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83

금요기도회 :5/19/2017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1. 지지난 주에 주일 교회 학교 교사 훈련을 했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셔서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국 교회의 주일 교회학교가 없어지는 교회가 많이 생겨 나고 있다고 합니다. 주일 교회 학교가 사라지면 조국 교회의 장래가 없어집니다. 주일 교회 학교 교사들은 참 중요한 직책을 맡은 분들입니다. 내가 맡아서 1년간 가르쳤던 꼬맹이가 40-50년 후에 세계사에 큰 업적을 남길 인물이 될 지 누가 압니까? 이런 비전을 가슴에 품고 소망을 가지고 꼬맹이들을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2015년 2월 이슬람 무장 단체인 IS가 이집트 출신 콥틱 그리스도인 21명을 리비아 해변 근처에서 참수했습니다. 그 참수 당한 한 분이 이런 유언을 그의 아내에게 남겼습니다:내가 만약 잘못 되거든 우리 아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관해서 가르치십시요. 인권단체- Roads of Success의 부회장인 자클린 이삭이 그의 가족을 인터뷰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내 아들, 내 딸에게 무엇을 물려 줄 것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그것을 물려 줍시다. 우리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물려 줍시다. 금보다 귀한 이 것, 돈으로 살 수가 없는 이 믿음을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전승시킵시다. 


 2.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은 이슬 같은 분이시다. 이슬은 해가 뜨면 사라지지요. 어떻게 그런 약한 것을 하나님의 이미저리로 사용했을 까요? 또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이슬과 같다. 신32:2절<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로다> 호14:5절<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이슬은 언제 맺히는가? 밤에 맺힌다. 태양이 떠 있는 낮에는 안 맺힌다. 척박한 이스라엘 땅, 비가 적게 내리는 이스라엘 땅에서 식물과 초목이 살 수 있는 길은 풀 잎에 맺히는 이슬에 달려 있습니다. 이 이슬은 밤에만 맺히고, 그것도 매일 매일 맺힙니다. 1년치가 단 하룻밤에 맺히지 않습니다. 예전에 아프리카의 나미브 사막에 살고 있는 딱정벌레에 대하여 방영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나미브 사막은 거의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딱정 벌레가 어떻게 사는가? 물을 안 마셔도 사는가? 아닙니다. 매일 딱정 벌레는 물을 마십니다. 어디서 물을 구합니까? 사막에서 물 웅덩이를 찾아서 구합니까? 매일 아침 새벽 안개가 태평양 바다에서 사막으로 몰려 옵니다. 그러면 딱정 벌레는 머리 부분을 땅에 낮추고 꼬리 쪽을 높입니다. 그러면 수증기가 딱정벌레의 등에서 물방울로 바뀌면서 그 물방울은 딱정벌레의 등껍질에 나 있는 도랑을 따라서 딱정벌레의 입으로 쏙 들어갑니다. 딱정벌레가 이런 방법으로 새벽 이슬을 모아서 체내에 필요한 수분을 모읍니다. 딱정벌레에게 우리 주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셨지요.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 우리 인간은 딱정벌레가 등 짝에 가지고 있는 돌기가 없으니 물을 만들 수 없지만, 대신에 우리는 기구를 만들어서 습기 제거 장치나 증류 장치를 만들어서 우리의 삶을 이롭게 만들 수 있지요. 우리 하나님이 만드신 솜씨를 모방해서 비슷하게 만들 수 있지요. Homo Sapiens! 


이슬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캄캄한 밤을 만났을 때에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이슬과 같은 존재로 임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이슬을 마시지 않으면 영적인 목마름으로 헐떡일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밤 같은 시절을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밤 같은 세상, 영적으로 척박한 이 땅에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 가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척박한 땅인 보스톤 이 땅에서 서바이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이슬을 받아야 합니다. 한꺼번에 1년치가 내리지 않습니다. 한 두 번의 부흥회 때 받은 은혜로 일년을 버티지 못합니다. 매일 매일 새벽 기도 때에 은혜 받아야 하고, 매 주 금요기도회 때 은혜를 받아야 하고 매 주 주일 예배 때에 은혜를 받아야 영적인 갈증이 해소 됩니다. 이 이슬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는 이슬과 같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내일의 고단함을 이 말씀의 은혜로 이기게 하옵소서! 


