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84

금요기도회 :6/2/2017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1. 지난 금요일-주일까지 전교인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전교인 수련회를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많은 분들이 솔선수범하여서 수고하고 봉사해 주셨습니다. 예년의 수련회보다는 단계 업그레드 성숙된 수련회였습니다. 수련회에서 각자가 맡은 일들을 책임 있게 그리고 성실하게 감당해 주셨습니다한편으로는 쉼을 누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충전되는 그런 시간을 가졌습니다강사이신 박정관 목사님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도 교회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강사 목사님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오늘 다시 한번 복습해 보고자 합니다. Review하면서 다시금 되새겨 보도자 합니다. 오늘은 수련회 들었던 말씀을 remind하는 시간입니다.

 

주신 말씀이 잠언 17:1말씀입니다:마른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화목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평화를 의미합니다. 가정에 가족 구성 간에 평화와 평온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제육은 희생 제물, 고기를 가리킵니다.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돈이 없어서 가난하더라도 가정에 평화가 있는 것이 돈이 많이 있더라도 가정이 불화하는 것보다 낫다 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가정을 원하십니까? 가난하더라도 남편과 아내, 아이들과의 관계가 화목한 가정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족 구성원들간에 긴장이 있고 싸움이 있고 화목이 깨어져 있더라도 돈만 넘치게 있는 가정을 선택하시겠습니까잠언 기자는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가정을 만들고 싶으십니까? 요즈음은 돈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 하고 있어서, 돈을 수십 원을 얻을 있다면 감옥 살이 해도 좋다고들 합디다


첫 날 주신 말씀이 잠언 17:1절 말씀입니다: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화목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평화를 의미합니다. 가정에 가족 구성 간에 평화와 평온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제육은 희생 제물, 즉 고기를 가리킵니다. 이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돈이 없어서 가난하더라도 가정에 평화가 있는 것이 돈이 많이 있더라도 가정이 불화하는 것보다 낫다 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가정을 원하십니까? 가난하더라도 남편과 아내, 아이들과의 관계가 화목한 가정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족 구성원들간에 긴장이 있고 싸움이 있고 화목이 깨어져 있더라도 돈만 넘치게 있는 가정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잠언 기자는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가정을 만들고 싶으십니까? 요즈음은 돈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 하고 있어서, 돈을 수십 억 원을 얻을 수 있다면 몇 년 감옥 살이 해도 좋다고들 합디다. 돈이 많고 적으냐에 따라서 행복하냐 안하냐를 판단하는 이런 세대에 당신은 어떤 가치 판단을 가지고 한 세상 살아 가는가? 돈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고 가족 구성들 간에 끈끈한 애정과 평화가 있는 가정을 갖고 싶을 것입니다. 이 잠언 구절에는 분명히 돈도 많고 평화가 넘치는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 상황을 투영하여서 읽으면 그렇게 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읽기를 Igesis라고 부르지요. 돈도 많고, 가정도 화평한 가정이 아이디얼 한 행복한 가정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수련회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제육 때문에 화목을 잃었다는 것은 변화는 것을 얻으려고 변하지 않는 가치 있는 것을 잃어 버렸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예 이것도 Igesis이지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하여 심지어 무엇까지 희생합니까? 우리에게 있는 하나 뿐인 것, 우리의 영혼마저도 큰 돈을 벌 수만 있으면 팔아 버리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자기의 하나 뿐인 영혼마저도 팔아 버린다면 돈 벌기 위하여 자기의 가정을 팔아 버리는 일은 쉬운 일이지요. 이런 분들은 그들의 생에 있어서 가치를 어디에 더 두고 있습니까? 영원한 것보다는 일시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영원한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영생이며, 천국이 아닙니까? 이런 것들보다는 무엇에 더 관심을 갖는다고요? 없어질 것들, 즉 물질, 돈, 쾌락, 명예, 권세 등등의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수련회를 통하여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이 되어서 돈을 영원히 남을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놓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을 잘 구별하여서 놓고 갈 것, 즉 돈, 세상 것들을 사용하여서 영원 세계에 들어 갈 때에 가지고 갈 것, 영적인 생명을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1-2절<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의 것과 땅의 것이 대조 되어 나오지요. 위의 것은 영원한 것이고,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에 하늘 세계에 가지고 들어 가는 것이지요. 땅에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들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에 모두 땅에 두고 떠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우리들은 지금 내가 가진 돈과 세상 것들을 사용해서 영원한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가야겠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 돈을 죽을 때에 우리가 영원세계에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돈을 영원세계로 가지고 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구제 사역입니다. 우리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위하여 아낌 없이 내 돈을 나누어 주면 그 돈은 내가 영원 세계에 가지고 가는 돈이 됩니다. 


