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67 

금요기도회 :1/27/2017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461장! <복음송: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1. 약한자/약함/무력감-고후12:9-10,11:30절, 고후13:4 /세상에서 살아 남자면(특히 현대 사회는 경쟁 사회이기에, 정글의 법칙,약육강식,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됨) 힘이 있어야 하고 또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 무한 경쟁 시대! 강한 놈이 살아 남는 세상이다. 그래서 남보다 우월해야 하고, 남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간에도 그렇고 국가간에도 그렇다. 요즈음 북한이 핵무장으로 난리 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로켓 발사, 핵무기 보유, ICBM(대류간탄도미사일) 등의 초강수를 계속 두고 있습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미국은 북조선을 넘보지 말라고 말입니다. 약함을 보이면 열강들에게 먹힌다는 생각 때문에 북한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약할 때에 강하다는 역설적 진리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역설! 기독교의 역설! 역설적 진리! 이런 역설적인 진리가 성경에는 가득합니다. 버리면 얻게 되고, 죽으면 살고, 깨어지면 쓰임을 받고, 낮추면 높아진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약할 때가 강하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밖에 서서 이 역설적 진리를 들여다 보면 역설적 진리는 의미 없어 보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역설적인 진리 안에 들어가면(믿음으로 모험하면) 역설적인 그 진리가 참됨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역설적 진리를 사색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종교가 아니라 역설적 진리로 살아 나갈 때에 기쁨과 승리가 있는 종교다. 세상은 약한 자를 짓밟아서 뭉개 버리지만, 하나님은 그 약함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진리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런 약함 속에 있는 것이 감사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있지요. 


/고후12:9/… /개역-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 사역:왜냐하면 그 능력이 약함 속에서 끝나기 때문이니라. /어떤 번역이 옳은가? 본문의 원어의 기본형이 무엇인가? 그 뜻이 "불완전한 것을 완전 또는 온전하게 하다"인가? 아니면, "끝마치다, 하던 모든 일을 완성하다 마치다(finish)"인가? 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전자로 번역했다. 능력이 온전하게 되어 진다로 번역되었는데, 거기에 본문에 없는 ‘나의=하나님의’라는 소유격을 집어 넣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번역은 나의(하나님의)능력이 (바울의)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로 번역되었습니다(RSV, KJV, NIV…). 소유격을 보충하고, 기본형을 바꾸었다는 약점이 있지만 전체적인 문장의 앞뒤 문맥과 조화를 이루고 그 내용도 은혜가 있어서 뜻이 통합니다. 그러나 기본형을 변화시키지 않아도, 그리고 소유격을 집어 넣지 않아도 의미는 통합니다. 사역에서 보는 것처럼 그 능력이 (바울의)약함 속에서 끝남이니라!-미르바 던이라는 여성 신학자의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라는책 pp 53-61참조! 구약학자 렌스키(1937년도)가 최초로 이 단어가 여기서 잘못 번역되었다고 주장함. 따라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후자가 되어야 한다:왜냐하면 (바울이 자기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 그 능력이 (바울의)약함 속에서 끝났다. 바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어떤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는가? 육체의 가시=사탄의 사자! 왜 그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을까? 자신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서 거룩한데, 어찌해서 그 몸 안에 있는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 angel, messenger라고 불렀을까? 의인화! 가시라고 표현한 것을 보니 대단히 고통스러웠는가봅니다.가시가 몸에 박혀 있으면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있게 되어서 온 신경이 거기에 집중하게 되지요. 육체적인 고통은 악인데, 우리에게 악, 고통을 가져다 주는 존재는 사탄 밖에 더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의인화하여서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탄의 사자인 가시는 어떤 병(약함)일까요? 분명 이것은 육체적(신체적)질병입니다. 그 질병은 안질, 간질,편두통 etc. 편두통이 가장 큰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질병이 migration fever편두통입니다. 의사인 누가가 곁에서 바울이 바울이 주기적으로 겪는 편두통을 이겨내도록 도와 주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탄의 시험거리! 하나님이 쓰시는 종인데 하나님이 이런 질병으로 나를 괴롭혀도 되는가 하면서, 시험에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신앙 군번은 그것 때문에 믿음을 버릴 정도의 시험에 들 정도로 약한 믿음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어떤 시험? 복음을 전하러 이방 지역에 다닐 때에 이 질병 때문에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었다. 말씀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정작 자신은 편두통 때문에 누워 있거나 앓고 있다면 그것은 이방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 것인가? 복음의 장애가 일어나니지요. 갈4:13-14절<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이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있는 이런 약함이 이방인들에게는 분명 시험거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하게도 바울의 초창기 복음전파의 지역이었던 갈라디아에서는 장애거리가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장애를 없앨 목적으로 세 번이나 기도했다. 일정 기간을 정하여서 목적 기도(작정기도, 철야,금식)를 했을 것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응답? 병을 안 고쳐 주셨다. 그 대신에 왜 그런 질병을 안 거두어 가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주셨다:바울로 하여금 자만하지 않게끔 하기 위하여 가시를 그대로 바울에 남아 있게 했다. 가시는 뽑히지 않았으나, 이제 이후부터는 가시가 있더라도 그렇게 크게 아프지 않게 되었다. 가시와 함께 평생을 산다! 가시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의 신앙을 지키는 안전 장치! 바울의 몸 안에 있는 그 가시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막는 안전 장치 . 바울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교만하고 자만에 빠질 수가 있었다. 당시 최고의 학문(일반 학문/다소의 대학)을 한 지성인입니다.또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수학했고요.(헬라어 능통), 또한 성령 체험과 은사도 가득. 직전 컨텍스트에서는 고후 12장에는 입신 체험도 있지요. 또한 이방인의 사도로서 수 많은 교회를 개척했고, 유대오 크리스천들과 이방 기독인들에게 대 사도로서 신망이 높지요. 어떻게 끝까지 처음처럼 겸손하게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내갈 수 가 있을까? 그 방법은 하나님이 그에게 가시를 육체에 심어 놓는 일이었다. 이것은 더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최고의 은혜를 사도 바울은 받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내가 이토록 주님께 충성했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약하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무력하게 만드시는가 원망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안 나타나도 좋으니 건강하게 편히 살게 해 주시요 라고 기도했겠지요. 그것이 꿩 먹고 알 먹고이니깐!


