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57

금요기도회 :11/11/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성령이여 강림하사(190)

 

1. 15: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교회 생활하면서 지체들끼리 왜 다투고 싸우는 것인가? 서로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이를 차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차별은 없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남자를 높이고 여자를 낮추는 성차별, 혹은 인종차별, 신분차별, 빈부차별 등등은 없어야 하지요. 그러나 차이는 존재합니다. 너와 내가 다른 것 말입니다. 이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나와 같은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무시하고 상종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이런 분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하라고요? 서로 받으라! 받으라 그랬지 서로 들이 박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박으라는 말과 받으라는 말이 비슷하지만 반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박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박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받는 일은 어렵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해야 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교회 생활을 원만하게 잘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받아들이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툼과 갈등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서 보기 시작해야 받을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어떻게 나와 다른 우리의 이웃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릴까요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실 때입니다. 어떤 깨달은? 그리스도께서도 별 볼일 없는 나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이웃에 대하여 마음이 열립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너는 별 볼일 없다 하시면서 물리치셨나요? 아니지요. 우리를 받았지요. 조건 없이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런 말을 했던가요? 어떤 말? 너는 이런 이런 어두움과 약점이 있는데, 니가 그것을 고치면 내가 받아 줄께! 이런 말 우리 주님으로부터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이런 약점과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냥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와 다른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해야 마땅합니까?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마땅히 조건을 묻지 않고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님이 이런 허물 많은 나를 받았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떠 오르면 이것이 무엇이라고요? 깨달음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마을에 집을 건축했습니다. 방안이 무척 어두웠습니다. 방을 밝게 하자면 햇빛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추장이 마을 주민들에게 모두 그릇에 햇빛을 담아다가 집안으로 가지고 들여 놓도록 명했습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한 낮 동안 햇빛을 퍼 날랐지만 여전히 집안은 어두웠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영특한 아이가 벽에 창문을 하나 내면 그냥 밝아 진다고 추장에게 이야기 했고, 추장이 벽에 창문을 하나 뚫어 내자 이내 방은 밝아 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깨달음입니다. 밖에 있는 햇빛을 내 어두운 방안에 들어 오게 하는 방법은 창문을 만들어서 열어 젖혀 놓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당신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커튼입니까? 커튼을 걷어 놓으십시요. 그러면 밝은 햇빛이 당신의 심령에 비쳐 들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어두움이 걷히게 됩니다. 사실 나의 가까운 이웃을 못 받아 들이는 이유는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상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열등감, 우월감, 또는 미움과 시기 질투, 또는 숨은 분노들, 이런 상처들이 나를 사로 잡고 있기 때문에 이웃을 받아 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이런 상처 덩어리들이 비어져야 비로소 이웃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웃을 변화 시키려고 힘 쓰지 말고, 내가 변화 되기를 힘쓰라. 그러면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음을 잊지 말라.

 

2.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 고후10:3-6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여기에 보이는 우리의 기도 제목?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          나를 주께 굴복시키소서! 주여  나를 주께 복종시키소서내가 주께 복종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마음과 심령에 들어 있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그리고 이론을 버리고 그리고 나의 교만과 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생각들에 지배를 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 왔습니다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장문의 연설을 하지요. 그 설교 가운데는 이렇게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을 책망합니다: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도다항상 우리는 기회만 주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가 되거나 하나님에게서 도망을 치는 도망자들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다고 생각해 온 나의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나의 아집과 고집들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누구의 말을 따랐나요? 자기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내려 놓는 일이 잘 되던가요? 잘 안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부수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내 밖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다른 말로 한다면?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내게 임한다면 아무리 단단하게 나를 둘러 싸고 있는 견고한 진도 부서져 내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주여 나를 주께 굴복시키소서 라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세상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참 큽니다. 내 욕심, 그리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불 같은 정욕-돈과 명예와 지식에 대한 이런 욕심들을 제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내게 코뚜레를 해 주면 하나님을 뒤에 두고 도망을 못 갑니다. 코뚜레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망아지는 참 힘이 좋지요. 어릴 때에는 그냥 마구 뛰놀게 나둡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코에 구멍을 뚫고 코뚜레를 달지요. 그 코뚜레를 가지고 말 안 듣는 소를 어거하지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들에게도 우리들의 코에 구멍을 뚫고 코뚜레를 끼워 두시면 우리가 우리 마음 대로 우리의 정욕을 따라서 세상살이를 할 수 없게 되겠지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코뚜레를 달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요. 그러면 자연히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 싫건 좋건 순종하게 됩니다

 

/가장 좋은 길은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서 내 안에 있는 세상적인 것을 다 두둘겨 부수어 주면 제일 좋고, 그것이 안되면 우리에게 코뚜레를 만들어 끼워 주시면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지요. 세상 욕망을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부수든지, 아니면 코뚜레를 뚫어서 끼워 주시든지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요.

