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45

금요기도회 :8/12/2016

대표기도:대표기도 +선교부

찬송가:304장과 406

 

1.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서 인용:

그때마다 조금씩 가벼워졌다

내 한숨을 먹으며 자란 토란잎은

 내 근심거리보다 얼굴이 더 커졌다

 저 넓은 잎에 무거운 마음을 많이 기대었다

 녹색의 이파리는 내 어두운 얼굴을

 이리저리 굴리다  바닥에 쏟아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가벼워졌다

 

- 한순의 시집《내안의 깊은 슬픔이 말을 걸 때》에 실린 시〈토란잎에게〉(전문)에서 -

 

얼마나 간절했으면  토란잎을 보며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 했을까요.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일도 공부도 신나고 즐겁게 웃으면서  할 수 있습니다.

무거워지거든 토란잎을  바라보십시오라고 고도원의 아침 편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고향 집인 영주 집의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토란 잎을 보면 토란 장국이 생각나던데, 이 분은 토란 잎을 보면 자유, 안식이라는 것을 연상하는 가 봅니다. 여러분은 넓적한 토란 잎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아무 생각도 안난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토란 잎을 한번도 못 보신 분들도 있겠지요.

 

온갖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 가는 우리들-악악 소리가 절로 나오지요. 그 짐들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태산보다 그 짐이 더 무거워 보입니다. 그 짐에서 자유롭고 싶은데, 어떻게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요그 해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토란 잎을 바라 볼 때에 자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자유를 느낍니다. 할렐루야~아멘!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와 안식을 주지요. 우리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세속적인 짐, 스트레스로부터 가볍게 만들어 주고, 또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짓는 무거운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만들어 주지요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있는 죄책감:하나님 말씀대로 못 살았다는 부담감 때문에 마음이 매일 매일 무겁습니다. 그런 우리의 짐들을 우리의 주님이 대신 져 주신다. 68: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그 짐들을 우리 주님이 없애 버리시는가? 아니다. 세상 살이 동안에 짐이 없을 수가 없다. 불신자나 신자나 상관없이 짐들은 인생 살이에 있어서 언제나 있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하시면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괴로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여서 그 짐들이 기적같이 나에게서 분리되어서 없어지는가? 아니다.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서 서 있을 때에 주께서 내 곁에 오셔서 그 짐들을 대신 져 주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대신 져 주시는 동안 나는 쉴 수가 있지요. 바로 이런 자유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한 평생 주님 뒤 따라 가는 동안 우리 주님이 내 짐들을 대신지고서 내 앞에 가시기에 나는 룰룰랄라하면서 따라가게 되지요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내 삶에서 나를 내리 누르는 무거운 짐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 주님이 날 대신해서 그 짐을 져달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영적인 쉼과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가지고 기도해야지, 그냥 무턱대고 기도한다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 우리 교회가 창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회가 30-40명 정도 였을 때에 예배를 마치면 친교가 있었는데 어느날 턴킨 도넛으로 친교 시간을 하게 되겠습니다.30-40명이니 던킨 도넛 4-5박스 정도면 족했습니다. 친교 시작하기 전에 누군가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친교 시간에 도넛이 4-5박스인데 곧 두배로 던킨 도넛이 늘어나게 해 주십시요. 그런데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던킨 도넛이 친교 시간에 거의 던컨 도넛이 두배로 늘어 났습니다. 교인 수가 늘어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교인수는 그대로인데 배꾸러미가 커져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교인 수를 두배로 늘여 주십시요 이렇게 기도했어야 하는데, 그냥 도넛을 두배로 늘려 주셔요했으니 교인수가 늘어 나기 보다는 배꾸러미가 두배나 커졌다는 겁니다내 무거운 짐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보다는 내 짐을 대신 져 달라는 기도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6.25사변 당시에 어느 시골 할머니와 미군---무거운 짐을 주께 못 맡긴 예! 맡겨 버리라! 벧전5: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 주님의 말씀-6:25-32! 생활상의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 나는 방법-믿음의 기도! 비행기의 두 날개로 하늘의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 오르면 생쥐와 같이 우리의 영혼을 갈가 먹은 염려와 근심은 자연히 사라진다. 어떤 비행사의 예(쌍엽기를 타고 하늘을 나르던 시절)!