/사탄은 바울을 (파멸)망가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악을 바울에게 행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사용하여서 바울에게 더욱 큰 영적인 혜택(선)을 가져다 주었다. 사탄은 하나님보다 지혜롭지 못하다. 사도 바울은 그 고통(가시)를 제거 하기 위하여 엄청나게 노력했다. 자신이 가진 온갖 힘과 능력(자신의 자원)을 사용했지만 실패와 좌절로 끝났다. 절망감!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지의 사나이였는데, 그런 믿음이 가득한 사람이었는데, 연약함과 무력감을 체험했다: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바로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여서 구원하기를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실패와 좌절은 하나님의 시작. 인간의 절망은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힘과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 철저하리 만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무력감에 무너져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바로 그 때에 펼쳐집니다./어떤 선배 목사님의 경험! 


/바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어디까지 이 해석을 넓히고 적용하는가?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pl)-자신에게 열등감을 일으키고도 남는 것들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갖는가? 바울은 신체적 열등감도 있었다. 메부리 코에, 안장다리, 그야 말로 못 생긴 사나이~ 이런 자신의 그의 모습을 그는 자랑하기까지 되었다./ 고후11:30(내 약함을 나타내는 것들을 자랑하리라). 고후 12:10절의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바울의 자랑 목록, 자신의 믿음 좋은 것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방인 선교사로서 성공하여서 수 많은 이방 교회들을 개척한 것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나타난 기적과 이적들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키워 내 놓은 제자들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될 수 있으면 감추고 싶은 것들을 꺼내 놓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약함을 내 세우면 그 약함 가운데서 행하셨던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오히려 하나님이 더욱 높아 지는 것 아니겠어요(Soli Deo Gloria). /고후 11:23-28절-바울의 수난, 고난,/ 고후1:8-10, 환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고난(약함)-하나님만 의지-구원(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 


