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68

금요기도회 :2/3/2017 

대표기도: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433장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1. 지금 당신은 당신이 짓고 있는 하늘에 있는 영적인 집은 어떤 상태일까?/고전3:10-15절<>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지를 선정하고, 건축물을 세우기 전에 터를 닦아야 합니다. 터가 견고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구조물이 무너지지요. 구조물을 높이 올리기 위해서는 터가 견고해야 합니다. 기초공사가 잘 되어 있어야 구조물이 안전해집니다.


/고린도 교회는 누가 개척했나요? 사도 바울이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터를 닦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얼마 후에 교회를 떠나고 아볼로와 다른 사도들이 부임해서 교회를 목양했지요. 10절에는 ‘다른 이’라는 말로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바울이 닦은 교회의 터가 무엇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 교회만이 그 터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온 지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켐연장 교회의 터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면 켐연장 교회는 보스톤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지요. 우리 교회의 터가 누구라고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터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구조물을 올립니다. 보스톤에도 보면 건축 구조물이 다양하지요. 붉은 벽돌로 지은 집도 있고, 나무로 지은 집도 있고,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지은 집도 있고 철골 시멘트로 지은 집도 있지요. 집들이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지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라는 터 위에서 각 사람이 집을 짓는데 어떤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종류를 나무면 두 종류의 재료로 짓지요.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라는 재료를 사용해서 짓는 집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이라는 재료를 사용해서 짓은 집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고 나서부터 이 땅에 사는 동안 그의 일생은 집을 짓는 자와 같다는 말입니다. 땅에서 한 평생 신앙생활하는 일이 저 하늘에 들어가서 살 집을 건축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만약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이제 땅에서는 그만 살고 하늘로 이민을 오라고 하면 하늘 위에 있는 내 집은 어떤 상태일까요? 내부 장식까지 완전하게 마친 멋진 집을 가진 분도 있을 것이고, 골조만 올라가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건축물이 없고 그저 집 터만 덩그러니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권사회에서 몇 주 전에서 나누었는데, 권사님 가운데서 어떤 분이 노숙자도 있을 것이다라고 해서 모두 낄낄 거리면서 웃었습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남들은 황금 보석 꾸민 집에서 거하는데, 나는 비바람 이슬 맞으면서 노숙자가 된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것도 잠깐이 아니고 영원한 세월을 그렇게 산다면 끔찍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당신의 집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건축자가 불에 안타는 내구재로 집을 지을 수도 있고, 불에 홀라당 타는 재료로도 대강 대강 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라는 재료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리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나의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것을 잘 깨달아 알아서 집을 잘 지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한 평생 땅 위에서 수고한 모든 일이 헛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한 평생 주를 위해서 희생하면서 헌신 했기에 저 하늘 위에 자기의 신앙의 집에 멋 있게 잘 지어져 있겠거니 예상을 하고 천국에 들어 갔더니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렵니까?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다시 세상에 나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인생살이는 단 한번 밖에 기회가 없고, 그것을 잃어 버린다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현재 바로 이 순간에 잘 깨우치고 그 깨달아 안 진리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땅에서 삶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 갔더니 신앙의 집이 완공이 안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렵니까? 아니면 천국에 들어갔더니 집이 골조 밖에 서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렵니까? 또 오늘 본문 말씀처럼 나무나 집이나 풀로 집을 지었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불 때문에 모두 훌라당 타 버린다면 영원히 노숙자 생활해야 하잖아요? 인생을 다시 물려서 세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요. 참 곤란하지요. 당신이 지금까지 지은 신앙의 집은 금은보석으로 지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고 있습니까? 


/금은보석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사도 바울은 집을 짓는 재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이해는 이 비유를 듣는 사람의 몫입니다. 성경 말씀, 진리를 확연히 깨달아 알고서 그 진리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면 금은보석이라는 재료로 집을 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무,풀,짚이라는 재료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성경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지금까지 지어온 집은 어떤 부분은 금은보석으로 지었고, 또 다른 부분은 나무,풀,짚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내구재와 단용재가 복합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불어 오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된 부분은 모두 타 버리고 없어지기에 집 곳곳에 구멍이 나 있는 볼품 없는 집이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불에도 끄떡 없는 금은보석으로 집을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라도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집을 지어 나가야 마지막 날에 헛수고 하지 않겠지요. 


/이런 구조물이 마지막 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이 되면 하나님이 불을 보내는데, 불을 보내시는 이유는 집을 얼마나 견고하게 잘 지었는지를 테스트 하는 불이라는 말입니다. 불에도 끄떡 없이 남아 있는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불에 홀라당 타버린 다면 해를 받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잃어 버리지 않는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지요. 집이 다 타 버린다면 상급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지옥에 보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생 동안 죽을 동 살 동 모르게 주를 위해서 수고했건만 하나님이 저 천국에서 그것을 상급으로 계산해 주시지 않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어요? 성경을 깨달아 알고서 그 영적인 원리를 따라서 섬겨야겠지요. 


