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55

금요기도회 :10/28/2016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433장 귀하신 주여!

 

1. 어떤 할머니가 난생 처음으로 큰 비행기를 탔습니다. 할머니의 집이 제주도인데 좌석이 이코노믹 클레스였습니다. 3등칸은 복작복작했습니다. 할머니가 화장실에 갔습니다. 삼등칸 화장실에 다녀 오면서 보니 2등칸은 넓은 좌석일 뿐만 아니라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자기 자리인 3등칸으로 가지 않고 그만 2등칸 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스튜디어스가 와서 할머니가 자기 자리로 가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넒은 자리를 나두고 왜 내가 그렇게 복작복작 거리는 좁은 자리로 가야 하느냐고 야단법석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요즈음도 자주 목격됩니다. 한복입고 갓 쓴 할아버지가 매표소 앞에서 표를 사는데 길게 늘어선 줄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매표소 입구에 쓱 들어서서는 표를 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매표소 아가씨가 할아버지 저 줄 뒤에 가서 서서 순서를 지켜 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그 말이 통하나요? 안 통하지요비행기 안에서 스튜디어스가 참 난감한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에 2등칸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신사가 보던 신문을 잠시 접어 두고 할머니에게 와서 귓속말로 소근소근 몇 마디 말을 하자 할머니가 일어나서 불이 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신사가 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요할머니, 제주도 가시지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 신사가 할머니 여기 앉아 계시면 제주도 못 가고 부산가게 됩니다. 여기 앉아 계시면 제주도가 아니고 부산 간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자기 자리로 부랴부랴 갔다는 것 아닙니까이것이 무엇이라고요? 지혜이지요. 여기에서 이게 도덕적으로 그리니 맞으니 말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못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지혜는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지 않은 채로 목적을 이룰 수가 있지요. 무지한 할머니를 설득 할 수 있나요? 없지요. 그렇다고 강제로 할머니를 삼등칸으로 보낼 수 있나요? 이런 지혜가 우리들에게 있으면 좋겠지요.

 

2. 우리는 어떤 신분? 영적인 파수꾼이다33:1-9(3:16-21)

 

파수꾼! 참 좋은 단어입니다. 이단들이 이런 좋은 단어를 선점해서 사용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단어를 시용하는 교회를 사람들이 저 교회는 이단이 아닌가 하면서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의 올해의 표어가 남은 자가 되게 하소서인데, 지난 번에 박용규 목사님이 오셔서 우리 교회 주보를 보면서 제일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이 교회가 이단일 수도 있겠다. 만약에 이단이 아니라면 참 강하고 좋은 교회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처음에 들었다고 말씀을 하더군요. 다행이 우리 교회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였다고 말 하더군요. ‘남은자라는 용어도 이단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단들이 이렇게 좋은 성경상의 단어를 자기들을 위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바른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길에 걸림돌이 되지요영적인 파수꾼이것도 참 좋은 용어 아닙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거든요.

 

파수꾼이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망보는 사람인데, 보초를 가리킵니다. 군대에서는 부대가 밤에 잠을 잘 때에 막사 안팎에 보초를 세웁니다. 부대의 안전을 위하여 군대에는 불침번이라는 것이 있는데, 보초들이 그것을 감당합니다. 보초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보초가 초병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잠을 잔다면 큰 일이 나지요. 그래서 군대에서는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초의 경계 근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보초가 한 순간 방심하면 잠 자고 있는 부대 전체가 적의 기습을 받아서 몰살 당할 수도 있거든요.

 

이와 같이 영적인 파수꾼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파수꾼은 누구를 위한 파수꾼인가? 세상 사람들을 위한 파수꾼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파수꾼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공동체인가? 야곱의 12아들로 구성되어 있는 혈연 공동체인가? 아니지요. 야훼를 믿는 신앙으로 하나 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신앙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세웠나요? 영적인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경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 그것을 미리 알고서 알려야 하는 역할을 파수꾼이 해야 합니다

 

