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79

금요기도회 :4/21/2017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314장 


 1. 하나님을 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17:3절<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다> 이 구절에서는 영생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말에 안다는 것은 지적인 인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지성적인 이해만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이곳에 기록되었을까요? 우리 나라 말로 번역된 안다는 동사를 그릭으로는 기노스코라는 동사를 씁니다. 이 동사는 경험을 통하여 알다 즉 깨달아 알다 입니다. 요일2:3절<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요일2:5절<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여기 이 구절에도 안다는 동사가 기노스코라는 글자가 사용이 되었는데, 여기서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알게 되는 앎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을 체험하여서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하나님을 느끼기를 기도하고 있지요. 그런 체험과 경험이 있고 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을 알았다라고 말합니다. 


/호2:19-20절<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 영적인 신랑이 되고, 이스라엘 즉 구약의 백성은 영적인 신부가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남편과 아내로 관계를 맺어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배경은 선지자 호세아와 그의 아내인 음란한 여인인 고멜 사이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었지요.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이 원래 창기 출신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런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하셨지요. 고멜이 호세아와 결혼하여서 이스르엘이라는 장자를 낳았고, 둘째는 딸인데, 로루하마를 낳았고, 셋째는 아들인데 로암미를 낳았지요. 그러다가 그만 고멜이 다시 바람기가 일어나서 그만 남펴인 호세아도 버리고, 자식들도 버리고 다시 매음굴로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다시 옛날의 창기 생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명합니다. 호세아가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린 고멜을 돈 주고 사서 매음굴에서 건져 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은 열 다섯 개를 가지고 그리고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고멜을 되 사왔지요.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무엇 하라고 그럽니까? 다시 고멜에게 장가 들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도망 간 여인, 그것도 매음굴로 도망 간 그 여인을 다시 돈 주고 사와서 장가를 든단 말입니까? 이 구절에 기록되어 있는 장가든다는 동사가 4번이나 나오지요. 이 동사는 남자가 더럽혀 지지 않은 순결한 처녀와 결혼 할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이 여인을 허물 많은 여인으로 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처녀와 결혼하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모두 그런 여인이라면 버려두라고 말하겠지만, 하나님은 다시 데려와서 순결한 처녀로 여기면서 그 여인과 재 결합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된다면 고멜은 그의 신랑인 호세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과연 내 남편! 하면서 존경하면서 한 평생 섬기면서 따르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이렇다는 말입니다. 죄악과 우상숭배로 더럽혀져 있을 대로 더럽혀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고 다시 이스라엘을 순결한 처녀처럼 대우하면서 우리 하나님이 결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은총을 보고 경험한 후에 비로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알았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함을 비로소 경험한 다음에 내가 하나님을 알았다고 비로소 말합니다. 이것이 호세아가 말하는 하나님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겔 36-39장까지에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의 회복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겔36:37-38절<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에스겔 예언자 당시에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당하여서 유대 민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었습니다. 그발 강가에서 포로 공동체를 만들어서 고달픈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예언자로 세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포로 된 유대인들을 70년 만에 해방시켜서 고국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파괴되어서 폐허가 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에 다시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될 것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포로 된 구약의 백성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켜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이키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일어 날 수 없어 보이는 일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서 고국으로 돌아 오는 것을 제 2 출애굽이라고 신학적으로 이야기 하지요. 제 2의 출애굽이 일어날 때에 구약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우리 주님이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 지는 것을 볼 때에 아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다른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경험한 후에 비로소 아 이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을 알았다고 말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신약 시대에 우리 주님이 사도 베드로를 부르시는 현장으로 한 번 가 봅시다. 누가복음 5:8절<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시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들은 밤새도록 배를 타고 투망질을 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그들의 배에 올라가서 무리들에게 우리 주님이 설교하신 후에 시몬에게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자기의 전문 지식으로는 지금 그 시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질을 해서는 고기를 못 잡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예수의 설교 말씀을 의지하여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바로 배 안에 타고 있는 예수 앞에 엎드려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요. 이것은 무슨 의미의 말입니까? 배 안에 타고 있는 이 예수가 다름 아닌 바로 메시야 임을 알았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냥 갈릴리 출신의 평범한 랍비가 아니라 조상적부터 기다려 오던 바로 그 메시야임을 알았다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는 무엇을 통하여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아 보았나요? 바다에서 이적적으로 잡은 엄청난 물고기 때문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 경험을 통하여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내 삶 속에서 생생한 주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 체험을 경험했기에 비로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삶에 위기가 도래해서 주께 부르짖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그 위기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깊은 수렁에 빠진 나를 건져 주셨지요. 우리는 그 구원을 통하여 비로소 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지요. 하나님을 경험합시다. 내 모든 삶의 전 영역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합시다. 예배 드릴 때 마다 우리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집안에서 또한 직장 생활하면서 그 안에 함께 계시는 우리 주님을 만납시다. 하나님을 알아 가자는 말입니다. 