 

3.수인사 대천명, 修人事待天命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사람이 할 일은 다해 놓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사자 성어, 고사성어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안 해 놓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은 행운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 되기 위하여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일확천금一攫千金성경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들이 해야 할 바를 다해 놓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우리 주님이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요한 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 앞에 서서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무덤어귀를 막고 있는 돌을 치워 놓고 무덤 문을 열라고 명하십니다. 그랬더니 마르다가 무슨 소리를 합니까?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신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찌 그런 쓸데 없는 짓을 하십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마르다야 너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라고 말씀하셨지요. 장정 몇 사람이 무덤의 돌을 옮겨 놓음을 보신 후에 우리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큰 소리로 명하시지요. 그랬더니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그리고 얼굴은 수건으로 쌓인 채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낼 수 있는 권능이 있는 분이 왜 무덤의 돌문을 말씀 한마디로 굴려 놓지 않았을까요? 무덤 문을 여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해 놓고 난 다음에 사람이 할 수 없는 생명과 죽음 문제에 개입하셨지요

 

/이것이 무엇이라고요? 주의 일을 행할 때에 이런 원칙, 이런 원리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생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 스스로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그 결과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라고 주신 비전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 보스톤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스스로 열심을 다해서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을 안 해 놓아도 하나님이 이루시겠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학기말 고사에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땀 흘려 준비하고 공부해야 하지요.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하면서 공부 준비는 안하고 기도만 열심히 한다면 좋은 성적 만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시험 문제를 미리 보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떼를 쓴다고 하나님이 보여 주십니까? 그럴 수 없지요.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 놓으면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것이지요.

 

/다윗의 물매돌 날리는 기술도 그가 목동 시절에 갈고 닦은 실력이 아니던가요? 목동 시절에 갈고 닦지 않았다면 그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소실적에 닦은 기술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사실 다윗이 골리앗 같은 용사와 미래의 어떤 시점에 그런 싸움이 있음을 예견했기 때문에 물매돌 날리는 실력을 갈고 닦았나요? 아니지요. 물매돌 실력은 그가 목동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기술입니다. 매일 매일 그 목동 직업에 충실하기 위하여 연마한 기술이 아닙니까? 그런 기술이 훗날 자신을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세우는 데 사용이 되지 않았던가요? 오늘 우리들이 이곳 보스톤에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과 발로 경험하는 모든 일들, 특별히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의 지식을 우리 하나님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 구원사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가 있겠지요. 열심히 준비합시다학문과 기술을 열심히 연마하기를 바랍니다그것으로 무엇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까?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말입니다. 우리 교회의 8번째 기도제목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더 연마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라고요?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이 기름 부음이 있어야 내가 가진 학문과 기술이 주를 위하여 값지게 쓰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으면 내가 연마한 학문과 기술이 나의 입신출세로는 사용이 되어지겠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는 쓰일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지요. 삼상16:13<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에 크게 감동 되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다윗에게 성령이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의 물매돌 기술에 성령의 기름부임이 임하니 골리앗을 눕힌 것 아닙니까? 이곳 보스톤 땅에서 21세기에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냐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머리 머리 위에 임하여 있어야 합니다. 학문과 기술, 그리고 돈 버는 기술 등등을 소유하고 그 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서 놀랍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하여 이렇게 금요기도회에 모였습니다. 매 주일 금요일마다 한번씩 말씀 붙들고 기도하는 일이 쌓이고 쌓이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한번, 한달, 일년, 십 년의 기도가 쌓인다면 강력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의 신앙의 건물을 완성하기 위하여 벽돌 한 장을 쌓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을 경험하기/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느껴보라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처럼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우리가 대면하면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느낄 수가 있겠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9:25-27<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욥은 자신의 대속자, 영어로는the Rredeemer, 히브리어로는 고엘,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옹호하고 변호해 줄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누군가 하면 하나님 바로 그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을 그가 죽은 후에 욥은 자신의 육체 밖에서 보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 밖에 엄연히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이 만들어 내놓은 창작물, 허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정하던 안 하던 간에 엄연히 살아 있는 실존이십니다지정의-인격의 삼요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실존입니다.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라는 것은 우리들처럼 육신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말이지요.

