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60 

금요기도회 :12/9/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214장 1. 마3:1절, 마4:19절


회개란 무엇인가? 삶을 바꾸는 일입니다.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합니까?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일부터 일어나야 하지요.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말과 행동이 바뀌게 되지요. 그러면 새 사람이 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그들의 공적 생애를 시작하면서 외쳤던 첫 마디가 ‘회개하라’였지요. 이것은 그냥 우리들이 가진 나쁜 습관 한가지 바꾸는 일이 아니지요. 회개하라는 것은 삶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는 일입니다. 죽음과 심판으로 내려 가던 삶이 이제는 생명과 구원으로 돌아서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요. 


/완전한 회개는 지정의 전반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지성으로는 죄를 지었음을 자각하는 일이 일어나고, 감정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의지적으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결단이 일어나야 하지요. 우리들의 회개는 지성과 감정에는 일어나는데 의지적인 측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회개는 뉘우칠 회자와 고칠 개자로 되어 있지요. 뉘우치기는 잘 하는데 고치지는 못할 때에는 불완전한 회개가 되는 것이지요. 


/알프스에는 ‘날 밝으면 집 지으리’라는 이름의 새가 있습니다. 알프스는 낮에는 따뜻한데 밤이 되면 무지하게 기온이 떨어집니다. 날 밝으면 집지으리라는 새는 낮에는 놀이에 빠져서 집을 짓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추운 밤을 맞이합니다. 너무나 추워서 이 밤이 지나서 낮이 되면 무엇보다 먼저 집을 지으리라 다짐을 하지요. 이윽고 춥고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낮이 되면 밤에 추위 때문에 고생했던 일은 까맣게 잊어 버립니다. 그리고 추운 밤이 되면 또 내일 날 밝으면 집을 지어야겠다고 노래하지요. 그러다가 해가 뜨면 또 집을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새 이름을 ‘날 밝으면 집지으리’라고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지어 주었습니다. 


/제가 1990년에 미시간 그랜드래피즈에서 칼빈 신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 하고 있었을 때에 였습니다. 당시 출석 교회는 그랜드래피즈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떨어져 있던 깔라마주 한인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이야기 입니다. 그 목사님이 한번은 주일 밤에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푸느라고 오랜 시간의 당회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가는데, 프리 웨이를 잘 못 들었습니다. 교회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수 백 번도 더 다녔기 때문에 그냥 생각 없기 습관대로 가면 됩니다. 머리는 교회 일로 복잡해 있었습니다. 프리 웨이를 진입하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도 가도 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래 교회에서 집까지는 15분정도 거리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한 시간 가량 달리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와서 차 창 밖을 보니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시간을 보니 벌써 한 시간이나 달린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유소를 들러서 물어 보았더니 자신이 반대 길로 1시간을 달렸다는 것 아닙니까? 디트로이트 방향으로 15분 정도 가면 자기 집이 나오는데, 그 반대 방면인 시카고 방향으로 한 시간이나 달렸으니까요? 그래서 차를 돌려서 드트로이트 방향으로 달려서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 아닙니까? 요즈음이야 GPS치고 가면 그렇게 엉뚱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겠지요. 그러면 나비걸이 귀찮을 정도로 차를 돌리라고 성화를 부리겠지요. 옛날에는 그런 장치가 없지요. 그러니 한 시간을 밤길을 달린 후에야 잘 못된 길임을 알고 돌이켜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회개는 무엇이라고요? 내가 지금 잘 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길에서 방향을 돌리는 것이지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계속 그 길로 달려 간다면 영원히 집으로 돌아 갈 수 없게 되지요. 


