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71

금요기도회 :2/24/2017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그 이름 비길 데가 어디 있나 


1. 세 번째 기도 제목: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사8:9-15절 말씀, 특히 사8:12 하반절-14상반절<너희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사이로-에프라마이트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이로-에프라마이트 전쟁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어서 서진하는 초 강대국 앗수르를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남 유다를 이 동맹에 끌어 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남 유다의 왕은 아하스입니다. 아하스와 측근 세력들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동맹에 가담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앗수르 편에 붙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대항 하기 전에 먼저 남 유다와 전쟁을 벌렸습니다. 그 전쟁을 사이로-에프라마이트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 전쟁이 일어나니 남 유다의 백성들이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그들이 두려워 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임마누엘 징조를 이사야에게 보여 주셨고 유다 백성을 구원한다고 예언하셨지요. 그래서 13절에 오히려 무엇을 두려워하라고요? 하나님을 두려워 할 분으로 여기라. 우리 주님께서도 마10: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나님 한 분 만을 두려워하게 되면, 모든 세상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심령과 삶에서 제거하면 오히려 세상 두려움이 우리의 심령을 지배하게 되지요. 하나님이 제일 무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워하라는 말은 공포를 느끼라는 말이 아니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우리의 마음의 옷깃을 여미라는 말입니다. 사탄과 어두움의 영들은 우리의 영과 삶에 공포를 일으키지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느끼는 자리에서는 두려움과 함께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느라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순교자들! 세상 권세자들보다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우리 켐연장 지체들은 누구를 더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안 보이니 멀리 있어 보이고 칼을 들고 서 있는 권세자는 가까이 있어서 칼을 들고 있는 권세자를 더 두렵게 여깁니까?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할 수 있을까?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됩니다. 하나님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보고 있다면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시길 바랍니다. 열왕기하 6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엘리사가 있는 성읍 도단을 에워쌌습니다. 엘리사를 잡으려는 의도는 아람 왕궁에서 은밀히 이야기하는 비밀이 번번이 누설되어서 실패로 돌아 갔기 때문입니다. 왕궁에서 일어나는 비밀 회의를 도청하여서 아는 자가 바로 엘리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람 왕이 군대를 보내서 엘리사를 잡아 오게 했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서 아람 군대가 도단을 에워쌌습니다. 엘리사의 비서인 게하시가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군사들이 성읍 밖에 쫙 깔려 있었습니다. 게하시가 너무나 놀라서 엘리사에게 이 사실을 고했더니 엘리사는 태연자약했습니다.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는 게하시를 위로했지요. 무엇이라고요?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말입니다. 엘리사에게는 우군이 게하시 말고는 없는데, 우리와 함께 한 자들이 우리를 잡으러 온 저들보다 많다는 말을 했지요. 그러고 나서 엘리사의 기도가 나옵니다. 게하신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영안이 열린 게하시가 무엇을 보았습니까?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보았기에 게하시가 두려워하는 일을 멈추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하늘의 군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눈에 보이는 아람의 군대 때문에 게하시가 두려워 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하늘 군대를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영안도 열어 주시길 기도해야 겠습니다. 우리가 그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 하나님이 하늘 군대로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다는 것을 영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세상 두려움은 사라지겠지요. 


2. 네 번째 기도 제목: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심령들이 모인 교회가 되게 하소서! 많은 사람들이 부, 돈 많이 벌어서 가지고 있는 것를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갑부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살아가지요. 또 어떤 분들은 학위에 관심을 둡니다. 자식 자랑을 인생의 기쁨으로 여기는 분도 있지요. 또 신앙 년조나 신앙 체험을 자랑하는 분들도 있고요. 우리들은 무엇을 자랑해야 하나요?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2천년 전에는 십자가는 수치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에게는 십자가보다 더 큰 자랑거리는 없습니다. 