 

/5: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주님이 주신 자유! 영적인 자유이지요.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은 종의 멍에인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그 율법이 주는 무게 때문에 늘 눌려서 산다는 말이 아닙니까? 당신은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는가영적인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주님의 자유인데, 우리가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일이다. 8:31-32<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의 말씀을 많이 먹어야 겠지요. /모래가 바람에 날리나 물 속에 잠긴 모래는 바람에 날리지 않습니다.

 

예수의 경우-어떤 깨달음을 가지고 확신 있게 사셨나? 영적 자유!

사도 바울의 경우-어떤 깨달음을 가지고 유대주의와 대결하면서 이겼나? 영적 자유!

 

/33:27<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좇으시며 ‘(우리로 하여금 대적을)멸하라destroy’하시도다. 태산보다 더 무거운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고 있다고요? 안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 이것이 피조물 된 인생들의 안식처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렀나요? 너의 처소! 너의 거할 곳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마치면 돌아가게 될 처소가 하나님의 넉넉한 품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마치면 우리를 그 품에 안아 주십니다. 그 품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합니다. 에수 잘 믿어야 그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142절에서 우리 주님이 내가 너희를 위하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십자가 지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약속하셨지요. 저 하늘 저 위에 우리의 영혼이 쉬게 될 처소를 준비해 놓고 우리를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안고 난 다음에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행동는 우리 앞서 가셔서 우리의 대적을 친히 좇으십니다. 그리고는 큰 데미지를 입고서 도망치는 대적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멸하라고 명하십니다. 얼마나 쉬운 싸움인가? 이 싸움은 식은 죽먹기다. 골골 거리면서 다 죽어가는 사탄과 어둠의 영들, 적들을 섬멸하는 일이 아니던가요? 사탄이 우리를 무너지게 하려고 무거운 짐 위에 올라타고 우리가 쓰러지기를 기다리지만, 우리 하나님이 그 무거운 짐을 이시간 대신 져 주십니다. 그 짐을 우리 주님께 맡겨 보지 않겠는가? 그 무거운 짐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없다. 당신은 이 믿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내 짐을 우리 주님 대신져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으라그런 믿음이 없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부르짖으라. 변화산 아래에서 간질병 걸린 아들을 둔 부친이 외친 것처럼, 9:24<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렇게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부르짖기 이전에 내가 믿나이다는 고백이 있었다. 오늘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이 강단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짐을 이시간 우리 주님이 대신해서 져 주신다는 소리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도우소서라고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53:6절을 보라!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8:26-39/빌립과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무 장관인 내시와 만남에 대한 이야기. 어떤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볼 수가 있을까?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계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이 지구상에 있지만 마치 지구 상에는 나 혼자 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70억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70억명이 이 지구상에 있지만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나와 1:1의 관계를 맺으면서 사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육신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1/70억 만큼의 나누어진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는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이런 진리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유한 세계와 무한 세계가 다른 이유이지요. 유한 세계에서는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범죄 수사를 할 때에 알리바이를중요하게 여지기지요. 피고인이 범죄가 일어 났을 때에 그 범죄 현장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알리바이이지요. 알리바이가 통용되는 이유는 유한 세계에서는 한 사람이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무한 세계, 영적인 세계에서는 알리바이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유한 세계에서 우리들의 경험을 가지고 무한 세계인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지성과 철학을 가지고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계시를 통하여 밖에는 영계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밖에 없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지요. 세계 인구가  70억이  아니라 1, 10, 아니 100조의 사람이 땅에 있어도 하나님은 나와 1:1로 만나고 1:1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 이외에 다른 그리스도인과도 1:1로 만나시고 1:1로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랑을 오늘 본문은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만난 그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임을 잊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는 70억 가운데서 모두가 의인이고 구원 받은 자들인데, 나 혼자만 죄인이고 불의하다고 할 때에 나 하나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낼 수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의 세계를 헤치고 나의 주 예수께서 이 땅에 나를 구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빌립집사는 예루살렘 교회의 7명의 안수 집사 가운데 한 분이지요.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빌립더라 사마리아를 떠나서 어디로 가라고요? 26-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 가라는 길, 즉 광야길로 가라! 주의 사자가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주의 사자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성령께서 그렇게 말씀했지요. 이런 명령에 대하여 군말 없이 빌립은 그리로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할 수가 있지요. 