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1. 지난 주에 켐연장 교회의 기도제목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번째가 무엇이라고요? 교회 공동체 전원이 예배 때마다 무엇을 느끼게 달라고요? 하나님을 느끼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달라고,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해달라는 말이지요. 금요기도회 때나 주일 예배 하나님을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지성적으로 아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는가 말입니다. 밖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내가 느낀다면 전율할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때마다 영이신 우리 하나님이 예배의 자리에 계십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도 느낌이 있는데, 하나님을 만났다는 어찌 느낌이 없습니까? 마네킹을 앞에 놓고 대화 보슈? 무슨 느낌이 있습디까? 없지요. 실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내가 만든 하나님을 앞에 놓고 예배한다면 무슨 느낌이 있겠습니까? 없지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는데 어찌 느낌이 없겠는가? 하나님 체험이 예배 때마다 일어나야 합니다어떤 아이가 가족들과 둘러 앉아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묻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성탄절 행사 어땠냐고? 무지 무지하게 재미 있었다고 즐거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오늘 성탄절 예배와 행사에 예수님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였습니다. 예배 마다 말없이 우리의 예배의 현장에 있는 예수를 느끼지 못했다는 아닙니까? 어찌 어린아이 뿐이겠습니까? 장년들, 자리에 기도하러 모인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자리에 있다는 느낌이 드십니까? 하나님을 지성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는 일이 중요합니다아이들이 자라서 청년으로 됩니다. 아이들에게 청춘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 하면 아이들이 이해가 안됩니다. 아무리 청춘 남녀의 사랑을 설명해도 아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청년이 되면 몸에 호르몬이 만들어지면 때부터는 청춘 남녀의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몸으로 경험해서 알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신앙도 그와 같습니다. 예배 때나 기도회 때나 하나님을 체험하고 느껴 보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았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임재해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느껴 알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기도가 무엇이라고요? 켐연장 교회에 전무후무한 부흥을 주소서! 전무후무란?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부흥을 오늘 주옵소서! 죽은 영혼들이 살고, 상처 난 영혼들이 회복되는 것을 영적인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영적인 부흥이 켐연장 교회 전체 성도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면 그 결과로 켐연장 교회 공동체는 더욱 커져 나갈 것입니다.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 교회의 어린 것들이 하나님의 택한 다음 세대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루어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영아들, 아동부, 유우스, 드림, 비전 청년부를 다음 세대의 구원사를 이루어가는 동량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는 하루 이틀에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한 평생 해도 모자라는 기도입니다.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겠지요. 미국에 있는 교회들에 영적 각성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고, 또 한국에 있는 조국 교회들이 영적 침체를 벗어나서 영적 각성이 일어 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 사회도 한국 사회도 현금의 이런 혼란은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역사의식)를 올바로 못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찬들이 회개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각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들을 위하여, 목사들에게 영적 갈급함, 즉 목마름을 늘 주옵소서! 


함께 통성 기도를 합니다. 복음송: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한 없는 축복을 우리게 주시는~ 