/자랑하는 이유?/9절 마지막 부분-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니라(목적절). 머문다, 장막을 친다. 머무른다, 나의 약함 속에 하나님이 머무신다-이 진리는 너무나 인생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내가 힘있고, 내가 가진 것이 많고, 세상 권세가 있을 때에, 성공하고 세상 것을 가지고 있을 대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머무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데, 그 반대이니 말입니다. 그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보다 더욱 비참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안일.평안한 삶을 살 때 능력이 나타나는가? 건강, 부, 좋은 직장, 좋은 집, 가정이 평안함이 있을 때 멋진 신앙생활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가? 그래서 세상 것을 구하면서 부르짖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평안과 안일한 육신적인 삶을 영위하면 신앙이 오히려 죽어 버린다.이것은 구약 시대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도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시련과 풍랑을 맞았을 때에, 연약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난다. 강력한 신앙 생활은 고난 속에서 일어난다. 메시아닉 쥬우들의 고난, 무슬림 사회(중동 지역)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 형제들, 중국과 북한 같은 독재 정권 아래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어떤 신문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같다고 평했다)! 그리스도인이 강할 때는 왕궁 같은 집에 거할 때가 아니라 카타콤에 있을 때이다. 세상이 감당 못하는 신앙인들! 히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왜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보다 크기 때문에! 너무나 큰 사람이기에 세상이 그런 사람을 담아 둘 수가 없다는 의미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적은 믿음이기에 세상이라는 큰 독에 들어가면 우리의 믿음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지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큰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욱 자라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자라나요? 작은 것이지만 진리의 말씀을 하나 하나 순종하여서 실천해 나갈 때에 믿음은 쑥쑥 자라납니다. 


/약할 때에 강하다는 진리는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진리인가? 바울의 특수한 그리고 개인적인 삶의 정황에만 적용되는가? 아니다. 모든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우선 우리 주님에게도 이 진리는 적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라! 고후13:4<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그릭으로는 현재형이다. 과거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 현재 계속해서 하늘에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주님이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실제로 약해서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아니다. (마26:53-54절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리들에게 잡히실 때에 하신 말씀은, 12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력하게 보이면서 체포된 데에는 성경 말씀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예수의 연약함-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보이면서, 연약함을 느끼면서(인간들이 느끼듯이)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 보시고 죽은 일이다. 총과 칼로 무력에 의한, 군사적 힘을 사용하여서? 대중들을 이용한 여론을 일으켜서? 정치, 경제적 권세를 사용했는가? 아니다. 세인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육신적인 고통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면서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했다. 너와 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연약함 때문에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후8: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출생-말구유,찢어지게 가난한 예수 공동체,눅9:58, 십자가에 못 박히심, 남의 무덤에 장사됨(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 입고 있는 겉옷 밖에는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자신의 가지신 것으로 인류를 부하게 만드셨다. 


/사도 베드로의 경우? 그는 어떤 연약함을 경험했는가? 눅5:5, 갈릴리 바다에서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수산업자, 바다에서 고기 잡이 하나 만은 자신이 있었는데, 그의 전문 지식이 그날 그 자리에서는 실패하고 끝장났다. 우리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연약함을 사용해서 사도 베드로를 불렀다. 베드로의 전문지식이 약함으로 마친 그 자리에서 우리 주님은 능력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리고 베드로를 사도로 불렀지요. 마26:33,35절-목요일 밤에 베드로에게 부인할 것을 예언, 그러나 베드로는 용기 있게 외쳤다-모두 주를 버릴지리도 나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다. 그것도 대 제사장의 면전에서가 아니라 한 여종 앞에서 부인했다. 참 초라하고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대 제사장의 위엄 앞에서 두려워서 그랬다고 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변명이 되겠지만, 대제사장의 한 여 종 앞에서 부인했으니 그 챙피함은 어떠했을까요? 베드로의 결단과 호언 장담, 그의 능력이 끝장났다:너의 연약함 가운데서 너의 능력이 끝장났다. 우리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런 실패에서 그를 치유하여서 수제자 되게 하셨다. 


/변화산 아래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현장에서, 막9:14-29절/22절(아이의 아버지)-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23절(예수 그리스도의 대답)-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24절(아이의 아버지의 대답)-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대담에는 절망감,무력감이 표출되어 있다.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그 아비에게는 없다. 또한 예수의 능력이 자신에게로 흘러 들어오면 되는데, 그 능력의 통로가 되는 믿음도 없다. 철저한 무력감이 나타났다. 바로 이런 상황이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는 상황이다.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 된 병자/물이 동할 때에 자신이 제일 먼저 뛰어들 능력이 없다. 38년간의 절망감! 요5:6-7, 그 절망감, 무력감에서부터 우리 주님은 그를 구원했다 