/누가복음 19장,삭개오의 경우: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그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위하여 내 놓겠고, 만약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말하지요. 우리 잘 알듯이 예수님 당시의 세리는 모두 죄인 취급 당했습니다. 이들은 로마 당국으로부터 피지배 민족인 유대민족으로부터 세금을 원활하게 걷기 위하여 선발된 사람들입니다. 세리들은 로마 당국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내서 일부분은 자신이 삥땅을 하고 할당된 금액만 세금으로 바치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할당된 금액보다 많이 책정해서 나머지는 자신이 갈취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관의 장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자이겠습니까? 이런 삭개오가 우리 주님을 만남으로써 심령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재산의 절반을 내 놓겠다고 하지요.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을 죄인이라 하지만 이사람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우리 주님은 구원 받았다고 선언하시면서 이 사람의 식솔들도 모두 구원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단순하게 삭개오가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 받는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까지 일어 났지요.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회개는 불완전한 회개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가 누구이지요? 말라기입니다. 신약 시대를 연 선구자가 세례 요한이지요. 400년간의 중간기가 있습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소리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이 시기에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왕을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했고, 제사장을 세워서 드러난 죄를 사하도록 제사를 지냈고, 선지자를 세워서 백성들이 짓는 숨은 죄를 지적하면서 경고하셨지요. 만약 선지자로 인한 경고의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어떠할까요? 물어보나 마나 뻔하지요. 저마다 자기 판단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됩니다. 곧 자기 삶의 철학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왕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philosophy를 따라서 살게 됩니다. 새로 포장된 도로에서 차선이 그려져 있지 않은 길을 차가 다닐 때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영적으로 곤고하고 텅 빈 삶을 살게 되겠지요. 인생길을 비추이는 하나님의 얼굴 빛이 없으니 앞 길이 캄캄하겠지요. 구덩이가 보이지 않으니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겠고, 돌부리가 보이지 않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겠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내리지 않으니 인생 삶이 메말라지겠지요. 중간기는 영적 암흑시대였습니다. 사사 시대와 영적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사사 시대는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사들이 다스리고 재판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영적인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삿21:25절<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의 중간기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영적인 왕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의 백성들이 어두움 속에서 길을 잃고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한 메시지가 울려 퍼졌습니다. 세례요한 마3:2절, 예수 그리스도 마4:17절: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너희들은 회개하라. 왜냐하면 천국이 저 멀리서 다가 오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이 지금 도래해서 여기 와 있으니 거기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국에는 누가 들어 갈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하고, 진지하게 나 같은 죄인도 들어갈 수 있는 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천국에는 죄 안지은 자가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 받은 자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다. 갈5:19-21절<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는다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들이 못 받는다고요? 죄를 짓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특정하게 나열된 15가지의 죄를 짓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나요? 아니지요. 모든 죄를 가리킵니다.<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는 문구는 15가지의 나열된 죄악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죄악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요. 요한 계시록 20:8절에는 이런 말씀도 기록이 되어 있지요:그러나 두려워 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불이 타고 있는 연못 즉 불못이 지옥이지요. 죄 짓는 자들은 바로 이런 불못에서 영원토록 죽지 않고 고통을 당하리라는 말이지요. 일생 동안 죄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한번 도 안 지은 자가 유사 이래로 있습니까?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는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시다 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후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는 의미는 죄에 대한 개념 조차 없는 천진 난만, 순진무구한 아이라는 말인가? 아니지요. 우리 주님은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계시나 죄를 경험적으로 짓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죄를 경험적으로 지어 본 다음에야 비로소 죄를 알았다라고 말하지요. 여기서 우리 주님이 죄를 몰랐다는 것은 죄를 경험적으로 짓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무엇이고 죄를 짓고 나면 어떤 결과가 임하는 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기에 그것을 경험적으로 짓지 않았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는 만고의 의인이시다. 천국은 죄를 안지은 자가 들어간다면 천국에는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죄를 지었으나 죄 사함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신분은 무엇일까요? 라틴어 Simul iustus et Peccator!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성도는 이 두 가지 측면의 진리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한 면만 강조하다가 보면 이상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죄인? 의인? 정통 장로교인들은 죄인이라는 것만 강조하기 때문에 교회 생활이 어둡고 우중충하고 늘 죄에 짓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지만, 구원파들은 의인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경각심이 없고 방종에 흐르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회개라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해 보고 이 주제를 더 깊이 묵상해 보도록 하지요. 회개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죄로부터 돌이키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두 가지의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고, 세 가지의 요소를 갖습니다. 두 가지의 차원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입니다. 공동체적인 차원의 회개는 교회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일어나는 집단적인 회개를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런 집단적인 회개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서 집단적인 회개를 했지요. 또한 포로 귀한 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을 때에 거국적인 집단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났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집단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온 교회가 집단적으로 회개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 길이 교회가 사는 길이고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개개인이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회개에는 세가지 요소, factor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이 인격적인 존재라고 할 때에는 인간의 구성 요소가 지정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격의 삼요소라고 합니다. 지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회개는 이 세 가지의 요소에 놀라운 변혁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성으로는 죄를 인식하고, 정서적으로는 죄에 대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죄를 미워합니다. 죄를 지은 것에 대하여 탄식하고 애통하면서 근심하고 회한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런 감정들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서 무엇이 일어납니까? 의지적인 결단을 하지요. 행동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함께 감정인 근심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고후 7:9-10절<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전해 듣고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하는 편지 글을 보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그 편지 글을 읽고 크게 근심하면서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다시 바울이 기뻐하면서 편지 글을 보냈지요. 처음에는 바울이 책망의 글을 보냈기 때문에 후회했지만, 오히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근심하면서 회개했기 때문에 바울이 기뻐서 다시 편지를 써서 보냈지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근심을 통하여 회개하기에 이르렀고, 그 회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근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근심이고 다른 하는 영적 근심이 있습니다. 세상 근심은 세상 염려인데 이것은 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망가지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게 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 근심은 파괴적이 아니라 생산적입니다. 이 영적인 근심은 회개함을 이루는데 이 회개는 구원과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의 책망의 소리를 듣고 이런 영적인 근심이 일어났고,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영적인 근심은 누가 우리의 마음 속에 일으키나요? 성령님이십니다. 엡4:30절<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영적 근심의 진원지가 어디라고요? 성령님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근심하는 그 근심을 우리의 영혼이 느낀다는 말이지요. 이런 영적인 근심이 생기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행동의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고후 7:11절<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엄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엄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명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우리 하나님께서 이런 영적인 근심을 날마다 성령을 통하여 불어 넣어 주시면 좋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수월해 질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 즉 회개하는 일도 우리가 잘나서 되는 일이 아니라, 누구의 은혜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일 뿐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일도 하나님이 주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렘애5:21절<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우리가 회개하여서 생명을 얻게 됨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돌이키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생명을 얻게 됨은 언제나 그 배후에 무엇이 먼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 있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노력으로 되어진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회개에 따른 축복은 무엇인가? 회개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생명 얻는 회개! 행11:18절<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들어가서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교제를 하고, 또한 이방인들인 고넬료의 식솔 모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힐란하면서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베드로가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설명하게 되었지요.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서 설교 할 때에 성령께서 그 모인 무리들에게 임하시기에 베드로가 고넬로의 모든 식솔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증언하였지요. 그랬더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 라고 인정하게 되었지요. 생명 얻는 회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 밖에는 없습니다. 지은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도리 밖에는 생명 얻을 방법이 없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는데, 그것으로 우리의 신앙 생활은 끝입니까?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의 신앙 생활의 시작이요 입문일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와서 신앙의 세계에 회개를 통하여 입문하게 되면 그 뒤에 따라 오는 축복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회개는 충만의 서곡이다> 회개라는 문을 열고 우리가 신앙 세계에 들어가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충만한 복입니다. 회개 뒤에 따라 오는 복이 무엇일까요? 우리들도 회개의 문을 지나서 신앙 세계에 입문했는데, 지금 무슨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회개 뒤에 오는 축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한 밑천을 받아서 집을 나갑니다. 세상으로 나가서 성공을 하고자 말입니다. 세상살이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요. 가지고 나간 돈을 모두 까먹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나중에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지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의 품꾼의 하나가 되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갔더니 품꾼처럼 되었나요? 아니지요! 아버지가 자신을 극진히 맞아 주었지요.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을 갈아 입게 하였고, 손에 반지를 끼어 주었고, 이전에 가지고 있던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소를 잡고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품꾼의 하나가 되어서 배불리 먹으면서 종노릇 하면 되었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들의 신분과 지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회개는 충만에 이르는 서곡입니다. 