2. 다음 주일이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추수 감사 주일은 교회력을 따른 절기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우리 사회에 복음이 전래 될 때에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절기이지요. 청교들이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 하면서 시작된 절기가 추수 감사 절기이지요. 이것이 농경사회인 우리들과 꼭 들어 맞았지요. 지금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었지요. 농경 사회가 아닌데, 추수감사절기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럴지라도 왜 지켜야 하는가? 우리들의 근본은 땅에서부터 나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재료들이 땅에서 나온 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365일 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잊어 버리고 살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1년 52주일 가운데서 가을에 한 주간 만이라도 구별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로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각 교단마다 10월달과 11월달에 추수 감사절 절기를 만들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날 교회 올 때에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하나씩 들고 오시라고 광고했습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께 과일 주셔서 감사할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삶에도 이런 아담한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입니다. 어떤 성령의 열매를 올해는 내가 가장 많이 맺히었는가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시50:22-23절<하나님을 잊어 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을 잊어 버린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답니까? 찢어 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린 사람들은 다른 말로 하면 만 가지나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그 은혜 자체도 잊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참으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 영혼을 파멸에서 건져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내 모든 죄악을 사해 주셨고, 내 질병을 고쳐 주셨고, 지금까지 육신적인 생명을 유지하게 하게 위하여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셨지 않았습니까? 또한 남편을 주시고, 아내를 주시고 자식도 주시고 가정을 만들어서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신 것 참 감사하지 않습니까? 또 이곳 미국 보스톤 땅까지 인도해주셔서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게 해 주셨습니다. 또 이곳 보스톤 땅에서 좋은 직장도 허락 해 주셨습니다. 그 것뿐만 아니라 또한 좋은 교회, 켐연장 교회를 주셨고, 켐연장에서 좋은 교우들을 만나서 신앙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주위를 둘러 보면 온통 감사의 조건들이 우리에게는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얼마만큼 감사해 보셨습니까? 많이 못했습니다. 감사 보다는 뭐가 더 많았던가요? 불평 불만이 사실 감사 보다 더 많지 않았던가요? 


/감사의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지요? 그 이유는 내 영안이 어두워서 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안이 어두워져 있으면 아무리 큰 은혜를 하나님이 주셔도 그것을 은혜로 여길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정신 건강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에 대하여 감사해 보셨습니까? 감사가 안 나오지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니까요? 그러나 세상에는 정신적인 질고疾故를 겪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 데요? 어떤 정신 병동에 환자를 실어 나르는 운전수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환자를 라이드 해 왔습니다. 병원 안으로 들어 가는 데 2층 병실 창문에서 ‘어기 거기 운전수 양반, 당신은 건강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 해 보셨습니까?’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운전수는 15년 동안 매일 정신 병동의 환자를 실어 날랐는데 자신이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에는 감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찌 이 운전수만 그랬겠습니까?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이것 정말로 감사의 조건입니다. 저도 제작년에 앓았던 불안 장애, 이것도 우울증의 일종이지요, 참 힘들었지요. 육체는 멀쩡하지만 속이 병드는 정신적인 질고는 참 고통스럽거든요.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내가 결벽증에 걸려서 앓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씻고 또 씻고 하루 종일 씻는 일만 하잖아요? 악수를 하면 더러워졌다는 생각이 들기에 피부가 문드러질 때 까지 물로, 비누로, 타올로 씻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사회 생활하겠습니까? 또 내가 강박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의외로 이런 강박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많다는 사실을 아나요? 집에서 직장으로 출근하는데, 집에서 직장까지 걸어 가는데, 발을 홀짝 홀짝 거리면서 걸어가는데, 직장 입구에 딱 들어 가는데 오른발이 걸리면 직장에서 일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홀짝 홀짝 거리면서 직장으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오른 발이 직장 문에 떡 걸립니다. 그러면 다시 집으로 와서 직장으로 걸어갑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홀수인 왼발이 직장 문에 놓여집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 오고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이 강박증입니다. 이래 가지고는 사회생활 할 수가 없지요. 우리들 가운데는 이런 분이 없지요. 오늘 교회 문에 들어 오시면서 홀짝 홀짝 계산하시면서 들어 온 분 있습니까? 없지요. 모두 강박증을 앓고 있지 않으니깐 아무도 그런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건강한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감사해 보셨습니까? 

