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59

금요기도회 :12/2/2016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복음송<날 만나라 날만나라>

 

*기도 제목:한국 사회가 위기에 처하여 있지만,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병들어서 썩고 고름 나는 상처 부위를 도려 내는 시기입니다. 부정부패가 일소되어야 하는 시점입니다. 지금의 시점은 고통과 아픔이 있지만, 지금은 보다 더 나은 사회에로의 도약을 위한 준비기간입니다. 또한 교회가 정화 되어야 할 시기이고,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시점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갈팡질팡하면서 방황하는 이 사회에 빛을 비추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등불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교회가 대오각성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국 사회에 주시는 말씀? 1. 5:24<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 불의와 불법이 제거되고 정의가 도랑물처럼 콸콸흐르게 하옵소서! 2. 온 교회가 이제 일어나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33:26<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여수룬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애칭이 여수룬입니다. 여수룬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 오늘 우리들이 믿고 섬기는 우리 주님 예수 같은 분이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돕기 위하여 하늘 즉 궁창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3. 이런 우리 주님의 도움을 덧입기 위하여 히4:16절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4: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삶의 문제-최선의 것을 주시는 하나님! 건강,직장, 진로, 자녀들 문제, 등등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한 없는 축복을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곱게 곱게 울리길 

 

1.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141:3<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입에서 무슨 말들이 거침 없이 쏟아져 나오는가? 남을 축복하는 말, 남을 칭찬하는 말이 거침 없이 쏟아져 나오는가? 아니면 남을 저주하는 말 남을 욕하고 깎아 내리는 말이 거침 없이 쏟아져 나오는가? 사람은 자기의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하게 되어 있다. 당신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 내적 상처가 가득해서 숨은 분노와 악이 가득 차 있는가? 아니면 성령이 가득 차 있는가? 악이 가득 차 있으면 분노를 가득 담은 저주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12:34-35<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그러나 내 마음에 무엇이 가득 차 있으면 이웃을 바라 보면서 이웃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는 말이 내 입에 가득할 까요? 성령! 성령은 내 속에 있는 악들을 제어해 줍니다. 루터는 교회는 입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라는 말이지요. 귀로 들리는 말씀이 그처럼 중요하다고 루터는 생각했지요. 강단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되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무엇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 하나 하나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켐연장 공동체 안에 성령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 3:34<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라> 켐연장 개개 성도들이 모두 성령을 한량 없이 받아서 온 교회 공동체 안에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입의 집이라는 루터의 말은 달리 이해하기로는 교회는 말이 무성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처럼 말 많은 곳은 없습니다. 좋은 말, 복된 말, 남들을 세우 주는 말이 가득하면 좋은 데 그 반대의 말이 성도들의 입을 통하여 넘친다 이것 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의 비밀을 찾아 내어서 가십을 즐기는 이들이 교회마다 많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사탄의 역사로 시끄러워집니다카더라 통신! 이건 비밀이야, 너만 알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라는 말들! 그 말들 때문에 사탄의 역사가 일어나지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자기 일에나 온 관심을 집중하기 바랍니다. 내 앞에 있는 돌부리나 구덩이를 어떻게 피하여 나아갈까를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남의 일에 대하여 관심을 지대하게 갖고 살다가는 내 앞에 있는 구덩이에 빠지기 쉽고, 내 앞에 있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입니다. 이제는 이웃에게 주고 있는 내 시선을 돌려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내 속을 바라 보기를 바랍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 평안한 신앙생활을 원한다면 남의 일에 관심을 끄고 내 달려 갈 길에 온 마음을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달려갈 길에 온 마음을 집중해도 돌발 장애물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 쉬운데, 한 눈 팔면서 달려가다가는 안 넘어지지는 것이 이상하지요사도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났을 때에 자신은 후에 믿음 때문에 순교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듣지요. 그 말을 듣고 난 후에 예수님 곁에 서 있는 사도 요한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사도 베드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 사람아, 자네 일이나 신경 쓰고, 남의 일에 신경 꺼! 라고 말씀하셨지요. 요한복음 21:21-22<이에 베드로가 요한을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나는 순교 하는데, 이 사람 요한은 만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는 말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는 예수님이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이 늘 예수님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에 시샘이 나서 이런 질문을 했지요. 그랬더니 22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하지요: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땅에)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너의 일에 신경을 쓰고 남의 일에는 신경 꺼 라는 말이 아닙니까?