그 예를 오늘 본문은 이렇게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지은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여서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파수꾼이 알았다면 그에게 파수꾼은 그 사실을 알리면서 경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파수꾼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면 살게 되겠지만, 회개하지 않고 자기의 고집대로 죄의 길로 계속해서 걸어 간다면 반드시 죽게 되겠지만, 파수꾼에게는 하나님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는 파수꾼의 역할이 무엇인가요? 예언의 능력, 예언의 은사를  가리킵니다. 예언이 무엇인가? 장래에 일어 나는 일을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알아 내는 일이 예언입니까? 아니지요. 공동체나 성도들 각자의 삶에 숨겨져 있는, 인식되어지지 않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것을 예언의 능력, 예언의 은사라고 부르지요.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도 일종의 예언입니다그런데 이런 감추어져 있지만 인지 되지 않고 있는 죄악 때문에 공동체나 성도들의 개인의 삶에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런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의 징계이지요. 예언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먼저 알게 되지요.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그 죄를 인식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면 고난과 시련이 사라지게 되지요. 이런 신약 시대의 교회 안에 예언 은사로 인한 사역이 비일비재 하였지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방언을 많이 합니다. 이제 한 단계 더 높은 은사인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기를 바랍니다고전 14: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고전 14:39<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지은 일이 드러나게 되면, 무엇을 하라고요? 죄를 지은 자를 찾아가서 무엇하라고요? 바로 잡아 주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잡아 주라는 말은 무슨 소리입니까? 우선 이 단어의 의미부터 살펴 보아야 합니다. 바로 잡는다라고 번역된 이 그릭 단어는 카탈티조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이 단어는 갖추다, 회복하다, (그물 같은 것)을 수선하다. 뼈가 탈구할 때에 제자리에 넣어주다라는 등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회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회복하다 바로 잡는다 교정하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런 일을 하지면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하지요이런 일을 할  때에 어떤 심령과 자세로 해야 하나요? 온유한 심령으로! 주장하는 자세로, 고압적인 자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그리고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 나도 저런 시험에 들 수가 있다. 조심해야 겠구나라고 말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는 달라라고 교만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죄에 대한 시험과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악에 대하여 경계해야 하면 죄에 빠진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3. 사무엘 상4:1-11

 

이 전쟁을 아벡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싸움입니다. 블레셋은 아벡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진영을 꾸렸습니다. 1차전에서 이스라엘이 패전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4천명이나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패전의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3절에 기록되어 있지요. 여호와께서 우리로 패전케 했기 때문에 우리가 패전했다. 패전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패전의 원인이 하나님을 그 전쟁 가운데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쟁에 계셨더라면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패전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은 했습니다. 전략과 전술의 문제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전쟁 가운데 이스라엘 군대 가운데 없었기 때문에 패전했다. 전쟁의 진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요? 영적인데 있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2차전에서는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모시고 나가다그러면 그 법궤가 전쟁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것이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언약궤와 함께 전쟁에 나왔습니다. 2차 전에서는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는 진작 되었지만, 장로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2차전에서도 패전했습니다. 패전 결과는 법궤도 블레셋 군대에 빼앗겼고, 또한 제사장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고, 이스라엘 군대는 3만명이나 죽었습니다. 엄청난 참화를 입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참화를 겪었는가? 우리가 이 사건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구약에 일어난 사건은 모두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그 사건들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우리의 삶에 일어나지 않게 하겠지요. 만약 당신이 이스라엘의 장로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우선 장로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법궤가 신통력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런 믿음을 오늘날은  <부적신앙>이라고 부르지요. 이스라엘 장로들은 오래 전 옛날에 법궤로 인한 승리의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영도하에 광야에서 40년간 방랑생활을 할 때에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진 친 곳 한 가운데 성막이 있고 그 안에 법궤가 있었지요. 성막-법궤 위에 구름 기둥이 언제나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막 위의 구름이 떠 올라서 이동을 하면 이스라엘도 구름을 따라 이동했었지요. 그리고 나서 구름이 머무르면 그 자리에 이스라엘이 진을 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0 36-37절에는 모세가 이런 기도를 했지요: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후대에 들어 와서는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법궤가 범람할 정도로 콸콸 흘러 내리는 요단 강에 들어서자 요단 강물이 흐름이 끊기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자 곧 여리고성을 정복하지요. 이 여리고성은 성곽을 가지고 있는 견고한 성읍이었습니다. 이 여리고성을 어떻게 무너뜨렸나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리고성을 일주일간 13바퀴를 빙빙 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서 여리고성을 걸어서 돌았지요. 그리고 나서 함성 구호를 질렀을 때에 여리고 성벽이 모두 무너져 버렸습니다. 법궤가 이런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기적을 기대하면서 장로들은 법궤를 전쟁터로 모셔 가기를 주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장로들의 영성이었습니다. 법궤가 무엇입니까?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상징물입니다. 그것 자체는 아무런 능력이나 힘이 없습니다. 그런 법궤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영적인 무지를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무지가 3만명이라는 애궂은 이스라엘 백성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법궤 자체가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신앙을 무엇이라고? 부적 신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무당들로부터 부적을 사서 몸에 부착하거나 집에 놓아두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믿지요. 부적 자체가 어떤 특별한 능력을 나타낸다고 믿지요. 이것을 미신이라고 말하지요.                     구약 시대 내내, 왕국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부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유다와 예루살렘이 주전 586년 망했지요. 나라가 멸망할 이 즈음에 당시의 유대인들도 부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만 건재해 있으면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어떤 큰 능력을 발휘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는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은 믿었지요. 이것이 무엇이라고요? 부적 신앙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상징물인데도 그 성전 건물 자체가 어떤 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영적 무지 속에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들 그리스도인은 이런 부적 신앙에서 자유로운가요? 십자가 부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를 목거리에 두르고, 또는 차에 십자가를 부착하고, 집에는 거실에도 십자가를 붙여 놓았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평안하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자기는 잠을 잘 수가 없데요. 대단히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부적 신앙에 감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임재에 대한 가견적 표징일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실재가 아니지요. 십자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진다는 분은 십자가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분입니다. 십자가가 눈에 보이던지 안 보이던지 우리는 십자가 뒤에 계시는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라는 형상을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그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 십자가는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아벡 전투로 돌아가서 우리들이 그 당시의 장로들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하시겠습니까나는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물어 보고 싶습니다. 법궤를 전쟁터로 내 보내는 대신에 법궤 앞에 엎드려 통회하면서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서 전쟁에 개입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우리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고 있었던 여호수아에게로 돌아가 보지요. 여호수아는 법궤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법궤를 통하여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이성을 공략하게 되었습니다. 그 성은 작은 성이었기 때문에 군사 3천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수월하게 아이성을 정복했나요? 예상과는 달리 패배했습니다. 사람들이 죽고 패전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법궤를 전쟁에 내 보내서 여리고성에서 일어났던 그런 기적을 도모했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법궤 앞에 금식하면서 엎드려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전쟁에 패배한 원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원인 무엇이던가요?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요. 여리고성에 있는 모든 것을 헤렘하라고 했는데, 아간이 탐욕 때문에 금덩이와 시날산 외투를 훔쳐서 숨겼습니다. 모두 불에 태워 없애 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탐욕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훔쳤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졌습니다. 이 문제를 여호수아는 해결했습니다. 아간과 그의 가족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소유물들을 돌로 치고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이성 2차 전투를 했지요. 이번에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아이성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법궤를 앞세우고 돌진해 갔다면 어떤 결과를 맞았을까요? 아벡 전투 때처럼 참담한 패배를 맞았을 것입니다.