1956년 에콰도르 선교사였던 짐 엘리엇이 아우카 부족에게 무참히 살해 당하였지요.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신학교를 마치고 에콰도르라는 나로서 선교를 떠났는데, 경 비행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해변가에 내린 후에 텐트를 치고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채비를 하고 있었을 때에 아우카 족 전사들이 이들을 무참히 죽였지요. 5일 후에 선교 본부에서 이분들을 점검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해변가로 왔습니다. 짐엘리엇을 비롯한 5명은 모두 참살 당하였는데, 그들의 주머니에 총알이 장착된 권총이 있었지만 권총을 발사하지 않은 채였다고 합니다. 미국 신문은 What a Waste! 즉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 하면서 떠들었습니다. 짐 엘리엇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답니다:제게 다시는 영원히 썩어지지 않은 것에 바치는 나의 희생을 어리석다고 말하지 말아요. 사람들은 짐 엘리엇과 같은 사람들을 미쳤다고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광신자라고 말입니다. 적당히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짐 엘리엇은 29살의 나이로 순교했습니다. 그의 말은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3:45-46절<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극히 값진 진주가 영원한 것을 의미하고, 자기의 소유가 영원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둘째날 토요일 오전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자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빌4:11-13절<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족이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고,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사는 것이다. 현재 상태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이 없이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돈이 없어 가난하지만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부자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당당할 수가 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에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돈 때문에 스포일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금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탐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행복을 누리게 하는 마음 가짐입니다. 내가 10개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에 10개를 모두 다 써버리면 더 가지고 싶어집니다. 그러기에 자족을 알기 위해서는 9개만 쓰고 한 개를 남겨 두면 마음이 넉넉하게 되어지지요. 밥 먹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배고프다고 더 들어갈 수 없는 만큼 많이 위장에 집어 넣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한 숟가락을 더 먹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때에 숟가락을 내려 놓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이것이 탐식을 하지 않는 지름길이고 이것이 육신적인 건강의 지름길 입니다. 


자족이라고 하여서 돈을 멀리하고, 돈을 벌려는 욕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벌려는 능력과 마음이 있는데도 돈이 나쁜 것이니 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 가난은 불편할 뿐입니다. 그래서 가난을 벗어 나기 위하여 돈을 벌되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이지요. 돈은 중립적인 것입니다.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돈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유익을 주기도 하고 해악을 끼치기도 합니다. 성경, 디모데 전서 6:10절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이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지, 돈이 일만 악의 근원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족하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딤전 6:6절<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있느니라> 경건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물질에 대한 탐욕이 있다면 우리의 이웃들을 위하여 우리의 가진 재물을 풀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지요. 그래서 야고보 1:2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 그룹입니다. 어려운 생활, 궁핍한 생활 하는 분들을 내가 가진 재물을 풀어서 도와 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고, 그 이웃 사랑은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요한 1서 2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채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빈 말이라는 말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보면 끝없이 조금만 더라는 말이 계속됩니다. 이제는 조금만 더 라는 말을 스탑 할 때가 되었습니다. 스탑 하는 그 자리에서 참된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스탑하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자족입니다. 