3.세상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 하는 장소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너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너와 나를 성전 돌로 꼽아 넣기 위하여 나를 다듬고 훈련 하는 장소라고 볼 수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 성전의 작은 한 돌로 쓰기 위하여 나를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다듬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바라본다면 내 인생관은 달라집니다. 내 인생에 불어 닥친 환난과 고난과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시련과 고난과 환난을 통하여 더욱 큰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내 인생에 불어 닥친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이 나를 빚어 가시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왕상6:7절<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히였으며> 


/본문에 나오는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제 1성전은 주전 959년에 솔로몬이 건축하여서 완공했지요. 그러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불타 없어진 자리에 다시 성전이 세워지지요. 그 성전을 제 2 성전이라고 하는데, 스룹바벨이 주전 516년에 완공했지요. 이 제 2 성전은 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확장해 나갔는데, A.D.63년경에 확장 공사를 마쳤다. 그 후 7년이 지난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하여 제 2 성전도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전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 성전이 파괴되는 때가 곧 나라가 멸망하는 때이다. 유대인은 나라 없는 족속으로 온 세상에서 diaspora로서 살다가 지난 세기에 나라를 재건했다. 현재는 예루살렘에 무슬림 사원(Dome)이 세워져 있다. 유대인들 가운데 다시 성전을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은밀히 준비하고 있다. 그 성전을 제 3 성전이라고 부른다. 


/솔로몬이 건축한 제 1성전은 기초 석(큰 돌/영어로는 corner stone이라고 부름)이 놓이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손질하여서 쌓아서 석조 건물로 지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석조 건물이었다. 성전을 지을 때에 성전 건물에 쓰일 돌들은 채석장에서 뜨고 정으로 채석장에서 다듬은 다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 와서 조립식으로 맞추어 넣었다. 성전 구내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라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성경은 세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연합을 강조하는 비유이지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체 비유가 있고, 그리고 사도 요한이 말하는 포도나무가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성전비유입니다. 


