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61

금요기도회 :12/16/2016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그 이름 비길 데가 어디 있나? 


1. 내 친구 동역자 가운데 한 분 목사님이 감옥을 자주 방문해서 죄수들을 상대로 설교를 했습니다. 죄수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했다는 말입니다. 형이 확정되어서 복역하고 있는 분들을 향하여, ‘이 죄인들아 회개하라’라는 죄목으로 설교를 하면 몇몇 분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분들은 예수 믿는 분들인데 실수로 죄를 지어서 수감되어 있는 분들이라는 것이지요. 이 죄인들아 회개하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면 대부분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 들고서 자기는 죄인이 아닌데 자기는 무지하게 억울하다는 그런 눈빛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거구만요. 자기의 행동에서 죄 된 것을 발견하고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시발점이 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죄를 인정하면 죄사함으로 인한 기쁨이 넘치게 되지요. 


/우리는 시편 32펀-다윗의 시편에서 다윗이 7계명을 위반한 다음에 그의 삶이 어떠했는 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시32:3-4절<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이 7계명을 범한 다음에 누가 알까 봐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 밧세바의 남편인 헷 사람, 자신의 충직한 부하인 우리야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범죄를 꽁꽁 숨겼습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밧세바가 춣산하고 예언자 나단이 찾아 와서 그의 죄를 지적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 기간 동안 다윗이 자신이 범한 죄악 때문에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습니까? 종일 신음했다. 뼈가 쇠했다, 내 몸에 있는 진액이 모두 빠져 나갔는데, 여름 가뭄에 축 늘어져 있는 나물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삶이 공허하고 메말라 있어서 그야 말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언제까지? 약 1년 넘는 기간을 말입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그가 했던 결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도망자의 삶을 살지 말고,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야겠다는 위대한 결단을 하게 되지요. 곧 시32:5절<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시인, 인정, 고백)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죄사함이 있다면 기쁨과 자유와 평강을 느끼게 됩니다. 죄책 때문에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니, 마음에 무엇을 느낍니까? 평강, 즉 샬롬이 느껴집니다. 또한 죄가 심령과 삶을 옭아 메었는데 죄사함으로 그것이 풀어 지게 되니 무엇이 느껴 집니까? 영적인 자유가 느껴지지요. 또 무엇이 느껴 집니까? 죄로 인하여 세상이 우울하고 슬픔이 가득하게 느껴지게 되었는데, 죄가 걷혀 지니 인생이 살 맛이 나지요. 그러니 삶의 기쁨과 희열이 느껴지면서 살아갈 의욕이 느껴지게 되지요. 