/갈 6:14절<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의 자랑거리? 자기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 주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 입니다. 자기가 주를 위하여 받는 모든 고난은 바울이 진 십자가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자신이 방문하는 교회마다 이것을 간증한답시고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흉내 내기도 힘든 고난과 시련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자신이 지고 있는 자기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랑하는 바는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피흘리신 바로 그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초두에 나오는 ‘그러나’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 만을 자랑하지만, 다른 분들은 무엇을 자랑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갈라디아서에는 유대의 율법 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주장합니까? 율법을 자랑합니다. 율법을 따라서 또한 무엇을 자랑합니까?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몸에 할례를 받은 것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구원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고,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의롭게 되기 위하여 할례를 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유대의 율법 주의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자랑했지만, 그러나 바울은 나의 자랑은 오직 무엇이라고요?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찌 십자가가 자랑인가? 바울 당시에도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서 중죄를 지으면 사형에 처하는데, 사형 집행 형틀이 십자가가 아닙니까? 세상 불신 세계에서도 십자가 형은 수치스러운데, 구약 율법에도 나무에 달리는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길 수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깨달아 알게 되었을 때에 십자가가 자랑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 하나님이 사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 지셨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을 깨달아 알았을 때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소종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 3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지요. 보통 사람의 눈, 불신자의 눈에는 예수는 저주할 자, 즉 헬라어로는 아나데마이나, 성령으로 영안이 열린 자들에게 예수는 주님, 그릭으로는 큐리어스이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칭호인 주님이라는 칭호를 예수님에게 붙였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우리의 눈에는 참으로 기이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고전1:18절에는 십자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24절에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는 예수의 승리. 이것은 동시에 예수 믿는 우리의 승리! 골2:15절<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는 세상에 있는 모든 악들에 대한 승리입니다. 세상에는 악이 편만해 있습니다. 이 악 때문에 무엇이 일어납니까? 고통이 일어납니다. 악과 고통에서 승리하고 해방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든든하게 불들어야 합니다. 


5. 다섯 번째 기도 제목:정결한 심령들이 모인 교회가 되게 하소서! 다윗도 이렇게 기도했었지요. 시51:10절<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다윗이 언제 이런 기도를 했나요? 그가 7계명을 위반했을 때에 이 기도를 했지요. 간음 죄와 살인 죄로 인하여 자신의 심령이 더러워졌을 때에 했던 기도입니다. 죄를 지으면 더러워 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더러워지지요. 입으로 거짓말과 더러운 말을 하면 입이 더러워집니까? 아니지요.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을 하면 더러워지는 것은 심령이 더러워집니다. 손과 발로 남을 쳐서 죽여서 손과 발에 피를 묻힌다고 하여서 손과 발이 더러워집니까? 아니지요. 더러워 지는 것인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생각으로, 입으로, 그리고 손과 발로 짓는 모든 죄악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힙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힌다는 것은 우리 주님이 이미 2천년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정결하고 깨끗하게 살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살면서 죄를 안 지을 수 있던가요? 없습니다.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은 더럽혀지기만 합니다. 매일 매일 내려 앉는 먼지를 털어 내면 깨끗해 지는데, 그것을 매일 안 털어 내면 먼지가 쌓이게 되지요. 그러면 쌓인 먼지를 털어 내자면 대단히 힘들어 지게 되지요. 


/우리의 더럽혀진 심령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흘린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내면 우리의 심령이 깨끗하게 됩니다. 슥13:1절<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샘이 개봉된다는 말입니다. 샘에서 솟아 나오는 물이 사람들이 짓는 모든 더러운 죄를 씻는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포로 해방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역사의 종말인 메시야 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신의 백성들의 더러운 죄를 씻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씻는 방법은 닫혀 있던 샘물을 열어서 그 샘물로 씻어 낸다는 말입니다. 이 샘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샘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입니다. 2천년 전에 우리 주님이 흘린 보혈은 억조창생億兆蒼生의 더러운 심령을 모두 씻고도 남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심령을 청결하게 만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그리스도의 신부는 점이나 티가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죄사함 받은 의인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죄 없는 자가 모인 곳이 아니다. 죄를 지었지만,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교회는 죄를 주께 자백하고, 고백하여서 죄씻음을 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요일1:9절<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교회는 어떤 죄를 지은 죄인도 용납해야 하나, 어떤 작은 죄도 용납해서는 안된다.


켐연장

2017.02.28 13:19:48

2017년 2월 24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224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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