2. 암3:9절<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얼마 전까지 현대 한국 교회의 대형 교회의 비리가 세상에 까발려 지면서 우리 주님과 교회와 성도가 모두 수치스러움을 겪었습니다. 요즈음은 좀 잠잠하지요. 더 큰 비리, 정치적인 불의와 불법 때문에 잠시 대형 교회의 비리가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왜 메스컴에서 떠 들게 되는가? 영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 안의 이런 어두움을 누가 세상에 드러냈나? 사람이 드러낸 것 아니다. 우리 하나님이 드러냈습니다. 암3:9절<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아스돗과 애굽은 모두 이방인들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어디로 초청합니까? 사마리아의 산들 위에 모이라고 하나님이 초청하십니다. 이 당시 북 이스라엘의 수도가 사마리아입니다. 이 사마리아 성은 동쪽과 서쪽, 북쪽은 높은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 산들 위에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초청하여서 신의 도성인 사마리아 성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안에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나요? 요란함과 학대함! 요란함은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힘을 가진 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고 압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산 위에 올라와 있는 이방인들은 신의 도성이라 자기들의 도성과는 달리 사랑과 공의가 넘치겠다고 생각했지만, 신의 도성에도 자기들의 도성에 있는 억압과 압박과 부정과 불법이 넘치고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부정과 불법이 교회 안에도 일어 나고 있다는 말이지요.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 교회 안을 들여다 보면서 과연 교회로구나 라는 감탄의 말이 나와야 하는데, 교회도 별 수 없구만 우리와 똑 같네 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되지요. 자신들은 더러워도 교회만은 오염 되지 않기를 바라지요. 


/교회는 다른 어떤 세상의 기관이나 단체보다 거룩하고 의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죄 많은 곳이다. 그러나 그 죄를 회개하고 통회한다면 이런 비리는 세상에 알려 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막아 주신다. 우리 주님께서 피 흘려 가면서 창조하신 것이 교회다. 그러기에 교회를 우리 주님은 그의 옷자락으로 덮어서 보호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변명하고 그 죄를 가리려고 힘쓴다면 그 죄를 세상에 까발리시는 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의 옷자락을 치워 버리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 의하여 수치스럽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매일 교회 안을 살피고 죄를 씻는 일을 해야 한다. 거룩하고 정결하기 위하여 힘쓰는 교회가 되자! 다섯 번째 기도 제목? 죄 짓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정결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이렇게 된다면 세상이 교회를 칭찬하고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 또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기 까지 할 것입니다. 교회가 죄 많은 곳이나 회개할 때에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 우리 교회도 하늘 빛으로 조사하면 어두움의 먼지들이 날리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의 옷자락으로 가리워 주시기에 세상 가운데서 당당하게 지금껏 서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켐연장 교회는 정결한 교회가 되기를 힘쓸 것입니다. 


3. 사무엘 상 17:8-11절 골리앗은 어떤 인물? 영적으로는 골리앗은 우리를 위협하는 사탄의 모형이다. 그러면 다윗은? 다윗은 영적으로 우리 주님 예수를 가리키는 모형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모형론, 영어로는 typoloy라고 부른다.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인 전투로 이해하게 됩니다. 블레셋 진영은 사탄의 진영이고 이스라엘 진영은 그리스도인들의 진영으로 모형화할 수 있지요. 골리앗는 사탄을 가리키고, 다윗은 우리 주님을 나타내 주는 것이지요.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유형론이라고 부르지요. 


/싸움에 대한 제안-대표자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겁을 잔뜩 집어 먹었고, 다른 말로 하면 졸아버렸다.간이 콩알만해졌다.위축되었다 라는 표현을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무엇이라고요? 메뚜기 신드롬. 이것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곁들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탐지하기 위하여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하여서 약속의 땅을 탐지하도록 했습니다. 12명이 40일간 약속의 땅을 두루 살핀 후에 돌아와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보고했습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다라고 보고하면서 그 땅을 이미 기골이 장대한 거인 족들이 차지 하고 있는데, 그 거인 족들에 비교하니 우리들은 메뚜기 같다라고 보고했지요. 그랬더니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낙담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었지요. 이스라엘이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을 폄하하는 것을 무엇이라고요? 메뚜기 신드롬이라고 부르지요. 