/성도 여러분, 죄의 권세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누가 우리를 주관해야 하는가?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의 주가 되어서 우리를 주관하게 하셔야지 처리 되지 않은 채로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의 권세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다윗처럼 담대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시19:12-13절<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 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죄 인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범하지 말게 해 달라! 이것이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알고 지은 죄가 나를 얽어 매여서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또한 이전에 지었던 죄인데, 그 죄를 숨은 허물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숨은 허물이 있습니다. 자기의 현재 의식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에 지은 죄악들이 저 깊은 잠재 의식 속에 숨어 있어서 내 삶을 힘들고 어렵게 합니다. 그 숨은 허물에서 벗어 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 숨은 허물을 성령님은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그 숨은 허물을 나에게 알려 주시면 내가 하나님께 자복함으로써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숨은 허물은 내 안에 깊고 깊은 상처, 응어리로 현재까지 남아 있기에 그것 때문에 나의 삶이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제거하면 영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해피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무엇을 기도했다고요? 숨은 허물에서 벗어 나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2. 요일1:9절<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죄를 자백하는 일이 쉬운 일일까? 자백이 무엇인가? 죄를 시인하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즈음 국정조사를 하면서 한국사회가 시끄럽습니다. 국정 조사에 불려 나온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자기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지 않고 거짓말만 늘어 놓습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직한 사람이겠지요.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시 62:8절을 볼까요<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마음을 토하라는 것은 마음을 쏟아 놓으라는 말이지요. 내 마음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죄와 악과 허물들이 아니겠어요? 이것이 그냥 내 마음 밖으로 쑥 나오면 좋겠는데 그냥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안 빠져 나옵니다. 그것은 껌 딱지처럼 내 마음의 벽에 착 달라 붙어 있게 되지요. 그것을 내 마음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 토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요한 일서에서는 무엇이라고요? 자백하는 일이다. 요즈음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기침 감기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저도 지난 금요일부터 기침 감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기침하느라고 잠을 못 자기도 했습니다. 목이 잠겨서 수요일 날과 목요일 날은 새벽 기도도 못 나올 정도였습니다. 기관지에 담이 생기면 그것을 밖으로 배출하기 위하여 기침을 하게 되지요. 기침하는 데 곧 바로 담이 나오면 힘이 안드는 데 어디 그렇나요? 담이 깊은 곳에 있으면 기침을 해도 해도 나오지 않지요. 우리의 죄악도 하나님께 자복하는 일은 이렇게 우리 몸에 생긴 담을 제거하는 것처럼 힘든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는 일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죄가 자백되기 까지 충분히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그런 고통 속에서 내 죄가 하나님께 자백되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지은 죄에 대하여 몸부림 치면서, 이것을 무엇이라고요, 통회 자복이라고 부르지요, 하나님께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구하는 것이 자백입니다. 기도하다가 보면 기침이 나오고, 토악질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령의 신비체험입니다. 내 현재 의식은 무엇 때문에 기침과 토악질을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내 심령 가운데 있는 깊은 죄와 허물과 상처를 치유하시느라고 행하시는 작업입니다. 성령의 신비체험입니다. 기도하면서 나타나는 신비 체험인 기침도 토악질도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현상을 잘 이해 못하시는 분들이 옆에 있다면 절제를 하는 것이 교회 덕을 세우는 길입니다. 


3. 회개에는 두 종류의 회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3:4-11절 말씀을 찾아서 읽습니다. <요13:4-11절> 특히 10절 전반부를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 말이 잘 이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아침마다 혹은 밤마다 샤워라는 것을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사람들은 목욕 탕에 가서 목욕하는 일은 월 중 행사나 혹은 연중 행사 정도되는 일이지요. 발을 씻는 일은 아마도 거의 매일 했을 것입니다. 샌들을 신고 다니니 외출했다가 들어오면 샌들과 발에 흙먼지가 뾰얗게 묻겠지요. 이런 배경 하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목욕회개와 발 씻는 회개! 여기 본문에서는 씼는다는 동사가 주로 많이 나오지요. 몇 번 나오나요? 한국말 번역에는 5번 나오나 그릭에는 6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씻는다 인데, 씻는다는 것은 구원론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이 목요일날 이 말씀을 하시고 금요일날 내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데, 그 사건에 대한 상징을 씼는다는 말로 나타내 줍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욕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중생을 의미하고. 발 씻는 회개는 매일 매일 일상 생활 속에서 짓는 자잘 부리 한 죄를 가리킵니다. 목욕회개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원죄가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죄인입니다. 인생들이 죄인이다라는 말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태어 났으니 당연히 하나님을 몰랐지요. 그러던 우리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에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 원죄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목욕회개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그런 회개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요한복음 3:5절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회개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일생에 단 한번 하는 하나님을 몰랐던 죄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고 예수를 내 마음에 모셔 드리면 다시 할 필요가 없는 회개입니다. 그러나 목욕회개는 달라요. 이것은 매일 매일 해야 하는 회개입니다. 우리들이 사회 생활하면서 얼마나 죄를 많이 짓습니까? 이 죄는 그냥 없어 지지 않습니다. 원죄는 예수 영접하면 그냥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윤리도덕적으로 짓는 죄악은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를 인지하고 그것을 자백하고 고백할 때에 비로소 사하여 집니다. 