/지난 금요일 십자가의 7언에 대하여 6번째 7번째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오늘은 1언에서 5언까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1언

/눅23:34절<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죄용서의 청구! 누구의 죄? 예수님의 죄가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죄사함의 요청입니다. 갈보리(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 개의 십자가가 그곳에 세워졌습니다. 가운데 십자가에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 못 박혔고, 좌우 양편에는 강도들이 못 박혔습니다. 세 개의 십자가 앞에는 백성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보면서 우리 주님 예수께서 했던 기도가 무엇이라고요? 저희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심판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여 저들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요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십자가 앞에 모여 있는 그 무리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가 누구인 줄 모르고 비난하면서 조롱하면서 서 있습니다. 주님은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예수의 이 기도는 구약 성경 이사야 53:12절 예언의 성취입니다:이러므로 내가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왜 우리 주님은 이들의 죄를 사면해 달라고 요청하는가? 그 근거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고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당시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조롱하던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이 저희를 누구라고 적용할 수 있는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나도 2천년전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조롱하던 그 무리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기도가 없었다면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한 나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나? 바로 나의 죄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 나도 2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 있었고 우리 주님을 조롱하던 그 무리들 가운데 섞여 있었을 때 우리 주님이 날 위하여 내 죄를 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행3:17절<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사도 베드로의 설교이지요. 너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그것은 너희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용서의 기도가 있었기에 오순절 날 수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요. 딤전1:13절<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도 바울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예수를 적대시 했었지요. 그러나 예수의 그 기도가 있었기에 다멕섹 도상에서 회개하게 되었지요.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도 기다리셨고, 사도 바울도 회개 하기를 기다리셨고, 또한 우리들의 이 시대에도 구원을 주시기로 우리 하나님이 작정하신 자들이 회개하기를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했던 첫 번째 기도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십자가는 용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누구? 스데반을 기억합시다. 


 제 2언

/눅23:43절<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 곁에는 두 명의 흉악한 악인들이 함께 달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12절의 성취입니다: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십자가의 좌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했고, 십자가의 우편 강도는 예수님을 옹호했습니다. 십자가의 우편 강도는 자신들은 응당 죄값을 받아서 십자가에서 사형이 집행되고 있지만, 예수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우리 주님께서 살아 계시면서 마지막으로 구원한 사람이 십자가의 우편 강도입니다. 우편 강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지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에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깨달음, 의식을 가지는 것은 preevangelism입니다. 우리 주님의 선포: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이라는 곳이 어디인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낙원을 천국과 다른 곳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천국이 낙원입니다. 낙원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극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계를 지극한 복락이 있는 낙원이라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어떤 신학적인 의도가 있어서 낙원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천국을 낙원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곳이 신약 성경에는 세 번 나옵니다. 고후12:4절<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또 계2:7절<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우리도 이 땅에서 목숨이 끝나면 천국, 즉 낙원에 들어갑니다. 눈물과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에 들어가지요. 우리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편 강도에게 ‘나와 함께’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 없는 낙원은 의미 없습니다. 낙원에 있으면서 예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지요. 