/당시 초 강대국인 애굽을 꺽으신 하나님께서 용사 중의 용사로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계시건만 그들의 조상들은 그런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요. 그래서 사울을 위시한 이스라엘의 군대는 벌벌 떨었지요. 16절에 의할 것 같으면 몇 일 동안 골리앗은 이스라엘 앞에 나왔습니까? 40일 동안!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무엇 하고 있습니까? 앞에 나가서 왜 골리앗과 싸우지 못하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신 목적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대적인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왜 사울이 골리앗을 맞아서 싸우지 못했을까요? 사울은 지금 영적 권세가 해제된 자입니다.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삼상 16:14절<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성령이 떠났다. 사울이 왕노릇 잘하라고 우리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지요. 사울이 언제 성령을 받았나요?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왕으로 선택될 때에 기름부음을 받았지요. 삼상10:10절에는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게 되자,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였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서 사울을 왕의 자리에 앉혔고, 하나님은 사울이 왕노릇 잘하라고 그에게 성령을 부었지요. 왕으로 취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령께서 사울에게 머물러 있던 그 때에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와 그의 군대가 야베스 사람을 압제하자 성령이 사울을 크게 감동시키지요. 그가 온 이스라엘 지파로부터 군대를 모집하여서 암몬 족속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하나님이 사울에게 아말렉 정벌을 명했을 때에 사울이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게 되자 성령이 사울을 떠나게 되었고, 그 대신에 악령에 시달리게 되었지요. 그 때 이후부터 사울은 영적 권세를 빼앗기게 되었지요. 영적 권세를 빼앗기게 되면 왕노릇을 바로 하지 못하지요. 블레셋 군대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영적 권세를 빼앗긴 사울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지요. 


/자 그러면 사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울의 장자 요나단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멀리 출장 나갔습니까? 아니지요. 지금 사울과 함께 진영에 있습니다. 요나단도 다윗에 버금가는 용사 중의 용사입니다.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블레셋과의 전투인 믹마스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견인차였습니다. 믹마스 전투에서 오직 그의 부관 하나와 함께 단신으로 블레셋 진영으로 처들어가서 블레셋 군대를 죽이고 블레셋 군대를 흩었고, 요나단의 뒤를 따라서 사울의 군대가 사기 충천하여서 블레셋을 격파했었지요. 그런 용사 중의 용사인 요나단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사울 휘하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쪽도 쓰지 못하고 그냥 참호 속에서 웅크리고 있나요? 영적인 권세가 거세된 지도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무능한 영적 지도자 아래 있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은사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참 슬픈 일이다. 오늘날의 교회적 상황이 이와 같다. 영적 지도자들이 영적 권세가 강하다면 교회 안에 깨어 있는 평신도들을 거느리고 세상 가운데 역사하는 사탄과 어두움의 영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조용히 차기 왕이 될 다윗의 무용을 지켜 보고 있다가 18장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다윗에게서 보았다. 


/오늘 우리들의 기도 제목?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다시금 영적 권세를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평신도들 가운데 은사와 재능들이 뛰어난 분들이 많은데, 각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영적 권세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각 지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영적 잠에서 깨어서 일어나서 영적 권세를 회복한다면 평신도들이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십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켐연장 교회를 위시하여서 보스톤에 있는 교회들 뿐만 아니라 어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영적 지도자들이 권세를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살아나고, 교회가 다시금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 지도자들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의 시작은 어디에 있을까? 성도들의 중보 기도로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겠습니다. 우리 켐연장 교회의 영적 권세들인 목사와 전도사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활발하게 평신도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영권이 역사할 때 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4. 마10:16절<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은 어떤 배경,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까? 불신 사회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려고 들어 갔을 때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양을 어디에 보낸다고요?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 양과 이리와의 싸움! 상대가 안 되는 싸움입니다. 양은 이리의 먹잇감 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슬림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이스라엘 같은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떤 영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지혜와 순결을 가지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지혜롭게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고, 또한 그렇게 헤쳐 나가는 동안 또한 영적인 순결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만으로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부족하지요. 무엇이 하나 더 추가 되면 좋겠습니까? 독수리처럼 강인하라 또는 사자처럼 용감하라=담대하라! 우리 주님이 12제자들을 파송하실 그 때에는 이 말씀을 하지 않았지만,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이 말씀을 추가해서 명하셨을 것입니다: 독수리처럼 강인하라, 사자처럼 용감하라! 사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날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강하고 담대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신앙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안의 훈련을 통하여 강한 용사가 됩니다. 강하지 않으면 힘과 능력을 가지고 다가 오는 어둠의 영들을 대항하여서 싸워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은 강합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사람들 마음 속에 포제스 되어 있는 어둠의 영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속에 들어 와 있는 사탄의 세력들, 사상, 철학, 통념, 관습등등을 타고 사탄이 역사하지요, 그런 세력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순결만을 가지고는 대항하여서는 신앙을 지켜 낼 수 없습니다. 강해야 하는데, 어떻게 강해 지는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강해진다. 눅10:19절<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눅 24:49절<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 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그들이 적대적인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선결 되어야 하는 조건이 무엇이라고요?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능력? 성령의 능력! 위로부터 제자들에게 덧 입혀 지는 성령의 능력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허약한 제자들입니다. 어둡고 강하고 악한 세상속에서 자유 자재로 움직이는 어둠의 영과 싸움을 하면 연약한 제자들이 큰 데미지를 입을 수 밖에 없지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주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옷 입혀져야 하지요. 그런 다음에 세상에 가서 하나님의 왕국을 넓혀 가는 사역을 행할 수가 있지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사자 처럼 용감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켐연장

2017.02.07 06:08:21

2017년 2월 3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203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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