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52

금요기도회 :10/7/2016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461


1.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보는 :자기성찰! 일을 있다면 기독교 신앙 밖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뛰어난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본다는 것은 머리 회전이 된다고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머리 회전이 되는 사람을 영리한 사람이고 부르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지요. 자기 밖에서 자기를 있는 이런 지혜는 영적인 지혜이지요.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보는 훈련이 안된 사람은 기독교 신앙 안에 있더라도 우매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자기 밖에서 자기를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남의 입장에서 자기를 보아야 하는데,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입장에서 자기를 보아야 하는가? 우리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영안이 열려 있어야 한다.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이라는 영적인 거울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말씀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울이 선명합니까? 거울에 오물이 많이 묻어 있으면 선명한 상이 맺히지 않습니다.

 

지지난 설교---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을 우리 주님이 책망하셨다. 무엇이 없다고? 자기성찰이 없다고 말입니다. 3: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지가 없나요? 다섯 가지가 없습니다. 오무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의 눈은 외면적인 부요함 만을 보았지요. 금융산업이 발달 되어 있어서 집집마다 돈이 많습니다. 목축업이 발달 되어 있어서 양털로 고급 외투를 만들어 입고 있습니다. 또한 효과 좋은 안약을 제조해서 막대한 수입을 얻었습니다. 외적인 삶은 풍요했지만,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자신들의 내면 세계를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내면 세계를 보고서 말씀하시지요. 특별히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말입니다우리 하나님의 눈에 비친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의 모습은 어떻다고요? 5다섯 개의 단어로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번째가 라오디게아 교회는 곤고한 교회라는 말입니다. 곤고하다는 말은 비참하고 불행한 모습을 표현할 때에 쓰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wretched! 사도 바울이 7:24절에서 자신의 모습을 말할 때에 단어를 썼습니다. 7: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이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선을 행하기 보다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면서 했던 탄식의 말이지요. 다멕섹 도상에서 우리 주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율법을 따라서 살았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그가 율법을 알았기에 율법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율법의 의를 모두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율법을 행하면서도 율법의 온전한 요구를 모두 이루지 못했기에 자신은 죄인이고 자신은 심령이 공허함을 느끼면서 살았다는 고백을 하고 있지요. 선을 알고는 있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비참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비참한 자신의 모습이 8:1-2절에서는 승리의 노래로 바뀝니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 해방하였음이라. 다멕섹 도상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의 모든 비참한 모습에서 벗어 있게 되었지요.   

 

/두번째가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련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련하다는 것은 가엾다, 불쌍하다는 말이지요. 영어로는 miserable!  고전 15;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만약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 끝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죽음 앞에 있을 지라도, 또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어서 행복한가? 바로 죽음 이후에 부활의 세계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예수의 부활이 있었고, 또한 우리의 부활이 역사의 마지막 날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불쌍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miserable사람들이다고 평가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 것들에 취하여 있으면 내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세상 행복이 가득해도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고요?그는 80-90년의 찰나적인 행복을 누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세는 영원한 세계인데, 세계에서 행복을 영원히 누릴 있다는 소망이 없다면 불행하지요.

 

/세번째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난한 교회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난한가? 그릭에는 가난하다는 단어가 가지 있는데, 하나는 페네스(πένης)라는 단어를 쓰는데 단어는 입에 풀칠 정도의 가난입니다. 이웃과 비교해 보아서 가난하다는 뜻인데 상대적인 가난입니다. 그럭저럭 살아 수는 있는 가난입니다. 몸을 굴리면 먹고 마시는 것은 해결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사용된 프토코스( ptwcov") 단어는 입에 풀칠도 못하고 빌어 먹는 신세입니다. 절대적 빈곤을 가리킵니다. 이웃의 온정이 없다면 생존할 수가 없는 그런 가난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절대적 가난과 상대적 가난의 차이를 모르는 분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절대적 가난이라는 말은 돈을 있는 능력도 없고, 집에는 톨도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누군가에게 빌어서 동냥을 얻어야만 살아 있습니다. 동냥도 몸이 아파서 자리 보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못하기에 누군가가 밥을 지어서 먹여 주어야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절대적 가난이라고 부릅니다. 상대적인 가난이라는 말은 이렇게라도 설명이 됩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압구정동에 현대 아파트는 부자촌이지요, 거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980년대 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하여 구제기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구제 기금을 누구에게 줄까 하다가 학교내의 제일 가난한 친구에게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제 대상이 아이는 학교에서 제일 가난한 아이인데, 아파트 평수가 제일 작은 살았고, 자가용도 가장 싸구려 차인 포니를 타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도라면 동네에 가면 부자라고 분류되는 사람인데, 어마어마한 부자들 속에 끼여서 살다가 보니 무엇이라고요? 구제를 받아야 하는 가난한 자가 되었다는 아닙니까? 이런 가난을 상대적 빈곤이라고 부르지요. 오늘 본문은 이런 상대적 가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는 관점은 절대적 가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엇이 없는 가난뱅이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불로 연단된 금을 사라고 권면하고 있지요. 금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금보다 귀한 나의 믿음! 불로 연단된 믿음은 우리의 참된 보배입니다. 믿음에 부요자들이 됩시다.