 

/어떤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영적인 눈을 가지고, 영적인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은 더욱 눈 밝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깨어지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진리에 부합되는 행동인지를 우리는 성경을 열어서 살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정책과 교회의 활동--- 모든 일들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가를 확신해야 합니다말씀을 열어 놓고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교회 봉사 활동을 하기 전에 먼저 말씀으로 무장되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에베소서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지혜와 계시의 영이 무엇이라고요?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에 우리의 어두운 영안이 밝아 집니다. 영안이 밝아지면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불의한 일인지는 남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냥 자명하게 알아집니다. 그런 밝은 영으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열어서 공부하면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영적으로 자라나기를 바랍니다베드로후서 3: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다윗의 경우를 한 번 더 볼까요?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 왔습니다. 벧세메스라는 곳에 법궤가 돌아 왔고,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법궤가 약 70년 정도 있게 되지요. 이 때가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이 된지 10년이 흘렀을 때입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기 위하여 국가적인 제전을 준비했습니다. 다윗은 삼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동원했고, 악기를 다루는 찬양대를 세웠고, 새 수레를 만들어서 수레에 법궤를 싣고 운반의식을 집행했습니다. 사람 눈에는 굉장한 정성을 들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소 달구지에 법궤를 실어 운반하던 도중에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땅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웃사가 손을 대었고 그것 때문에 웃사가 죽었습니다. 법궤 운반 예전은 이 사건으로 망쳐 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지 못하고 어디에 두게 됩니까? 오벳에돔의 집에 임시적으로 머물게 합니다. 석달을 지낸 후에 하나님께서 오벳 에돔의 집이 복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게 되지요왜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성대한 법궤 운반 예전에 브레이크를 걸었나요? 운반 예전이 영적으로 볼 때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법궤를 운반 할 때에는 반드시 레위인들이 그것을 궤에 끼워서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명했습니다. 옛날 우리 조선 시대에 가마행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했습니다.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소가 끌어서 옮기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었지요. 영적인 무지가 불어온 참화였습니다이런 실패의 원인을 다윗이 나중에는 알게 되지요. 그래서 오벳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 궁으로 모셔 올 때에는 제사장들이 궤에 메어서 옮기게 되었지요

 

/오늘 이 시대 가운데서 우리들도 영적인 깨달음이 없다면 이런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손실을 보게 됩니다. 그 후에야 바르게 됩니다. 레슨비가 많이 든다는 말입니다. 그런 레슨비를 지불하지 않고서도 바른 길을 찾아 행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눈 밝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해야 하는 일,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겠지요. 가정으로서도 그렇고, 또한 교회 일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해서는 안되는 일,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는 자명합니다. 그런 교회 일을 할 때에 어떤 마음 가짐, 즉 어떤 영적인 원리를 가지고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를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중요시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손으로 장로들을 뽑아서 세웠고, 당회를 만들었습니다. 당회원들이 영안이 밝은 자들이 모두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당회원들은 켐연장 교회의 무엇일까요? 눈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밝히 보고 켐연장 교회를 인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눈 어두운 자가 되면 뒤 따르는 분들이 고생을 하게 됩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구덩이에 빠져서 헤메기도 하지요. 켐연장 교회가 바른 길로 인도 되기 위해서는 당회가 진리 가운데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교회의 어른들인 당회원들이 영안이 밝은 자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켐연장

2016.11.10 05:49:44

10월 28일 금요기도회 설교 파일은 기술적인 문제로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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