삶을 살다가 예수를 만났다고 하여서 자기의 직업을 그만두고 예수를 따르는 길이 변화된 삶이 아니고, 비록 이전의 직업을 계속 가지고 있지만 변화된 심령과 자세로 직장의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 해 보겠습니다:나는 목수로서 목사의 일을 한다. 목수로 세상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의 8번째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나의 전문 지식을 가지고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로서 세상을 섬기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를 많이 키워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솔로몬의 조립식 성전 건축. 왕상6:7절<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히였으며>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가? 어떤 분들은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그런 분들은 세상은 너무나 wonderful하답니다. Wonderful은 세상은 wonder, 즉 경이로움으로 full, 가득 차 있다는 긍정적인 낙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삽니다. 다른 분들은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고 험하고 악하고 더러운지 모르겠다고 탄식하는 부정적이고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당신은 세상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법이 달라지겠지요. 


/세상이 어둡고 악하고 더러움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그런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그런 세상을 정복하고 낙관적인 인생관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어떤 세계관, 인생관을 가지고 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세상은 훈련 장소라는 의식을 가지고 산다. 너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너와 나를 성전 돌로 꼽아 넣기 위하여 나를 다듬고 훈련 하는 장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 성전의 작은 한 돌로 쓰기 위하여 나를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다듬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바라본다면 내 인생관은 달라집니다. 내 인생에 불어 닥친 환난과 고난과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시련과 고난과 환난을 통하여 내 인생에 더욱 큰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왕상6:7절<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히였으며> 


/본문에 나오는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제 1성전은 주전 959년에 솔로몬이 완공했지요. 그러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불타 없어진 자리에 다시 성전이 세워지지요. 그 성전을 제 2 성전이라고 하는데, 스룹바벨이 주전 516년에 완공했지요. 이 제 2 성전은 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확장해 나갔는데, A.D.63년경에 확장 공사를 마쳤다. 그 후 7년이 지난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하여 제 2 성전도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전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 성전이 파괴되는 때가 곧 나라가 멸망하는 때였습니다. 유대인은 나라 없는 족속으로 온 세상에서 diaspora로서 살다가 1945년에 나라를 재건했다. 현재는 예루살렘에 무슬림 사원(Dome)이 세워져 있다. 유대인들 가운데 다시 성전을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은밀히 준비하고 있다. 그 성전을 제 3 성전이라고 부른다. 