 

/네번째로 우리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나요? 눈멀었다tuflo;"말입니다어떤 눈입니까? 육체적인 시력과 영적 시력이 있지요. 육체적인 시력을 잃은 사람을 우리는 시각장애자라고 부릅니다. 맹인들은 실명했기 때문에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지 못하고 우리 주위에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물체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수는 없는 분들입니다. 반면에 영적인 시력이 없는 분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전혀 감지하지를 못합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우리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실존 세계라는 것을 느끼면서 삽니다. 영안이 감겨 있는 분들은 전혀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느끼지를 못합니다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이 확실하게 살아 계시는 데도 주님을 바라 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시각 장애자들입니다. 요즈음 시력이1.0이나  2.0 되는 좋은 사람들 가운데 시각 장애자가 많습니다. 시각 장애자는 수는 있지만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아야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시각 장애자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것은 아예 보려고 하지요우리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사람 권력에 멀었다. 소리가 무슨 소리입니까? 권력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쏟거나 보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권력을 손에 쥐여 준다면 자기 영혼도 팔아 먹을 사람들이 권력가들이지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주님을 바라 보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으로 시각 장애자들입니다. 누구와 비슷합니까? 우리 주님에게 책망을 많이 받았던 바리새인들과 비슷하지요.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시각장애자 취급을 했지요.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크게 미워했지요. 바리새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종교인들인데, 메시야인 예수를 앞에 놓고도 영적인 시각으로 예수를 바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오늘 켐연장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눈뜬 자들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육신의 눈은 감겨 있으나 영의 눈이 띄여져 있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의미를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노라그래서 우리 주님이 영의 눈이 멀어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하여 안약을 사서 발라서 보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지요


/다섯번째로는 벌거벗었다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양모로 되어 있는 명품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벌거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데르센 동화집에 나오는 벌거숭이 임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초등학생들의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이지요두명의 사기꾼들이 사람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서 사람들과 임금의 마음을 속였지요. 그러나 어린아이에게서 임금이 벌거숭이라는 실상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아이들의 눈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이 천국이 그런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지요. 우리 눈에는 이물질이 많이 끼어 있지요. 편견, 고정관념,이기심,눈치와 입장, 교만과 자만 등등,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누구에 의하여 그들이 영적으로 벌거숭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까? 우리 하나님에 의하여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옷을 사서 입으라고 권면하시고 있지요. 흰옷은 성도의 영적이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가리키지요.


2. 화목/화해에 대하여! 9:50<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화목하라는 의미는 싸움과 분쟁이 없이 평화를 유지하라, 평화롭게 살아가라는 명령이지요. 문구는 개의 명령이지만, 구절은 명령으로 둘째 구절은 결과절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그러면 너희가 서로 화목하게 되리라! 예수의 제자들, 이것은 예수의 공동체를 의미하지요. 평화를 공동체 안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소금 나트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함께 모일 때마다 소금을 그들 앞에 놓아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성도들이 각자 마다 소금 주머니를 몸에 차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소금 자체가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예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소금을 두라는 의미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 우리 주님이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요즈음도 그렇거니와 시대에도 교회는 다투고 분쟁하면서 싸움질을 왔습니다. 외적으로 싸움을 걸어 오는 사탄과 악령과의 싸움 보다는 내부적으로 형제와 형제 간에 자매와 자매간의 싸움으로 지역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상처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교회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너희 안에 소금을 두라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9장을 찬찬히 읽어 보면  지옥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소금 이야기를 꺼내면서 9장이 마루리 됩니다. 그럴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이전 컨택스트를 보면 우리 주님이 그랬는지를 있습니다. 이전 컨택스트를 보면 제자들이 논쟁을 벌렸습니다. 논쟁점은 누가 크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크냐는 말은 도토리 키재기와 같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삼삼오오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누가 수석 제자인가하는 문제로 서로 쟁론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싸움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뭇사람 위에 첫번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어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분쟁에 재갈을 먹이기 위하여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명하셨지요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싸움과 갈등과 분쟁이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그렇습니다. 싸움과 분쟁이 없이 평안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역 교회에는 언제나 분쟁과 싸움과 갈등이 끊일 없습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평안을 누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교회가 평안 때에도 갈등이 생기는 어쩌나 하는 염려 속에서 평안을 누리지요.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데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놓지요. 그러기에 좋은 교회라는 말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교회는 성도들 간에 분쟁과 갈등이 사라진 상태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분쟁과 갈등이 있지만 이내 분쟁은 해결 되어서 평안에 도달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셨는데, 하나 되게 하심을 분쟁과 갈등을 해결함으로써 굳게 지켜 나가기 위하여 힘쓰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켐연장 교회는 바로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의 공동체들을 위하여 기도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도문의 핵심은 성부 성자 성령이 온전히 하나이듯이 예수의 공동체도 하나 되게 주소서라고 기도했지요. 2천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기도는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하여 힘써야 하고, 또한 지역 교회들 하나 하나가 또한 내부적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 됨을 방해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의 고집과 우매함이 아니겠습니까? 생각과 고집 그리고 자존심을 꺾지 않기 때문에 일치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것을 내려 놓으면 주님의 뜻과 주님의 생각으로 교회가 하나 되어지지요.