성전과 성전돌! 벧전 2:4-8의 이 비유: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 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닺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의 성전 비유에 보면 모퉁잇 돌, 모퉁이의 머릿돌 이 나오지요? 이 돌은 기초석이라고 부르는 돌입니다. 건물 전체를 떠 받치는 큰 돌을 가리킵니다. 수십톤이나 나가는 하나의 큰 돌 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 큰 기초석 돌을 모퉁잇돌이라고 부르면서 4절에서는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산 돌이란 살아 있는 돌이라는 말입니다. 산 돌이라는 말은 돌이 실제로 생명이 있어서 살아 숨쉰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상징어이지요. 또 5절에는 너희도 산 돌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너희는 베드로의 독자들입니다. 즉 예수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너희도 산 돌이신 예수처럼 산돌이다라는 말입니다. 너희도 산 돌이다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도 산 돌들이다. 예수께서 커다란 산 돌인 것처럼 너희도 산 돌들이다라는 말입니다. 모두 살아 있다는 분사가 사용이 되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은 커다란 모퉁이 돌 위에 작은 돌들을 쌓아 올려서 건축된 석조 건물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제 1 예루살렘 성전도 그런 석조 건물이었고, 또한 스룹바벨이 지은 제 2 예루살렘 성전도 그런 석조 건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이 모퉁잇 돌과 작은 다듬은 돌들로 지어져서 하나님을 성전에 모셨다. 이와 같이 예수 믿는 우리들도 신령한 집을 세웠다고 5절에서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집이 무엇이라고요? 신령한 집입니다. 즉 영적인 집입니다. 이 집은 예루살렘 성전처럼 모퉁잇돌과 그 위에 돌들을 쌓아서 만든 것처럼, 모퉁잇 돌인 예수 위에 작은 돌들인 성도들을 놓아서 만들어진 집입니다. 예수와 성도들로 이루어진 이 신령한 집에 누가 들어와 계시는가요? 우리 하나님이 들어 와 계십니다. 이 신령한 집을 이루고 있는 돌들 하나 하나가 요긴한 돌이다. 만약 그 돌이 하나라도 없으면 성전이 완공되지 않는다. 만약 이 신령한 집 여기 저기에 구멍이 나 있다면 그야말로 이 신령한 집은 볼품 없는 집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이 돌들을 얻었는가? 세상에서! 세상 속에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고, 훈련시켰다. 석수장이가 끌을 가지고 채석장에서 돌을 쪼아서 돌을 준비했고, 그것을 성전으로 옮겨와서 조립함으로써 성전을 완공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산 돌이다. 즉 살아 있는 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지어진 성전! 이 세상은 우리들이 성전의 돌이 되게끔 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이 석수쟁이 모양으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쪼아서 성전의 돌 되게끔 합당하게 만들어 가시는 곳이다. 석수장이가 끌과 정으로 돌을 다듬을 때에 돌에게는고통이 있겠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지금 내가 처한 현 상황이 하나님이 나를 빚어 가시는 의도가 있는 자리다!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라!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는가 하면서 한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를 가지고 나를 그런 가정에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시련과 환란을 맞게도 하셨다. 바로 내가 처한 환경은 나를 빚고 나를 훈련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잠시 놓아 두었습니다. 성전 돌로 쓰시기 위하여 아픔을 참아내라!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내가 성전을 이루는 한 돌이 되어서 하나님을 그 속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영광입니다. 그런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정으로 쪼여 나가는 아픔을 참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얼마나 이루어져 가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 형상을 이루 갈 수 있지 않겠어요? 갈4:19절<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초창기 전도 여행 때에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 교회의 성도들을 ‘나의 자녀들아’ 라고 부르고 있지요. 바울이 복음으로써 낳았던 영적인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불신자를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고요? 마치 해산 하는 수고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엄마가 되어 보신 분들은 애기를 낳는 산고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힘드는 것은 낳은 후에 키워 내는 것은 더 어렵지요.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야 하고, 젖 물려야 하고 조금 크서 뽈뽈거리면서 돌아 다니면 어디에 부딪칠까 넘어질까 따라 다녀야 하고, 또 조금 더 크면 사춘기라는 홍역을 치러야 하고, 말 안 듣는 아이를 인내하면서 참아 내야 하지요. 그것은 아이를 해산 하는 것 보다 힘들지요. 해산은 하루나 이틀 정도면 끝나는데, 자식을 한 사람의 어엿한 사회인으로 키워 내는 데는 3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빚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부모를 빚어 가지요.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한 순간의 성령 사역으로 회심이 일어납니다. 회심이 일어나면 그날 이후부터 그냥 그 사람이 저절로 영적으로 쑥쑥 자라나나요? 저절로 쑥쑥 영적으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세심한 돌봄과 수고가 있어야 평신도들이 영적으로 자라나지요. 오랜 세월, 10년 20년 영적으로 자라나야 영적으로 장성한 성도가 되지요. 목회자가 참고 인내하고 수고해야 평신도가 자라납니다. 골로새 교회에 준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절). 목회자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 교인들의 영혼이 성장하여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데 있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밥 사주고 대접하는 일보다는 무엇이 더 좋다고요? 교인들이 목회자의 수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을 더 좋아 합니다. 요한 삼서 3절<형제 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나는 켐연장 지체들이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대로 살아 가는 것을 목회철학으로 삼았습니다. 예수의 영을 따라서 온 교회 성도들이 살기를 바라는 것이 내 목회철학입니다. 골1:28-29절<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예수를 전파하고 성경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교회 건물 즉 예배당 건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키워 내는 데 있었습니다. 장성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키워 내는 켐연장이 되어야 하고, 그 위에 교회 건물이 있으면 더 좋겠지요. 교회 건물은 금상첨화이지요.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이 우리 목회의 제 1관심사가 아니고 사람을 키워 내는 것이 켐연장 교회의 제1 목표입니다. 교회 건물은 비단 이불에 꽃을 수 놓은 일일 뿐입니다. 비단 이불에 꽃이 수 놓여 있지 않아도 비단 이불은 그것 자체로도 좋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회복해야 합니다.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제 2 아담인 예수께서 다시 회복했습니다. 예수께서 만드신 새 이스라엘, 새 백성들인 우리들도 예수의 길을 따라 살아 감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고울이고 목표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함으로써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그 잃어 버렸던 그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입니다. 예수에게 가서 예수를 배우고 닮아 가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롬8:29절<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우리를 선택했습니다. 선택하신 목적?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의 목적을 바로 여기에 두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당신은 예수를 보면서 당신이 닮아 가야 할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순종! 그리스도인은 한 평생 우리 주님 예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에게서 물려 받은 안 좋은 영적인 유전 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불순종의 유전인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불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이런 불순종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스렸습니다. 따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죽음이라는 저주를 온 인류가 겪고 있습니다. 이 불순종의 유전인자를 우리는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아담의 저주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이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 예수이십니다. 그가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인류에게 드리워져 있는 아담의 저주를 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함을 배워서 이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순종했습니다. 아담이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주님 예수께서 다시금 회복해서 우리들에게도 그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그것은 완전하게 자라나야 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저절로 자라나는 하나님이 형상이 아니라 부단히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야 자라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신의 백성으로 불리어 지는 새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들은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자라도록 부단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내 뜻을 꺾고 그 때 그 장소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지를 찾아서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5:8-9절 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그가 즉 예수께서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도 순종을 배웠다면 우리는 더욱 힘써서 순종을 배워가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1:2절<곧 하나님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을까요? 우리의 얼룩진 죄를 씻어 내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 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무엇으로 씻어 내나요? 예수의 피를 통하여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불러 내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예수의 피로 씻기 위함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나요? 아닙니다.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은 후에 또 무엇을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불렀나요? 한 평생 주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불렀습니다.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은 후에 다시 세상 즐거움을 따라서 살 수 있나요? 없지요. 예수 믿는 믿음을 받은 후부터 하늘 나라에 들어 가는 순간까지 성도는 순종으로 점철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켐연장

2017.05.24 00:06:12

2017년 5월 19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519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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