 

 

2. 하나님을 경험하기/하나님을 체험하기/하나님을 느끼기! 어디에서? 공적 예배 현장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해 보았나? 금요기도회 때나 혹은 주일 예배 때에! 공적 예배 현장에서 말입니다. 공적 예배 현장에서 하나님 체험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야 말로 그 예배의 현장에 앉아 있는 우리의 마음은 메말라져 있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dry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메마르고 공허해 진다. 세상에서 그런 감정으로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우리들이 공적 예배의 장소에 왔을 때에 그 메마름이 해갈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배의 현장에서도 우리의 메마름이 해소되지 않고 그런 상태로 평생을 산다면 예수 믿는 유익이 무엇인가?

 

/ 6:1-8절 읽을 것! 이사야가 예배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가? 이사야가 어떤 환상을 보았습니까? 성전 안에 연기가 가득 피어 올랐고,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흔들 거렸습니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이사야는 성전 안에 높이 들려져 있는 보좌를 보게 되었고, 그 보좌에 하나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는 스랍 천사들이 둘러 있었습니다. 스랍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날개가 여섯 개씩을 가지고 있는 천사들이었습니다.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렸고, 날개 둘로는 날고, 날개 둘로는 발을 가리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이 심히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외치는 소리가 너무나 컸기에 온 성전이 흔들흔들 거릴 정도였습니다. 영계의 실존들을 이사야가 기도하는 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상이 눈 앞에 전개 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광경이 너무나 장엄하기에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경이로운 새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우리는 이런 영적 경험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경험한 것 같은 하나님 체험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체험이 안 일어나니 예배에 흥미를 잃어 가지요. 만약에 이런 영적 체험이 예배 때마다 일어난다면 열정을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지 않울까요?

 

/우리들이 예배 드리는 현장에 누가 와 계시는가? 부활하신 우리 주님 예수께서 와 계십니다. 18:20<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9절 말씀에는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서 간구 하면 기도 응답이 이루어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믿는 두 세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여서 모이는 곳에 누가 와 있는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와 계신다. 주의 이름으로 예배 드리는 현장에는 반드시 우리 주님 예수께서 와 계시는데, 어떻게 우리 주님 예수를 만나고 느낄 수가 있겠는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여서 하늘 세계에 들어가 계신다면 땅에 있는 내가 어떻게 그 예수를 만날 수가 있는가우주 왕복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야지요. 이것이 훨씬 쉬운 일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를 만날 수가 있겠는가? 해답은 성령님입니다. 내 밖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느끼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내가 이 땅 어느 곳에 있더라도 성령님만 역사하시면 우리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높은 산 위에 있더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 주님을 만납니다. 아니면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가 있더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는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인격체고 우리도 인격체이니 서로가 서로를 만나서 느끼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요한 복음 4:24절에는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정의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다하나님은 육체가 없는 영적인 존재이십니다. 우리의 본질도 우리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본다면 영과 육의 결합체입니다. 우리의 본질도 육신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만남과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하지요영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시는 분이 누구라고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예수 믿는 공동체 지금 들어와 계십니다. 그 분이 늘 우리 밖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일상 생활하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음을 알게 됩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이사야 본문에는 이사야가 엄청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무엇을 고백합니까?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마치 자신의 지은 죄 때문에 꼭 죽을 것 같다는 그런 숨막히는 두려움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사야는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죽어 마땅한 죄입니까? 아닙니다. 입술이 부정하다. 말로 죄를 많이 지었다는 말입니다. 거짓말하고, 남을 비방하고, 위협하고 저주하는 그런 말들, 말로 죄 짓는 것은 죽을 죄가 아니지요. 이전에는 입술의 죄악이 별 문제가 안되었는데, 지금은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사야가 죽을 것같이 벌벌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되면 무엇을 경험한다고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고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신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죽어도 싸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언제 말입니까? 하나님을 예배의 현장에서 만나게 될 때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어떤 누구도 나 이만 하면 깨끗하게 살았소 라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면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나는 죄인이요 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가 부름 받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 날 밤에 갈릴리 바다에서 배 타고 나가서 투망질을 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허탈한 심정으로 해변가에서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에 타신 후에 해변가에 모인 무리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배 타고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우리가 밤새워 투망질을 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으나 말씀에 의지하여서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고 예수를 배에 태운 채로 깊은 바다로 노 저어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것처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이들을 불러서 고기를 끌어 올렸더니 두 배에 가득 찰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바다 전문가의 관점에는 그 시간에 깊은 물에서 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는데도 주의 말씀을 순종하여서 깊은 곳에서 그물을 내렸더니 엄청난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런 기적을 맛본 후에 시몬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대답하지요.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수지 맞았다 하면서 감사헌금이나 조금 드리고 그것으로 끝이겠지요. 그러나 베드로의 눈에는 배에 앉아 계시는 예수가 무엇으로 보입니까? 갈릴리 출신의 한 줄충한 선지자가 아니라, 메시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 앞에서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었을 때에 느끼던 바로 그 죄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예수는 메시야로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배에 타고 계시는 청년 랍비 예수께서 다름 아닌 지난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도 눈 빠지게 기다려 왔던 메시야 아닙니까?   