토요일 저녁 집회는 요1:1-5절을 본문으로 삼아서 ‘어두움을 통과하기’라는 제목으로 설교가 이어졌습니다. 빛과 어두움! 특히 5절 말씀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빛과 어둠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선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창조하셨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리적인 빛을 창조하셨고, 또한 하나님이 물리적인 어둠도 창조하셨지요. 사45:7절에는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어둠이 그냥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물리적인 캄캄한 어두움도 창조하셨습니다. 그 물리적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또한 빛이 있으라 하시면서 물리적인 빛을 창조했습니다. 빛과 어둠은 모두 우리 하나님이 만드신 물리적인 빛이요 물리적인 어둠입니다.  


그러나 요한 1:1-5절에 나오는 빛과 어둠은 물리적인 빛과 어둠이 아니라 해석학적인 의미에서 빛과 어둠을 말합니다. 즉 빛과 어둠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빛은 우리 주님이나 주님의 얼굴빛이나 혹은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고 어둠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영적인 어둠, 사탄의 권세를 가리키지요.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보는 이원론적인 이해입니다.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이런 이해는 구약과 신약 사이를 잇는 중간기에 크게 발달된 사고체계입니다. 빛과 어둠이 세상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으로 하나님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가 이 세상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으로 이 세상을 이해합니다. 이 세상은 영계의 찬란한 빛이 비추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둠의 권세, 즉 지옥 권세가 가득 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두 권세가 인간의 삶에서 언제나 싸우고 충돌하는 것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이원론적인 사고입니다. 지옥에는 어둠의 권세만이 있고 빛이 전혀 비추이지 않는 곳이지요. 아담이 타락하여서 낙원에서 쫓겨 난 이후에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었습니다. 실낙원 이후부터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후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 가게 되었지요. 마치 지옥처럼 말입니다. 그런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 강렬한 영적인 빛이 하늘에서 이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에 비쳐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그 빛이 무엇이라고요?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비추이고 있었지만, 인간은 이 어둠에 너무나 익숙해 져 있었고 또한 이 영적인 빛을 인식하는 영적인 눈이 퇴화 되어 버려서 이 빛을 감광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 우리들 예수 믿는 이들은 ‘빛과 어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의 세계로 이미 옮겨져 살고 있습니다. 요5:24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어둠의 영역에서 살다가 이제는 빛의 세계로 우리의 영혼은 이미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어둠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 가고 있기 때문에 어둠의 영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어둠의 영들이 공격함으로써 우리들이 겪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재앙과 재난과 시련 등의 모든 나쁜 일들입니다. 따라서 빛이신 우리 주님 안에서 살아 가더라도 우리의 삶에는 어둠의 영들의 공격으로 재앙도 당하고 재난도 당하고 시련도 겪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내게 닥쳤던 모든 나쁜 일들은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예수 믿고 나서는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 안 좋은 일들은 어둠의 영들이 일으켰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 믿고 살아 가는 오늘 우리들에게는 ‘빛과 어둠’은 빛은 좋은 일, 기쁜 일을 가리키고 어둠은 나쁜 일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이 핸들 할 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을 만나면 눈 앞에 캄캄해진다는 표현을 씁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랑하던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눈 앞에 캄캄해지면서 경황이 없어집니다. 또는 건강하던 자신이 갑자기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면 눈 앞에 캄캄해 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어둠의 상황이지요. 예수 믿고 빛의 세계로 들어 와서 살고 있지만 우리도 이런 어둠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어둠의 현장을 빨리 벗어 나야 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당한 어둠을 비추이면 그 어둠은 그냥 물러가 버립니다. 영적인 무지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어둠을 만나게 되지요. 그 어둠을 진리의 밝은 빛으로 비추이면 그냥 어둠은 물러가 버립니다. 캄캄한 어두운 방안에 성냥불 하나가 온 방의 어두움을 몰아 내지요. 내 인생에 온통 먹구름이 몰려 와 있지만 태양은 먹구름 위에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영적인 지혜를 구합시다. 이 지혜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많이 먹고 묵상하고 깨달아 알 때에 얻어집니다. 그 지혜로 내 영혼의 어둠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평온을 비는 기도/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Serenity Prayer)'라인홀드 니버 · 미국 신학자, 1892-1971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 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Serenity Prayer 