/구원은 집단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을 가지고 그가 속해 있는 가문이나 집단이 구원을 받는 것 아닙니다. 구원은 단독자로, 개인으로 구원 받습니다:내가 네게 말하노니, 우편 강도에게 말씀하셨지요. 우리 주님과 우편 강도는 천국에 함께 들어간 동기생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동시에 현재적입니다:네가 오늘 나와 함께! 구원은 바로 이 시간, 오늘 받습니다. 고후6:2절 참조<~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세상 모든 불신자들이 자신들의 구원을위하여 예수께 요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딤전2:4절<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제 3언

/요19:26-27절<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불효자 예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의 여생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사랑하시는 제자, 그 제자에게 부탁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제자가 누구일까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곁에 서 있는 그 제자는 다름 아닌 사도 요한입니다. 목숨이 십자가에서 꺼져 가시면서도 어머니 마리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효도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지만, 사실은 예수는 대단히 불효자입니다. 아마도 아버지인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요셉은 이미 일찍이 돌아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오직 어머니인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만 살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남이 집안을 책임지면서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지요. 그런 상황인데, 장남인 예수님 마져도 십자가에서 운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어떨까요? 처참할 정도가 아니라 참담하겠지요. 악행으로 십자가 형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였는데도 사형을 당하고 있지요. 그러니 마리아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겠지요. 이것은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에 이미 예언되었지요. 눅2:35절<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예루살렘 성전을 요셉과 마리아가 애기 예수를 안고 방문했을 때에 성전에 있던 시므온이 예수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마리아에 대하여 칼이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다라고 예언했지요. 바로 그 예언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있는 어미의 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자식을 죽음에 앞세우는 부모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명자로 살아 가기에 사명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하는 효도를 못하기에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사명의 길은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아니던가요? 사명자들은 주님의 길을 걸어 가면서 인간적으로 해야 하는 도리를 다 못하기에 늘 마음을 아파하면서 걸어 갑니다. 이것이 종의 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여자여 하면서 부르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여자여 하고 부르는 것은 결코 하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대하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은 공적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다. 메시야로서 왕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격식을 갖추어서 여자여 라고 불렀습니다. 정이 많은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고, 사도 요한은 마리아가 삶을 마칠 때까지 잘 섬겼습니다. 


제 4언

/마27:46절<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버림 당하신 예수!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입니다. 고뇌에서 나온 부르짖음입니다. 버림 받았다는 그런 느낌 때문에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의 말을 내 뱉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예수에게서 돌리셨습니다. 왜요?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은 사랑하는 아들로 대면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의 대표로 대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철회 되었다는 것을 우리 주님 예수께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온통 뒤덮여 있고, 십자가 주위에 둘러 서 있는 무리들은 비난하고 조롱하고 있고, 예수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처럼 느껴 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요? 지옥과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여기가 갈보리의 지옥이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예수께서는 늘 언제나 함께 있던 하나님의 임재가 끊어져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이 말은 시편 22:1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시22:1절<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구약의 백성들은 삶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 환난과 시련 때문에 툭하면 이런 말로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내뱉았습니다. 이런 원망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가?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 때문에 원망을 쏟아 내는 것이지요.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시련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요. 


제 5언

/요19:28절<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육신적인 고통을 토로하시다. 예수께서 우리와 똑 같은 biological한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신적인 갈증을 무척 느끼고 있습니다. 한 낮에 내려 쪼이는 태양 빛 때문에 목이 마르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진짜 사람이었습니다. 가현설은 배격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어린 애기로 태어 났고, 어린이로 성장했고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피곤할 때에는 주무셨습니다. 울기도 했고 기뻐하기도 했지요. 예수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히7:26)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목마름을 경험하심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하여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천국에는 목마름이 없습니다. 계7:16절, 그리고 계22:17절<마지막 권유>. 반면에 지옥은 목마른 곳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목마른 상태에 있게 됩니다. 지옥은 끝 없이 목마르고 그 갈증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셨습니다. 무엇 하심으로써 자신이 친히 십자가 위에서 목마름을 경험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켐연장

2017.04.25 06:01:12

2017년 4월 21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421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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