사마리아 성에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데 왜 인적이 없는 그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이해가 안되는 명령입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사마리아성의 부흥을 뒤로 한 채로 광야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는?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권세 있는 내시를 만나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27-28절에 의할 것 같으면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 축제, 절기 예배에 참석했다가 병거타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내시는 성전 안에 들어가서 예배 드릴 수가 있었을까? 없었다. 이방인의 뜰인 성전 밖에서 성전 안에서 들려 오는 찬송과 기쁨의 소리만을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먼 길을 병거타고 올라 와서 한 주간의 축제를 마치고 고향 에디오피아로 돌아 가는데 어떤 마음일까요? 빈 마음, 허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그를 귀중히 보셨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으로 보셨다. 그래서 누구를 보냈나? 빌립 안수 집사를 보냈다. 우리가 빌립 안수 집사라면 어떤 반응 보여야 합니까? 하나님 지금 사마리아 성에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떠날 수 없습니다. 부흥을 통하여 주께로 돌아 오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지금 한 시간이 급한데 이것을 버려 두고 광야로 갈 수 없습니다이런 생각이 들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보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빌립에게 알려 주었기에 군말 없이 빌립은 광야로 갑니다. 뭔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하여 그 광야 길에서 하게 하실 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광야로 떠날 때에는 간다게 내시를 만나게 되리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냥 그 광야로 가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을 통하여 보여 주셨나?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 비유로만 그 사랑을 알려 주신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안수 집사 빌립을 통하여 말입니다15: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이 구절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죄 지은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일은 하늘에 가 있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의인 99명보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찬찬히 따져서 읽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이 구절의 그릭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하늘에서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회개할 필요를 가지고 있지 않은 99명의 의인들로 인한 것보다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인하여 하늘에서는 더욱 큰 기쁨이 있을 것이다. 하늘에 있는 의인들 99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 의인들인가? 땅에 있는 의인들 99명을 가리킵니다하늘에 있는 의인들은 완전하게 된 의인들인 반면에 땅에 있는 의인들은 여전히 완전하게 되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의인들입니다. 이들은 현재에는 죄가 다 사함을 받아서 눈에 띄지 않지만 조금 더 주님께 가까이 가면 죄가 드러나게 되는 그런 의인들입니다. 불완전한 의인들이지요. 그럴지라도 죄인들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것을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기쁨은 땅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의인들 99명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다는 말씀이지요. ‘하늘에서는이라는 부사구는 무엇을 꾸민다고요? 의인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동사를 꾸미지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성중에 많은 의인들을 그대로 두고 빌립으로 하여금 잃어 버린 한마리의 양인 간다게의 내시를 구원하기 위하여 광야로 보냈습니다. 아모스9:9절에는 이런 말씀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한 알갱이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품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나를 만드셨지요. 그냥 기계를 돌려서 찍어낸 제품이 아니지요. 무엇이라고요? 예술인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양복을 양복점에서 맞추어서 입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사이즈별로 기계를 돌려서 만들어 내서 팔려고 백화점에 진열해 놓았습니다. 모두 제품입니다. 그러나 저 다운 타운 같은 데 가보면 작품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무지 하게 비쌉니다. 옷 한벌에 만불 이만불합니다. 앙드레 김씨 같은 분들이 만든 옷들, 옷 같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무슨 천 조각을 얼기설기 걸쳐 놓았는데 그렇게나 비싸데요. 왜 비쌉니까?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만드셨는데, 우리는 제품이 아니라 작품입니다. 유사 이래로 나 비슷한 사람들은 있어 왔지만, 나와 DNA가 꼭 같은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입니다. 어떤 존재?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창조하신 유사 이래로 나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창조물입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피조물로서 창조했기에 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내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값을 내고 우리를 샀지요. 예수이 핏값은 돈으로 환산 할 수가 없지요. 나를 죄로부터 건지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 피흘려 죽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잃어 버렸던 우리를 다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창조로서의 하나님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구속으로서의 하나님의 소유까지 되었습니다. 얼마나 우리는 존귀한 존재인가? 우리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스탑하신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성령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심으로써 우리를 성령의 전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피로 값주고 사고, 그리고 우리 속에 성령을 보냄으로써 우리를 소유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중적인 소유입니다:창조로서의 하나님의 소유, 구속으로서의 하나님의 소유,성령의 전으로서의 하나님의 소유!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다! 누가 우리를 우리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있으랴? 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것! 창조와 구속만이 나타나 있지만 신약 시대로 오면서 우리는 성령의 전으로서의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43:4<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배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강한 분이 없습니다. 