/우리 주님이 누가 크냐하는 논쟁 상태에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말씀을 하셨는데,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4:6<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사람이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성도 간에 서로 다른 생각과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주장할 때에 어떻게 하라고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이야기 하라! 그리고 무엇을 가지고?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말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금으로 맛을 낸다는 말은 지혜롭게 말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지혜가 어디에서 솟아 나나요?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경험하여서 먹게 되면 세상 경험과 지식이 많은 노인들보다 더욱 지혜로워지게 됩니다. 말을 때에 <은혜와 지혜> 있으면 내가 무슨 말을 이웃에게 해야 하고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하는 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분쟁과 갈등이 사라지고 화해가 일어납니다. 시대에는 분쟁하던 그룹이 언약을 체결하고 공동식사를 합니다. 공동식사를 마치면 친구가 됩니다. 왜냐고요? 공동 식사를 하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소금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소금을 무엇이라고 불렀나요?  <소금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레오나드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나는 그림에 대하여 문외한 이지만 전문가가 그림에 대해서 해설해 놓은 글을 읽으니 그림이 그리도 의미 심장하고 가치 있는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테이블 위에 소금 그릇이 놓여 있었는데, 소금 그릇이 엎어져 있습니다. 누가 소금 그룻을 엎었나요? 가룟유다가 소금 그릇을 넘어 뜨렸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소금이 언약의 소금을 의미하겠지요. 언약을 가롯유다가 깨뜨렸음을 그림으로 나타내 주었습니다. 스승을 배반함으로써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소금 그릇을 엎음으로써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성소에서 제물로 제사를 어떻게 드렸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의 종류가 다섯 가지나 있지요:번제,소제, 속죄제,속건제,화목제! 모든 희생제사에는 반드시 빠지지 말아야 하는 물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금입니다. 소금을 동물 희생 제물에 쳐서 제단에 올려서 불사릅니다. 2:13<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동물 희생을 경제적인 여유 때문에 드리지 못하면 밀가루를 대신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소제라고 부르지요. 곡물 제사말입니다. 어떤 제물을 드리던지, 동물을 드리던, 소제 식물로 드리던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소금입니다. 또한 성소 안에 향단에서 향을 사릅니다. 향을 제조할 때에도 소금을 재료로 섞어서 만듭니다. 30:34-3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께 성소에서 드리는 제물들과 향에도 소금이 사용되었을까요? 이유는 성경이 침묵을 하고 있기에 우리가 유추해 밖에 없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고,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소금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생성된 이래로 지금까지 소금은 짠데 맛이 변했습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소금을 고기에 치거나, 우리가 소금을 반찬 만들 때에 사용하여서 맛을 내듯이 하나님께도 그런 의미를 담고서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소금을 드린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소금의 맛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에 18:19절에서와 대하13:5절에서, <영원한 소금 언약>이라는 용어가 출현합니다 18:19절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전한 후에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이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가슴 살과 넓적 다리의 살은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몫입니다. 이것을 영원한 소금 언약이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대하 13:5절은 아사 왕이 했던 말인데, 여로보암이 반역하여서 이스라엘을 창건하고 군대를 모아서 유다왕 르호보암의 아들 아사왕에게 싸움을 걸어 왔을 때에 했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었다라고 말했지요. 소금은 단순히 소금이 아니라 소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우리들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2:1-2<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구약의 희생제물에 소금을 쳐서 제단에 올렸듯이 오늘 우리들도 영적인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영적인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야 합니까? 소금이 들어가야 합니다. 소금 언약!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지요.  대하 13:5절은 아사 왕이 했던 말인데, 여로보암이 반역하여서 이스라엘을 창건하고 군대를 모아서 유다왕 르호보암의 아들 아사왕에게 싸움을 걸어 왔을 때에 했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었다라고 말했지요. 소금은 단순히 소금이 아니라 소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벧전 4:10-11<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우리 주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 상에서 이루시고, 이것을 성경은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소금 언약인 신약 성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깨달아 알아서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에 교회 안에는 평화가 깃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 사이에 막힘 없이 흘러 가게 해야 것이고, 또한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우리들 사이에 말씀이라고 부를 있는 소금 언약을 깊이 알게 때에 우리의 모든 분쟁과 싸움과 갈등이 해결 되어 것입니다.


켐연장

2017.01.30 05:58:35

2016년 10월 7일 152-금요기도회 음성 설교는 기술적 문제로 올리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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