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01

일시:11/17/2017 

선교기도: 

찬송가: 263장 이세상 험하고, 

635장 주기도 


광고:주일날 과일 하나씩 들고 오는 것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1부 예배는 없고, 2부 예배만 드립니다. 아동부와 중고등부는 모여 앉아 주기를 바랍니다. 예배부는 과일 담을 바구니를 성찬대 앞에 마련 해 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추수 감사절 절기 헌금도 정성껏 준비해서 드리길 바랍니다. 


1. 돌아 오는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해 동안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를 하나 하나 헤아려 보면서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엣말에도 사람이 되어서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금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금수는 짐승 같다는 말이지요. 닭이나 소나 개나 돼지는 주인이 먹이를 주어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식사를 하는데 감사기도를 하지 않고 먹은 것을 본 주일학교 아동이 저 사람은 우리 집 개와 같다고 해서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남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믿음 가지고 기적을 만든 영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예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나타나는 기적을 통하여 감추어져 있던 우리 하나님이 드러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큰 믿음이 있는가 라고 물으면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또는 고난과 시련 그리고 환란 가운데 있었는데,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부르짖었더니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때에도 우리 하나님이 영화롭게 됩니다. 시편 말씀 시50:15절<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환난과 고난과 시련에서 건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도 특별한 상황에 처하여 있었을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먹고 마시고 일하고 쉬는 삶의 현장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가? 주의 사랑을 입은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주의 사랑을 받고 또 받을수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이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주의 사랑을 이 시간에도 받고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내가 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말입니다. 나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 주의 사랑을 느낍니까? 밤에 깊은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이 떠서 깨어나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직장과 학교와 일터로 출근하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가족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서 하루 일과에 담소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일상 생활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느냐 말입니다. 성령이 해답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2천년 전에 하늘에 오르시면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고전2:12절<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을 주신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어떤 것인지 인지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 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 것이고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영화롭게 됩니다. 내 삶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영안을 뜨고 보면 일상적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불평하지 말고 현재의 상황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명품 구두를 못 신었다고 불평하지 말고 비록 운동화 신고 다니지만 멀쩡한 두 다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지요. 이번 추수 감사절에는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보고 주님께 감사하므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VII. 다섯 번째 청원: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의 용어는 오페이레마를 쓰는데 이것은 금전상의 빚을 의미합니다. 마태는 아람어로 되어 있는 호바(빚)를 여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 개역성경은 마태의 빚 (여자적인 의미로)을 죄로 번역했는데 잘 된 번역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죄는 하나님께 갚아야 할 부채로 죄인을 채무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도는 조건적이고 보상적입니다. 자신들이 타인을 용서한 만큼, 또한 공로와 선행을 쌓은 만큼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는 사상은 우리들의 공로나 행위에 근거하여서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구하는 청원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이 내게 입힌 손해와 죄를 용서함으로써 공로를 쌓고 그 반대급부로서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사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근거나 권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사함을 청구할 수가 있는 조건이나 자격일 뿐이다. 


예배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하게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마5:23-24<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 여기서 예물은 제단에 드리는 희생 제물입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를 가리킵니다. 제단에서 자신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막 드리려고 하는데 자신이 이웃에게 용서하지 않은 죄가 생각이 난다면 희생제물을 제단 앞에 그대로 두고 성소를 나가서 그 이웃을 찾아서 먼저 이웃의 죄를 이웃에게 용서하고 난 다음에(먼저 해야 할일) 와서 자신의 죄사함을 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들이 마음 속에 해묵은 증오와 반목과 갈등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의 죄에 대한 죄사함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이웃이 내게 입힌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죄 사함을 받기 위한 조건이나 자격일 뿐입니다. 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배당에 모여 있는데, 우리가 우리의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이 몹시 불편하게 되지요.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드릴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거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또 다른 해석을 소개해 본다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완료형인 아페카멘을 아람어로 번역해 볼 수가 있는데, 아람어에서 완료형도 시제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동시적 완료형(perfecticum coincidentiae)이 된다. 따라서 번역은:하나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앞부분은 용서에 대한 청원이나 뒷부분은 일종의 서약(서원)과 같습니다. 우선 우리 주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을 찾아 보도록 하지요. 