/솔로몬이 건축한 제 1성전은 기초 석(큰 돌/영어로는 coner stone이라고 부름)이 놓이고 그 위에 작은 돌들을 손질하여서 쌓아서 건물로 지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돌로 지어진 석조 건물이었다. 성전을 지을 때에 성전 건물에 쓰일 돌들은 채석장에서 뜨고 정으로 다듬은 다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 와서 조립식으로 맞추어 넣었다. 성전 구내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라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성경은 세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연합을 강조하는 비유이지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체 비유가 있고, 그리고 사도 요한이 말하는 포도나무가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성전비유입니다. 성전과 성전돌! 벧전 2:4-5<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우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구약 성전은 기초 석 위에 작은 다듬은 돌들이 놓여져서 석조 건물을 이루고 있다. 이 기초 석은 어마어마하게 큰 돌입니다. 그 기초 석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전의 하나 하나의 돌들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택함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고, 우리들은 산 돌 같아서 신령한 집(spiritual house/성전, 상징적인 집)으로 세워진다고 말했다. 돌 하나 하나가 성전을 이루어 가는데 요긴한 돌이다. 만약 그 돌이 하나라도 없으면 성전이 완공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이 돌들을 얻었는가? 세상에서! 세상 속에서 선택했고, 훈련시켰다. 석수장이가 끌을 가지고 돌을 쪼아서 돌을 준비했고, 그것을 성전에서 조립함으로써 성전을 완공했다. 소리 내지 않고 지어진 성전! 이 세상은 우리들이 성전의 돌이 되게끔 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이 석수쟁이 모양으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쪼아서 성전의 돌 되게끔 합당하게 만들어 가시는 곳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이 세상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처한 현 상황이 하나님이 나를 빚어 가시는 의도가 있는 자리다! 감사하라! 성전 돌로 쓰시기 위하여 아픔을 참아내라! 사람들마다 처해 있는 사정괴 환경이 다르다. 그 상황이 나를 나로 만드는 데는 최적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요긴한 그 한 개의 돌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이 나를 눈물 나는 현장에 두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내가 성전을 이루는 한 돌이 되어서 하나님을 그 속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영광이 아닌가? 그런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정으로 쪼여 나가는 아픔을 참아야 합니다. 아픔과 슬픔이 있어도 살아가야 할 용기를 바로 여기에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3. 테바에 대하여/노아의 방주. 창6:13-14절<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코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노아의 방주는 구원선입니다. 노아의 8식구를 홍수로부터 구원했습니다.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입니다. 대형 방주입니다. 키도 없고, 노도 없고, 그냥 물 위에 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는 중에 노아의 8식구를 살리기 위하여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온 땅에 죄가 가득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그 중에서 노아를 살려야겠는데 살리는 방법이 방주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방주, 테바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구원선이라는 의미가 있지요. 누구든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죽지 않고 삽니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받아 들인 동물들은 정결한 짐승 암수 7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1쌍씩입니다.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방주 안에 있는 부정한 짐승들은 멸망 당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방주 밖에는 정결한 짐승들이 많았는데, 방주 밖에 있는 정결한 짐승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무리 고매한 윤리와 도덕을 따라서 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밖, 즉 교회 밖에서 산다면 영원한 심판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비록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못 살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우편 강도를 기억합니다. 십자가의 우편 강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회개했을 때에 우리 주님과 함께 그날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느냐 없느냐를 통하여 구원이냐 멸망이냐가 결정됩니다. 당신이 현재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사후에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갈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자 그런데 모세를 구원한 갈대 상자! 출2:1-3절<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을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고> 이 야기가 누구에 대한 이야기 일까요? 모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누구입니까? 장차 애굽에 노예 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킬 지도자입니다. 이 당시는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남자 애기가 태어나면 모두 나일 강에 던져서 죽이고 딸은 살려두라는 명령을 내렸지요. 모세가 바로 이런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명에 따라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석 달간이나 집에서 숨겨서 키웠습니다. 이제는 더 숨길 수 없어서 나일강에 버려야 하는데, 모세를 살리기 위한 작전을 짰습니다. 바로의 딸이 나일강에 목욕하러 내려 오는 때를 맞추어서 갈대 상자 속에 모세를 놓아 두면 혹시나 바로의 딸에 눈에 띄어서 목숨을 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갈대상자를 준비합니다. 갈대 상자... 갈대, 즉 골풀로 만든 상자! 애굽의 나일강 하구에서는 갈대가 많이 자라는데 그 속은 파피루스 종이를 만들었고, 줄기는 배를 만드는데 사용했습니다. 갈대로 된 작은 상자. 여기에 사용된 테바는 노아가 만든 방주와 똑 같은 단어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는 코페르 나무를 가지고 만든 큰 배이지만, 모세가 누워 있는 배는 갈대로 만든 작은 배입니다. 모두 동일한 글자, 테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테바는 키도 닻도 노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의 상자와 같습니다. 모세가 누워 있는 갈대 상자도 구원의 방주입니다. 장차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킬 영적 지도자가 누워 있는 배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구원선이지요. 오늘 우리들에게 모세가 누워 있는 테바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모세가 누워 있는 갈대 상자를 가정과 교회라고 적용합니다. 우리 가정이 그리고 우리의 교회, 켐연장 교회가 모세의 갈대 상자와 같습니다. 켐연장 교회의 갈대 상자에 누워 있는 애들, 이들이 다음 세대의 우리 하나님의 택한 세대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낭중지추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는 또 이 밤에 벽돌 한 장을 쌓으면서 켐연장 교회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켐연장

2016.12.27 04:21:51

2016년 12월 23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1223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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