 

/우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영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느낄 수가 있을까요? 조금 전에 인용했던 요4:24절에는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라고 기록되었지요.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들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우리들이 예배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지적 인식이라고 부르지요. 하나님을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이해함으로 얻게 되는 지성적인 이해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 생활의 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하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껴야 합니다. 당신은 예배 때 마다 우리의 예배를 받기 위하여 예배의 자리에 임하여 계시는 그 하나님을 느껴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느껴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났다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저 우리의 머릿 지식으로만 남아 있다면 우리의 하나님이해는 부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신지식이 전무한 사람보다야 낫겠지만, 그것은 결코 온전한 하나님 이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 예배의 현장에 오시는 우리 주님을 우리가 만나고 느끼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전 8세기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무엇이라 외쳤습니까? 여호와를 알라! 히브리말로 다아트 엘로힘, 다아트 야훼!를 외쳤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지적으로 인식하여서 알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느껴보고 경험하여서 알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못 했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지 않았던가요당신은 당신이 믿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을 느끼고 알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밖에 계시는 나의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성령 역사가 없다면 결코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성령께서 감동 시켜 주실 때에 우리의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을 수도 있고 우리의 손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만지면서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욥은 그의 지긋지긋한 고난을 이겨 낸 후에 이렇게 고백했지요. 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목사나 영적인 리더가 가르쳐 주던 말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이전에는 그렇게 알았는데, 지금은 무엇이라고요? 실제적으로 성령을 체험하고 나니,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금요기도회를 통하여 성령을 체험하므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저 어두움의 세상, 악한 세상, 타락한 세상에서 신앙을 잃어 버리지 않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땅에 계시던 때에 실로암 못 가에서 날 때부터 시각 장애자로 살던 청년을 우리 주님이 치료했지요. 요한 복음 9장에는 그가 어떻게 눈이 띄어 지게 되었는 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 날 우리 주님이 그를 만났고,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겨서 진흙에 자기의 침을 뱉아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으로 내려가서 그 연못 물에 눈을 씻으라 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가 주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더니 주의 말씀대로 눈이 치유되어서 밝은 눈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났지요. 무엇 때문에 이런 기적이 일어났나요? 진흙에 눈을 치유하는 성분이 들어 있었나요? 아니면 실로암 연못 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그런 성분이 들어 있나요?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 났던 이 사람의 치유사건은 신비의 물질 때문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시각 장애자를 실로암 못가로 보내시는 예수의 능력이 있었고, 그 시각 장애자가 예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런 기적이 별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바로 안식일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예수와 그 시각 장애자가 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불러다가 심문한 후에 출교해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는 메시야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불구의 눈을 고쳐서 보게 만든 분이 그리스도라고 공고백을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메시야로 즉 그리스도라고 공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출교 조치를 당했습니다. 출교는 무엇입니까?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사회적으로 분리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과의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한다면 법원으로부터 접근 금지 명령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바로 출교조치입니다왜 이 사람이 이런 출교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런 신앙을 고백을 했을까요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20 30년간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자로 살아 왔는데, 그 눈이 지금 열려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빛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분명한 체험을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지 않았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목에 칼이 들어 온다고 할 지라도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신앙고백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경험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서 말입니까? 여기 금요 기도회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몸으로 느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느끼고 체험한 하나님을 이웃에게 분명한 말로 증언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옛날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목숨을 포기 하고 신앙을 지켰을까요? 보다 분명한 하나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밖에 엄연히 살아 있는 그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그 하나님을 목숨연장 때문에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지만, 먹구름 위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 밖에 우리 하나님이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성적으로 안 신앙으로는 그 신앙 때문에 고난의 풍랑이 불어 올 때에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은 성령 강림 밖에는 없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이미 성령을 받으신 분들은 성령의 재 충만을 받으라! 이것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지상의 모든 교회를 향하여 말씀 하시는 명령입니다. 5: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오늘 이 자리에 성령께서 가득히 임재해 계십니다. 닫힌 마음을 활짝 열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세상 것들을 다 내려 놓으십시요. 내 속에 있는 모든 죄악들을 인정하고 우리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김을 받으십시요. 그러면 깨끗한 그 그릇에 우리 주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 따라서 간구하면 우리 주님이 그대로 행하십니다

 


켐연장

2016.11.16 06:21:44

2016년 11월 11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111120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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