오래 전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혀에 암이 생겨서 설암을 앓고 있었던 어떤 그리스도인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수술 받던 날에 그를 수술하는 외과 의사가 그 설암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습니다. 혀를 잘라 내야 하기 때문에 수술 후부터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환자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뜬 후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혀를 가지고 말을 할 수 있었지만 감사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 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혀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 보지 않았습니다. 의례껏 내 입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요? 맛을 느끼고,이웃과 의사 소통을 하는 중요한 기관이 혀 바닥 입니다. 하루 종일 한마디 정도 말씀하시는 분들은 혀가 진짜 우리의 삶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밤낮 입을 벌려서 말하는 분들에게는 혀는 진짜 그의 삶에 중요한 기관입니다. 혀가 그에게 없다면 아주 답답한 삶을 살아야겠지요. 이런 분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입에 혀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감사를 표할까요? 한 마디의 말이 천냥이나 되는 큰 빚을 갚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반드시 감사한 마음을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하고 있는 지 없는 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감사하다면 보다 분명한 말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말로 감사를 하나님께 표하는 일은 무슨 결과를 낳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고 와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높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에게 있는 감사의 조건을 찾아서 예배의 현장에 가지고 와서 감사의 말을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에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졸업을 하고, 좋은 직장을 얻고,직장에서 승진을 하고, 돈을 벌어서 집을 사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서 기쁘고, 이런 등등의 일들은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일만으로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당하는 궂은 일, 나쁘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감추어져 있기에 우리는 감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에게 닥친 궂은 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궂은 일 가운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발견하고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좋은 환경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그 속에 나를 위하여 숨겨 두신 복을 불수 있기에 감사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위장된 복이다. 성도는 환경, 즉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 가를 보고 싶어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내게 불리하고 나빠도 우리는 그 환경 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과 시련 속에 하나님이 숨겨 놓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은 우리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때에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박국 예언자에게서 그런 정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폐허가 되겠지만,오히려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때문에 하박국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화과 열매를 모두 빼앗기고, 포도 송이도 다 빼앗기고, 감람 나무의 소출도 없어지고 밭에서 거두어 들인 곡물들을 모두 빼앗긴다고 할지라도 또한 우리에 있는 소와 양을 모두 빼앗기고 약탈을 당한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감사하리라고 예언자 하박국은 노래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물은 빼앗긴대도 빼앗기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빼앗기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영원히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처럼 이런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인으로 성장해 가야 하는데, 그것은 훈련으로 되어 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표할 때에 마음과 말로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또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 합니까?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없어서 물질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있는데도 물질을 드려서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신앙입니다. 마6:21절<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나의 경제적인 힘이 미치는 한도 안에서 극진히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내 주머니가 열려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 짜리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 동안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하나 하나 손꼽아 보면서 하나님께 추수 감사의 예물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일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한 개씩 봉헌합니다. 이 과일은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에 성령 부어 주심으로 인하여 맺은 성령의 열매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런 소담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시길 바랍니다. 아동부의 어떤 꼬맹이가 추수 감사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동요를 한 곡 부른 다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가 선물 하나 드릴께요? 내 장난감 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 가져가도 돼요.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이 드리는 이 감사의 예물이 이 아이의 장난감과 같다는 사실 아닙니까? 시편 기자는 시편 116편 12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우리 찬송가에도 216장 4절: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아멘!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 116편 14절에서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라고 결단하고 있지요. 


/하나님께 마음으로 말로 물질로 행위로 감사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어떤 일을 더하십니까? 오늘 본문 23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이 구원을 우리에게 보이신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끔 실제적인 구원을 베푸신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축복을, 비록 그것이 영적인 축복이든지, 육신적인 축복이든지 상관없이 우리의 육신이 그것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는 사람은 이미 받은 작은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여야만 합니다. 이미 받은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면 하나님은 새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작은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면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 즉 축복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감사의 조건이 내게는 얼마나 있을까?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내게 충만하게 임하시면 내 어두운 영안이 열려서 이전에는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몰랐는데, 이제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주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고린도전서 2:12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무엇이지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 오시면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들이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정착하여서 청교도 문화를 꽃 피웠던 청교도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더 구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저희에게 은혜를 잊어 버리지 않는 은혜를 주소서!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이 없는 상태를 한번 경험해 본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가 있겠지요.


켐연장

2016.11.21 06:04:00

2016년 11월 18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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