마18:23-35/일만 달란트 빚진 종/본문 읽을 것.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주인에게 용서를 청구하자 주인은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조건 없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그 당시 조그마한 나라의 예산 정도 되는 큰 돈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그 후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이 자기에게 빚을 갚지 않자 감옥에 넘겨 버렸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치 품삯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약 석달 조금 더 되는 돈입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돈입니다. 이 사실을 안 주인이 노발대발하여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옥에 가두어 버렸지요. 자기는 그렇게 큰 빚을 탕감 받았는데, 자기의 이웃이 자기에게 진 작은 빛을 탕감해 주지 않았기에 당한 일이지요.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주인에게 용서를 청구했습니다. 그 청구에는 죄 용서와 동시에 무슨 행동을 하겠다는 서약입니까? 내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용서하겠습니다는 서약이 들어 있었는데, 이 종은 그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용서 받았던 일만 달란트의 큰 죄가 일백 데나리온의 작은 죄를 용서하지 못하여서 감옥에 들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큰 죄를 용서했는데, 내가 나의 이웃이 나에게 빚진 조그마한 죄악을 용서하지 못하여서 내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취소 되어서야 쓰겠습니까?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니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의 이웃이 내게 지은 작은 죄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하지요.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중에 또는 기도하는 중에 이웃이 내게 지은 죄가 생각이 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 그 이웃에게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예배를 중단하고 이웃에게 말하고 와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에는 나의 죄를 먼저 하나님께 사하여 달라고 청구한다. 그와 동시에 그 기도의 자리에서 내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서약하면 된다. 기도가 끝난 후에 내게 죄 지은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선포하면 된다. 


우리들이 짓는 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원죄와 자범죄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죄 용서를 청구하는 것은 원죄에 대한 청구가 아니고 자범죄에 대한 청구이다. 자범죄는 이미 예수를 영접한 성도들이 삶 속에서 짓게 되는 죄를 말합니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마태에 사용된 우리들의 죄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수 개념(단수,복수)을 정확히 표시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번역된 한국어 번역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짓는 죄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 죄들에 대한 용서 청구를 주기도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사한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아페스라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할 때에는 사한다 혹은 용서한다로 됩니다. 용서와 사함에는 어감의 차이가 존재한다. 사함은 면죄을 의미하며 용서는 불벌(벌을 주지 않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는 사함(면죄)이고 죄에 대한 인간의 행위는 용서(불벌)이다. 하나님만이 면죄를 하실 수가 있습니다. 동일한 헬라어 동사 아페스가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될 때에는 사한다로 번역되지만 인간에 대하여 사용될 때에는 용서로 번역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번역한다면: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사함의 청원은 불신자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고 성도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하나님이 보셨고 아셨고 모두 십자가로 이미 용서해 놓으셨다. 단지 이미 사하여진 죄가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죄 용서를 청구하는 이유는 영계에서 이미 용서해 놓은 죄사함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내 속에 미움과 복수심, 원한과 증오심을 가득 가지고 있는 채로 하나님께 나의 죄를 사하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구체적으로 내 삶 속에 실현되지 않는다. 죄사함의 실현은 마치 저수지에 있는 물이 우리의 집의 부엌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저수지에 있는 물은 용서의 근원이신 하나님(사 43:25)이시고, 그 물이 수도관을 통하여(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부엌까지 운반(행13:38)되며, 수도꼭지를 틀면(우리의 믿음의 기도/대하7:14)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마6:14-15에서(주기도문이 끝난 다음에) 죄용서에 대하여 한 번 더 부연된다. 이것은 크리스챤(예수의 제자)에게 있어서 죄용서의 주제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삶은 용서가 신앙의 마침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죄에 대한 서로간의 자백/

약5;16<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피차용서/

골3: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성경상의 용서의 사람들! 

요셉/창45:4-8절 참조 

예수 그리스도/눅23: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스데반/행7: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용서가 있었기에 선한 결과가 있게 되었다. 용서가 없었다면 요셉의 형제들은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의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지옥에서 영원한 세월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들도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조롱하던 무리들이었다. 스데반의 용서가 없었다면 그를 죽이기로 찬성했던 사도 바울의 회심이 없었을 것이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내 원수가 망하고, 또 나 자신도 망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삼손에게서 본다. 


삿17:28-31절 


이 다섯 번째 청원을 하기 싫다면 어떤 삶을 살면 되는가?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왜 서로를 잘 용서하지 못할까? 주기도(복음송)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겠다는 내용이 빠져 있는 채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송:주기도 송을 한 번 불러 보겠습니다.찬송가 635장! 


하나님께 자신의 죄사함을 청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웃이 자신에게 입힌 죄를 용서해야 한다. 미리 용서해 놓고 자신의 죄사함을 기도해도 좋고, 아니면 기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죄사함을 청구하면서 이웃이 내게 입힌 죄를 용서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 찾아가서 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 된다. 


다섯 번째 청원과 관련된 성도의 신분은? 성도는 죄사함 받은 의인이다. 성도는 죄인이면서 의인이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라틴어)로는 Simul iustus et peccator!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이것은 동전이 양면과 같다. 동전이 가는 곳에는 언제든지 이 면과 저 면이 함께 간다.


켐연장

2017.11.20 15:45:57

2017년 11월 17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1117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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