/또한 구약에서 우리는 나오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나오미의 남편이 죽었고, 두 아들도 모두 죽었고, 이제 두 며느리만 나오미에게 남았습니다. 두 자부의 이름이 하나는 오르바이고 하나는 룻입니다.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 가야 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두 자부에게는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 갔지만 룻은 시어머니와 같이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나오미는 롯을 데리고 베들레헴 땅으로 돌아 옵니다. 얼마나 처량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매일 매일 먹을 것을 염려 하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지경이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롯이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을 때가 바로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4-5월 경이었습니다. 보리를 베고 나면 곧 밀 추수를 하게 되지요. 나오미와 롯이 돌아 왔을 때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룻이 보리 이삭을 줍다가 그 밭의 주인인 보아스의 눈에 들게 되어서 룻이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되지요. 보아스는 베들레헴 땅에서 유력한 사람, 곧 부자입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오벳입니다. 오벳은 우리가 아는 대로 이새의 아버지입니다.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이고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부가 되지요. 나오미는 자신이 자기의 손자인 오벳을 품에 안고 키우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와 룻이 고향으로 돌아 올 때에 이미 그것을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회개는 충만의 서곡이다. 


/요10:10절 말씀: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분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는 것은 회개를 통한 새 생명입니다. 회개라는 문을 열고 들어 갔더니 더욱 풍성한 생명의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개한 자들이 예수 안에서 생명을 더 풍성히 얻어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회개한 우리들이 그 축복을 못 누린다면 정말로 억울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 통장에 누군가가 억 만금을 넣어 주셨는데,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늘 거지처럼 헐벗고 살다가 죽었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억울함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복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누려야겠지요?


켐연장

2016.12.13 06:35:25

2016년 12월 9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1209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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