/연합과 교제에 대하여! 연합은 예수를 믿게 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집니다. 그것을 연합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를 내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를 내 삶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이것을 연합이라고 부르지요. 우리 하나님과 내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연합, 혹은 합일이라고 부르지요.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을 존재론적인 연합이라고 부르지요.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이 땅에 계시면서 사역하실 때에 늘 하시던 말씀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 라고 말씀하셨지요. 요17:21절, 요14:10-11이런 존재론적인 연합을 의식하면서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3년 동안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지요. 그런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도 우리 하나님과 존재론적인 연합을 가질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 하나님과 내가 존재론적으로 하나 되어 집니다. 이것을 연합이니 합일이니 하는 말로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신앙생활 하면서 내가 우리 하나님 안에 있다는 느낌, 또는 우리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그런 느낌을 느끼면서 신앙생활 하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요? 연합이라고 부르지요. 당신은 예수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과 연합 되어 있음을 느낍니까? 신학적으로 아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느끼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느낌! 이것이 존재론적인 일치입니다. 이 연합이 너무나 확고하기에 이 연합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권세 있는 사람도, 그 어떤 어두움의 세력도 이 연합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이 연합을 깨뜨리자면 하나님보다 더욱 큰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 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강한 자 있습니까? 사탄? 악령? 아니지요. 우리 하나님이 절대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 안에 있는 우리를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8-39절<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악한 천사들, 즉 사탄과 그를 따르는 어둠의 영들도 모두 피조물입니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나와의 연합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연합은 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자주 죄를 많이 짓는다 할지라도 연합은 결코 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 편에 남아 있어야겠다는 결단과 믿음만 있다면 결코 우리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연합은 이처럼 단단하고 견고합니다. 


/자 그러면 교제는 어떻습니까? 교제는 영어로는 fellowship이라고 하지요. 교제는 우리 주님과 내가 한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하면서 함께 하는 자리이지요. 우리의 삶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참 기쁜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대화를 가로막고 교제를 끊어지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짓는 자잘한 죄악들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벽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짓는 사소한 죄악들입니다. 사59:1-2절<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 죄악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활짝 열리지 않고 반쯤 닫혀 지지요. 남편과 아내 사이에 뭔가 알아서는 안되는 것을 감추게 되면 교제가 파괴되지요.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아내가 금새 눈치 채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부 사이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되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 볼까요? 그 동산 안에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에 서로 서로에 대하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친밀한 교제가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과의 그 친밀한 교제가 끊어져 버렸지요. 그 친밀한 교제가 깨어졌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뒤에 숨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금령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짓는 조그마한 죄악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이것을 교제의 파괴다라고 말하지, 연합이 파괴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는 아주 친밀하지만, 그것은 아주 불안정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죄를 지어도 그 교제는 곧 단절됩니다. 그러나 그 죄악을 자백하고 고백하면 이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곧 회복이 됩니다. 쉽게 끊어 지기도 하고 쉽게 회복되기도 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요한복음 13:8절<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직역을 해 보면 네가 내 안에 아무 부분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내가 너와 교제를 나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 주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발 씻는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예수와 교제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발 씻는다는 것은 베드로가 짓는 모든 죄악들이 내일 있게 될 십자가 처형에서 예수께서 흘리시는 보혈로 씻겨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되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짓는 자범죄들이 어떻게 씻기어 지느냐고요? 우리 주님이 2천년 전에 흘리신 보혈로 모두 씻기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를 깨달아 알고서 우리 주님께 자복하는 발 씻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교제는 아무리 적은 죄라고 할지라도 숨기게 되면 끊어 지고,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자백만 하면 곧 하나님과의 교제는 회복이 됩니다. 교제는 죄를 지으면 쉽게도 부서지고 교제는 죄 고백을 통하여 쉽게도 회복됩니다. 


/연합은 결코 깨어지지 않으나, 교제는 쉽게 부서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식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들락 날락 거린다고 호적부에서 이름을 빼냅니까? 아니지요!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사라져도 호적부에서 이름은 빼지 않습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으므로 우리의 원죄가 풀려서 하나님과의 연합 되었습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 있지만 얼마든지 생활 속에서 죄를 짓습니다. 이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벽이 생겨서 친밀한 교제가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자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회개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자백하는 길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발 씻는 회개가 많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우리는 더욱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죄사함의 길을 만들어 주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예수의 피가 강같이 흘러서 우리의 죄를 사한다는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는 그 날까지 우리 심장의 더운 피가 멎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 55:6-7절<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런 초청의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행동은? 사 53:6절<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이 믿어 진다면 우리의 행동은? 히 4:16절<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켐연장

2016.12.20 05:36:54

2016년 12월 16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1216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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