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77

금요기도회 :4/7/2017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314장 


1. 어떤 분이 돈이 필요해서 하나님께 돈 달라고 떼쓰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음을 주장하면서 억만금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기도응답의 약속이 요16:2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의 이름으로 청구만 하면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억만금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내일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뛸듯이 기뻤습니다. 내일이 되고 하루가 지났는데도 기도 응답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졌더니 하나님께서 야야~ 나는 지금 너에게 한 약속대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주신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래 내일 준다고 했지, 그런데 하루가 다 지났는데 안 주신다고 쓴 소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베드로 후서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으로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말씀하신 하루는 천년의 세월을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이 조크의 의미가 무엇일 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끌어 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입장을 투영하셔서 읽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씀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지, 자기의 입장을 투영해서 읽으면 이런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성경 구절을 따와서 인용하면 안되지요. 


/광부들이 갱도에서 작업을 하던 도중에 점심을 굴속에서 먹게 되었습니다. 한 광부가 점심을 가져 오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동료들은 모두 점심을 펴 놓고 먹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가져 오지 않는 광부가 다른 광부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으니 음식을 좀 나누어 주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광부들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다고 하면서 음식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입장에 변호하느라고 사용했지요. 


2. 이삭의 셋째 아들


/창25:19-26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 아들들이 있었다/40세에 결혼 60세에 두 아들을 낳았다. 리브가가 불임이었으나, 이삭의 20년간의 간구를 하나님이 들었고, 쌍둥이를 주셨다. 


/두 아들들이 성장하여서 에서는 들사람(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주하게 되었다. 일란성 쌍생아? 이란성 쌍생아? 얼굴이나 생김새나 성격도 완전 딴판! 아마도 이란성 쌍생아가 아닐까 싶습니다. 


/에서의 장점은 무엇일까? 남자다운 남자! 남성미 넘친다.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사냥을 한다. 사냥한 고기로 요리해서 아버지를 극진히 섬기는 효자(그래서 이삭은 에서를 야곱보다 더 사랑했다), 인간미가 넘친다(뒤끝이 없다. 동생 야곱을 용서해 버리고 딴 소리 안했다. 야곱이 에서에게 했던 해묵은 원한을 깨끗하게 용서해 버렸다), 윤리와 도덕으로는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그의 단점은 무엇일까? 믿음이 없다. 가치관이 전도 되어 있는 삶을 산다. 영적인 것보다는 세상 적인 것에 더욱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장자권(아버지가 죽게 되면 아버지의 재산을 3등분으로 나누어서 두 몫을 챙기는 권한, 이것은 그냥 생득적으로 얻은 것입니다. 장자로 태어 났기 때문에 가지고 된 것, 하나님이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을 팢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일종의 수표 와리깡과 비슷하다. 히12:16절에서는 이런 에서를 어떻게 평가?망령된 자, 가치관이 전도된 자!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매력남이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버림받은 인물입니다.하나님의 축복권에서 밀려난 인물!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났다. 미래적이고 영적인 것에 대하여 보다는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더욱 가치를 두고 사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 돈, 명예, 세상 권세가 더욱 크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에서와 같은 영성을 지닌 분들이 수두룩 하게 많다. 영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세상 적인 것을 크게 여기는 그런 신앙적인 삶을 사는 분들이 그렇게도 많다는 말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육적인 그리스도인,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요. 


/반면에 야곱은 어떤 인물입니까?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 속이는 자! 또는 뒤발꿈치를 잡는다는 의미도 있다. 오늘 본문은 들째 아들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은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태 중에서 싸우다가 간 발 차이로 늦게 태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억울해서인지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게 되지요. 야곱의 장점? 믿음이 있고, 집념이 있는 사나이입니다. 장자의 권리와 장자의 축복권! 이것들을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가 장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그 축복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둘째이니 그것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비지와 형을 속여서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권을 가로채지요. 축복권 뿐만 아니라 또 무엇을 요? 장자권리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큰 믿음이 없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의 단점은? 윤리와 도덕이 잘 못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인 야곱 타입의 성도도 교회 안에서 많습니다. 믿음이 줄충한데, 윤리 도덕은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아들 타입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첫째 아들 에서 타입인가? 아니면 둘째 아들 야곱타입인가? 나는 어떤 아들 타입의 신앙인인가? 첫째 아들도 말고 둘째 아들도 말고 셋째 아들 타입이 되어야 한다. 왜 셋째 아들 타입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믿음 가지고 야곱이 받았던 것 같은 축복을 누리면서 그냥 세상 사람들과 같은 윤리나 도덕을 따라서 한 세상 살면 되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셋째 아들은 야곱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세상 윤리와 도덕도 잘 지키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믿음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내었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바른 방법을 써서 그가 얻고자 한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 얻은 것이지요. 그랬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얻었지만 무슨 벌을 받았나요? 정든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나서 타향 살이를 20년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또 무슨 벌을 받았나요?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와 생 이별을 하고서 어머니의 임종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징계를 받았지요. 또 무슨 벌을 받았나요?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 요셉을 여러 번 속였지요. 자식에게도 속임을 당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으로 원하는 것은 받아 내었지만, 삶 속에서는 시련과 환란이 끊일 날 없었습니다. 이런 삶을 사시겠습니까? 그러면 에서 처럼 사시겠습니까? 그것은 또 싫지요. 야곱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응답으로 받아 누리면서도 시련과 환난이 없으면 좋겠지요.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윤리와 도덕적인 삶도 올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믿음도 줄충해야 하고 동시에 윤리와 도덕도 올바르고 좋아야 합니다. 이런 신앙 타입은 아이디얼한 타입이지요. 이삭의 셋째 아들 타입의 신앙인입니다. 어떤 누구도 나의 삶에 책을 잡을 수 없도록 세상적인 관점에서도 욕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나의 삶에 티나 주름 잡힌 것은 없는가를 찾아보고 그것을 제거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셋째 아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3.한 사회의 멸망은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 의인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창18:22-30절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 소알은 제외). 도시 안에 어두움과 죄악과 불의와 불법이 넘치는데도 망하지 않고 건재해 있는데, 왜 그럴까? 그 도시 안에 의인들이 그 사회를 위하여 중보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기도가 한 사회의 멸망을 막아 냅니다. 소돔성을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 당하였지만, 예루살렘 성은 그 중에 의인 한 명이 없어서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 당하였습니다. 렘5:1절<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서 정의를 행함으로써 그 사회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물샘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하나 하나는 나는 이 사회의 멸망을 막아 내는 보루이다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겔22:23-31절 읽을 것!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 당했는데, 이 때의 예루살렘의 상태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한 번 찾아서 읽어 보지요. 겔 22:30-31절<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리>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설 자=중보하는 의인, 그리로 우리 하나님이 들어가서 성을 멸망시킨다-은유적 표현. 이스라엘 사회 안에 정의가 무너지고 부정 부패가 넘쳐 나는 것을 성의 일부가 무너져 있어서 뚫어져 있는 이미저리로 나타나 있지요. 