/베드로가 헤롯에 의하여 감옥에 갇히었고,이미 야고보는 참수형을 당하였을 때에 /베드로의 구출을 놓고 예루살렘 교회가 했던 일은? 행12:5<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 보면서 기도했다-하나님이 듣고서 천사를 보내서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해 내셨다. 미7:7(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요15:5(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한국교회의 현실?/조국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다. 교회의 덩치는 커졌지만, 그 가운데 예수가 떠난 대형 교회가 많다. 조국의 대형 교회는 훈련을 통하여 이룩한 근육이 아니라, 기름기 있는 식품을 많이 먹어서 몸짓이 커진 비만이다. 비만이 되면 각가지 성인병이 생겨난다. 한국 교회도 그러하다. 교회가 고난을 외치지 않고, 영광과 번영과 부와 건강을 외치고 있다.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 아니라 돈으로 man power를 가지고 교회의 조직을 움직인다. 선교.교육을 무엇으로? 쌓여 있는 돈으로 한다. 교회 성장이 목표다. 대형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세상 경영 방법을 도입해서 쓴다. 예수의 방법인 고난을 통한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힘을 세속적인 능력을 숭상하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형국!계3:17, 하나님의 능력이 떠났다. 왜 잃었을까? 약함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고난 신학이 빠져 버렸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왜 고난 받아야 하나? 하나님이 주신 돈도 있고, 사회적 기득권이 되었는데, 왜 그것을 포기해야 되나 하면서, 선교에도 부와 사회적 기득권을 이용하면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교회가 교회 답게 서기 위해서는 철저하리 만치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할 때이다. 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위에 장막을 친다.(함께 한다/임마누엘) 교회는 이런 고백을 해야 한다: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주님이 함께 하면 무슨 일도 할 수 있다(우리 교회의 두 번째 기도 제목)! 비록 세상의 부가 교회에 가득 쌓여 있어도 주님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교회가 진정으로 강한 교회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막을 인생이 없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인생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역에 임해야 한다.! /행12장의 상황이 우리 조국 교회에 닥쳤다면… /한국 교회가 살아 나기 위해서는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한 세대 전70-80년대의 영성으로 돌아 가야 산다. 그 때에는 교회가 가난했고, 궁핍함 속에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부요한 교회였다. 옛날로, 더 자세히 말한다면 옛 시대의 영성으로 돌아 가야 한국 교회는 회생할 수 있다.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연약함을 가져야 한다. 지금은 이곳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고, 한국의 조국 교회도 추수가 이미 끝난 황량한 들판과 같이 되었다. 다시금 누군가가 힘들게 기경하고 밭을 고르고 이랑을 만들고 씨를 뿌려야 한다. 그래야 20년 30년 후에 다시금 70, 80년대와 같은 영적 추수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은 반복적으로 역사 세계 속에 일어나야 한다. /구약 시대에도 예레미야가 그 시대의 백성에게 외쳤던 말? 나라 멸망이 코 앞에 닥쳐 왔다. 멸망이 닥쳐 온 이유는 영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바알.아세라 섬김이 신앙 공동체에 스미어 들어 있었다. 회복하기 위하여는 언제의 신앙으로 돌아 가야 하는가? 광야 생활 할 때의 영성으로 돌아가자! 광야전승! 육신적으로는 고달프지만 영적으로는 우리 주님과 동행하던 최고조의 영성을 가졌던 시절이었다. 렘2:1-2<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리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개인적인 적용/다윗이 했던 기도와 같은 기도를 우리는 해야 한다. 개인적인 영성!/ 시39:4’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 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왕, 힘있는 자의 기도가 이상스럽다.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알게 해달라 ! /부와 건강과 권세를 누리지만, 자신이 단명하고 덧없는(훅 지나가는)인생살이를 알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된 자! 지팔 지 흔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나대는 성도가 가장 비참한 성도! 주님 없이도 내 힘 가지고 주를 섬기는 성도는 가장 비참한 성도! 긍정의 힘-조웰 오스틴 목사의 저서, 신념, 하면 된다는 이런 방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비참한 그리스도인! 지푸라기 같은 책이라 읽을 가치가 없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인생임을 자각하고 주 의지 함으로 늘 강건한 성도가 행복한 성도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약하게 만드실 필요가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 <가난, 질병,사회적 약자로,인간관계의 파괴로…>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이렇게 약함을 경험하게 하고 계신다. 약함 속에 성령의 능력이 역사한다. 내가 약한 자는 아니나, 약함을 느끼기에, 주를 바라보고 주께로 나갈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내게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우리로 약하게 하신 우리 주님, 우리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강하심을 온전히 드러내게 하옵소서!


켐연장

2017.02.07 06:09:23

2017년 1월 27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설파일은 기술적인 문제로 올리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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