참 멋진 기도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많지요. 부모를 바꿀 수 있나요? 없지요. 우리를 그런 가정에,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 나게 하신 것은 이미 결정되어져 있어서 바꿀 수 없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느냐 하면서 불평하면서 원망할 일이 아니라 그것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영적인 지혜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더욱 많습니다. 우리의 운명도 우리의 행복도 우리의 현재의 모든 것들은 얼마든지 우리들이 바꾸어야겠다는 의지와 힘과 결단만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는 것! 영적인 지혜입니다. 내가 현재에 당하는 환난과 고난, 이것은 어둠인데, 이 어둠을 통과하여서 지나가면 평화를 누린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23편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푸른 초원으로 가기 위하여 반드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하기에 목자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데리고 그 골짜기로 들어 가셨지요. 그 골짜기는 평화에 이르는 잠시 잠깐의 고난과 시련입니다.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을 우리들이 예수 믿고 나서도 몇 년을 더 살게 되는가? 70-80년의 세월을 그 어둠 가운데서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 가는 동안 우리들은 어둠의 세상에 무엇을 비추어야 하는가? 빛을 비추면서 살아야 한다. 그 빛은 내 빛이 아니라 예수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비추어 주신 그 예수의 빛을 비추어서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야 하지요. 


창12:7-9절< > 창13:1-3절< > 창13:18절< >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거주하면서도 한 곳에 정주한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안에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가 옮길 때 마다 했던 일은 제단을 쌓는 일이다. 제단? 제단을 쌓는 일은 제사 드리는 일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가 제단을 쌓고 야훼 예배를 드리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 어떻게 할까요? 제단을 허문 다음에 돌들을 나귀에 바리바리 실어서 다음 번 장소에 그 돌을 가지고 제단을 만들었을 까요? 아니지요. 아브라함은 떠났지만 무엇이 남아 있었습니까? 제단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떠났지만 그 곳 이방인 주민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나요? 야훼 신앙을 아브라함은 그 제단을 통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주민들은 그 제단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섬긴 하나님이 야훼라는 것을 알았지요. 아브라함은 떠났지만, 무엇을 남겼다고요? 제단을 남겼다. 그 제단은 말없이 그 주민들에게 야훼 신앙을 증거해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어둠의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지금은 이곳 보스톤 땅에 우리를 머무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켐연장이라는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짧게는 수년간 이곳에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도 있고, 길게는 40-50년 이곳에 머물다가 하늘나라로 이민 갈 분도 많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신앙 생활하는 동안 남긴 발자취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예수를 기억나게 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켐연장을 섬긴 그 일들이 이웃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신은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우리는 미구에 이곳을 떠나지만 우리가 남긴 발자취를 통하여 켐연장에 들어와서 신앙생활하는 무리들이 예수를 기억나게 해 주는 발자취가 되기를 원하노라! 어둠 가운데 빛이 무엇이라는 지를 보여 주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 내 주기를 부탁 드립니다. 


복음송 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

내 눈을 열어 진정 가치 있는 것,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그것을 얻기 위하여 현재 우리의 가진 것을 사용하게 하옵소서! 자족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탐욕을 버리고 있는 것을 족한 줄 알고 경건한 삶을 힘쓰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나의 발자취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삶이 되게 하옵소서!


켐연장

2017.06.06 18:24:47

2017년 6월 2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602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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