사탄 마귀 어둠의 영이 우리 보다 강하지만,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고 있기에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허물과 죄악 때문에 또한 오래 계속되는 고난과 시련과 환난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 받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생각은 누가 나에게 넣어 주었나? 사탄과 어둠의 영이 주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추방해야 하고, 그 생각 배후에 역사하는 어둠의 영을 추방해야 합니다12:19-21<보라 내가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야단스럽게 떠들다의 옛말)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 우선 상한 갈대는 목자들이 들판에서 양떼를 방목할 때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하여 갈대를 하나 꺾어서 <갈대 피리>를 만들어서 붑니다. 우리들도 이른 봄에 물오른 수양 버들 가지를 하나 꺾어서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듯이 말입니다. 버들 피리는 수양 버들 가지를 하나 꺽어서 비틀어서 수양 버들 가지의 등심을 빼내고 나면 껍질만 남지요. 칼을 가지고 끝부분을 잘 다듬어 주어서 입으로 불면 버들피리가 됩니다. 자 그런데 버들 피리는 나무 껍질로 된 것이라 조금 시간이 흐르면 말라서 버들 피리가 제 기능을 못합니다. 마찬 가지로 갈대피리도 그렇습니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내 목자가 만든 갈대피리는 너덜너덜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버리고 다시 갈대를 하나 꺾어서 갈대피리를 만들면 됩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손 때 묻은 그 갈대 피리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것을 버리지 않고 사용합니다. 이것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옛날에는 밤에 방을 밝히기 위하여는 농촌에서는 감람유라는 기름을 기름통에 붓고 거기에 심지를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온 방이 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심지마져도 불에 마모가 되어서 메퀘한 냄새를 내면서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보통은 심지를 새것으로 갈아 끼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기름을 보충해 주고, 심지를 손질하여서 다시 씁니다. 우리의 모습이 상한 갈대 피리와 같고 꺼져 가는 심지와 같지 않습니까?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비록 우리들의 모습이 이와같을 지라도 우리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빌립이 이 내시를 만난 다음에 예수와 복음을 전해 준 다음에 세례를 주고 서로 떠나 버리지요. 빌립은 빌립대로 내시는 에디오피아로 떠나지요.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수를 마음에 간직한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일이 에디오피아에 일어났을까요? 그 이후에 에디오피아의 고위층 관리인 이 내시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에디오피아는 무슬림 국가들로 휩싸여 있지만 놀랍게도 에디오피아 인구의 절반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이렇게 된 이유가 이 내시의 회심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있었을 때에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각 족속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에 성령 체험을 하고 난후 자기의 고향으로 흩어져 갔는데, 거기에 있는 여러 족속들 가운데 에디오피아에서 온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2:9-11절에는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려고 천하 각국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타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리사, 브르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네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데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16개의 족속들 중의 이 목록에 에디오피아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내시가 빌립 집사에 의하여 세례를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지요. 이 사람을 통하여 에디오피아에 부흥이 일어나서 오늘처럼 되었다고 보아야 겠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했더니 이러한 큰 변화를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나의 한 순종이 지금은 미미하지만 세월이 지난 다음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 하나님은 사랑이라. 요일 4:8,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 상에 마치 나 혼자 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쏟아 부어주고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무언가 하나님 마음에 들게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보상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남들과 비교가 안되는 선행과 공로를 쌓았고, 하나님께 충성 봉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대가로 나를 이쁘게 여기시는가? 결코 아닙니다. 약점도 많고 허물고 많고 죄도 많이 지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대가 없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나에게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요일3:1<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가)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we are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로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기 때문에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기뻐하기 보다는 내가 어떤 존재이기에 기뻐하는 기쁨이 충만해야 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70인 전도단에게 하셨던 말슴을 기억해야 합니다. 10: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어떤 기쁨이 충만하여서 한 세상을 살 것인가? 하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된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세상 즉 불신자들도 이런 신의 사랑을 받고자 몸부림친다. 모두가 이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 이 사랑을 사모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에 일본 전범들이  처형을 당하고 난 후에 그 미망인들이 돈을 걷어서 동상을 하나 건립했습니다. 동상은 평화를 갈구하는 염원을 표현했습니다. 동상 아랫 쪽에 글귀를 하나 넣었습니다. 그 글귀가 그릭단어:헤 아가페! 신의 사랑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아닌데, 그 미망인들이 신의 사랑을 희구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이 신의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세상 그 무엇을 다 가져도 참된 만족에 이를 수 없습니다. 늘 헐떡거리면서 살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때이다.


켐연장

2016.08.23 20:18:31

2016년 8월 12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6/08122016.m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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