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향기로운 제물?


/구약시대는 제물의 차등이 있었다. 구약 시대의 예배의 경중은 제물이 무엇이냐에 달렸다: 소, 양(염소),비둘기, 곡물(소제)! 인간이 볼 때에는 차등이 있다. 가장 값진 제사는 소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가장 가치가 적게 매겨지는 제사는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곡물 제사입니다. 곡물 제사는 밀가루 한 웅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차등이 있는 제사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차등을 두지 않았다. 레1장을 한 번 찾아 보지요. 레 1장은 구약의 제사 가운데서 최고의 제사라고 일컫는 번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가축을 도살하여서 홀라당 모두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선 소의 번제는 흠 없는 수컷을 드립니다. 1장 9절 후반부에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양이나 염소로 드리는 번제는 두 번째 가치가 있는 제사입니다. 양이나 염소로 드리는 번제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레1: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경제적인 형편이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도 없다면 비둘기 새끼를 가져다가 번제로 드립니다. 새를 번제로 드리는 경우가 제사장에게는 가장 까다롭습니다. 새의 경우는 제사장이 새의 몸을 찢어야 하는데 몸통을 모두 찢어서는 안되고 일부만 찢어서 불에 태워 드려야 합니다. 아주 까다롭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는 번제 드리는 사람이 소나 양을 잡습니다만, 새의 경우는 제사장이 새를 잡아서 아주 기술적으로 몸통을 일부 찢어야 합니다. 새의 몸통을 완전히 찢으면 안되지요. 매우 까다롭습니다. 새의 번제이니 값이 별로 나가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무시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무시하지 않습니다. 소나 양으로 드리는 번제와 똑 같은 가치를 부여해서 그 번제를 받으십니다. 레1:17절<…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비둘기 조차도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지체들이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는 번제는 그냥 밀가루를 조금 가져와서 소제로 드리면 됩니다. 제사장이 그 밀가룰 받아서 한 웅큼을 제단에서 불에 태워서 번제를 드립니다. 가장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런 부류의 사람의 제사도 하나님이 소나 양을 번제로 드린 것과 똑 같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받으십니다. 레2:2절<…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웅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모든 번제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나 가루를 드릴 때에 모두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냄새’ 


/구약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경제적인 형편을 따라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겠다는 다짐이 있을 때에 드리는 제사가 법제입니다. 오늘 신약의 백성들인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들은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께 헌신 할 것인가? 롬12:1-2절<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신약의 성도들은 무엇을 드리라고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라! 구약의 성도들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나 가루를 제단에 올려서 불태워 드렸는데, 신약 시대의 우리들은 무엇을 제단에 올려서 불태워 드리라고요? 우리의 몸을 불태워 드린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세상 풍조를 따라서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거스려서 주의 뜻을 따라서 살아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제사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세상 살이 할 때에 죄와 관계가 없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또한 우리의 예배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입니다. 믿음 때문에 적대적인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주께 충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목숨과 몸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셨지요.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참으로 순교자자 많이 나왔지요. 또한 목숨과 몸은 못 바쳤어도 시간을 드리고 또한 물질을 드리고 그리고 자신의 전문지식과 기술을 드려서 헌신하는 지체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주께 드린 모든 것이 무엇이라고요? 번제단에 올려 드린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몸 드린 순교자의 제물만을 기뻐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드리는 시간과 물질 또한 전문지식도 똑 같이 기뻐하시면서 받으십니다.


켐연장

2017.04.10 17:47:29

2017년 4월 7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407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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