 

/우리들이 죄라고 느끼는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들입니다. 누구의 것을 도적질하고, 강탈하고, 누구를 죽이고, 누구와 간음하고, 누구에게 거짓말하고 등등의 죄악들은 인간 사회에서 쉽게 짓는 죄악들입니다. 이런 죄악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죄악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과 우상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짓는 도덕적인 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중범죄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아프게 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이 가장 큰 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앞에 계시는데, 그 분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내 부모라고 여기며 섬긴다면 얼마나 부모님의 마음이 아프겠느냐 말입니다. 그 죄는 자식이 도덕적으로 짓은 죄악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지요.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허물어 버리는 그런 아픔이 되지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이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다음 세상으로 들어갈 때에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믿지 않는 죄입니다. 16:9절에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를 주셨고, 예수를 피 흘려 죽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메어 달아 죽임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함 받을 길을 주셨는데 그것도 싫다고 걷어 차 버렸다면 다른 속죄의 길이 다시는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최종적인 우리의 속죄의 길입니다. 두 번 다시 없는 구원의 길, 속죄의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옥에 들어가기 위하여 흉악한 죄를 거듭 거듭 지을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지옥갑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회개 하기를 거부한다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천국 들어갑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진리입니다

 

그렇게 죄를 고백한다면 우리 하나님 그래 죽어도 싸다 하면서 우리를 죽이시나요? 아니지요. 우리가 고백한 우리가 지은 모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사야 본문에는 스랍 천사가 부젓가락을 가지고 제단에 있는 핀 숯을 하나 집어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면서 이렇게 선포하지요: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신약의 말씀 요일1:9절의 말씀과 상통하지요: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우리의 모든 죄가 그렇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지게 아프게 했을 텐데도 우리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사야의 경우에는 제단 숫불을 이사야의 입에 댐으로써 그의 입술을 정결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저리이지요.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우리 하나님의 받아 주시고 널리 용서해 주십니다.

 

예배 때마다, 기도 때마다 성령의 신비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성령 은사를 통하여 깊은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게 됩니다성령 체험과 성령 은사를 통하여, 영적인 세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저 멀리 계시는 우리 하나님이 저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바로 내 코 앞에 서 계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고린도 전서 12:7-11절에는 성령의 신비 은사가 9가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비체험의 은사가 이것 말고도 많습니다: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슴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오늘 이 금요 예배 때에도 성령의 깊은 것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느껴 보기를 바랍니다. 지성적인 신앙에서 감성이 가미되면 하나님을 영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지성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신앙은 허약합니다. 지성에 감성이 더해 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게 되고 헌신과 순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켐연장

2016.12.05 18:24:16

2016년 12월 4일 주일예배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1202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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