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00

일시:11/10/2017 

선교기도: 

찬송가: 246장(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1. Impossible,. I’mpossible의 차이. 

왜 이런 차이가 나 있을까? 어퍼스트로피가 I 와 m사이에 들어 왔기 때문에 정반대의 의미가 생겼다. 불가능이 가능하게 된다. 나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이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면 나는 강해지고 나는 풍족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실까? 그냥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 오십시요 라고 요청하면 들어 오실까? 천만에요?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 오실 영적인 조건을 내가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내가 내 생각 내 뜻,내 고집, 내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 편에 설 때에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면서 내 삶에 들어 오십니다. 내 고집 내 생각 내 뜻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채로 하나님을 불러 보았자,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 오시려고 해도 내 고집과 내 생각과 내 고집이 방어 벽이 되어서 하나님이 들어 오실 수 없습니다. 그 방어벽이 내려 놓아 져야 하는데, 그것을 내려 놓으면 그냥 우리 주님이 내 삶에 들어 오십니다. 나의 어퍼스트로피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나의 삶에 초청합시다. 


Everything-God=0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인생의 종말이 그와 같다. 

Everything=0+God. 욥에게서 본다. 


VI. 네 번째 청원: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일용할 양식은 영적인 양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오늘 하루에 우리의 몸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이 요청은 오늘 먹을 거리, 때거리를 우리에게 주십시요 라는 요청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양식을 달라는 이런 간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이 요청은 오늘 먹을 거리가 없어서 밥 굶고 있는 거지들이 하는 간구입니다. 내가 주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나는 이 간구에 대하여 해당되지 않으니 이 간구는 스킵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내 집에는 냉장고 안에 먹을 양식이 풍족하기 때문에 나는 이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비록 내가 부자여서 내 집에 먹을 양식이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고요? 내가 열심히 일해서 가지고 있는 돈도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들을 우리는 단지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쓸 때에 누구의 허락을 맡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허락을 맡아야 합니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일용할 양식을 쓸 때에 그것의 주인인 우리 주님께 요청해서 허락 받은 다음에 써야 합니다. 그러니 부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이 간구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양식을 풍족하게 집에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는 영원히 거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ㅜ 우선 단어의 의미부터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용할(헬라어:에피우시오스) 양식’에서 일용할로 번역된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한 번 나오는 단어이다.에피우시오스는 에피(전치사:위) 와 우시아(존재,본질)로 되어 있는 합성어다. 우리나라 개역성경은 ‘일용할’로 공동번역은 ‘오늘’로 번역했다:오늘 필요한 하루치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양식(헬:알토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자적으로는 우리의 빵(our bread)이다. 빵이란 1세기 유대 서민들의 주식이 보리로 만든 주먹크기의 까무잡잡한 주먹밥이다. 생활이 좀 윤택한 사람들은 밀로 된 빵을 주식으로 먹었다. 예수의 공동체가 가난한 서민들이기에 보리로 된 빵을 먹었을 것이다. 서구인들에게는 빵으로 번역하면 되지만, 우리들처럼 쌀로 된 밥상문화에서는 그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까? 같은 단어를 마태복음 4장(예수의 첫 번째 시험)에서는 떡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떡은 늘 먹는 것이 아니다. 늘 먹는 것은 밥인데 밥은 food이기에 아직 조리가 되지 않은 raw food로서 양식(먹을 거리 전부)으로 번역했다. 잘 된 번역으로 생각한다. 순수한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먹거리, 때거리”를 주시옵고가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간구를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요? 


예수의 공동체는 가난한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가난했을까요? 우선 예수님부터 봅시다. 예수님은 얼마나 가난했을까요? 아버지가 요셉인데 목수입니다. 별로 잘 살지 못합니다. 근근이 살 수 있는 직업이 목수입니다. 예수께서는 태어날 때에도 번듯한 요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말구유에 뉘였습니다. 3년간 공생애 사역을 하는 동안에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집도 없고, 오직 겉옷과 샌들과 지팡이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주님을 찾아 와서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자기는 따르겠다고 말하자, 우리 주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눅9:58절<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대답했지요.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의 삶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말이지요. 


또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선택한 후에 예수 공동체를 만들어서 갈릴리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지요. 예수 공동체를 만들어서 복음 전파 사역을 할 때에는 경제적으로 조금 나았을까요? 별로 나아진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그 당시 서민들처럼 가난했습니다. 가난하고 배 고팠기에 길가다가 예수의 제자들이 밀이삭, 보리 이삭을 잘라서 비벼서 먹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공동체도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의 서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삶이었습니다. 하루 일을 못하면 다음 날 온 가족이 굶어야 하는 그런 아슬아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매일 매일 염려하면서 살았습니다. 무슨 염려?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마실까를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는 우리 주님이 당시 서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 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면서 책망하셨지요. 서민들은 그날 그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하여 늘 걱정하면서 염려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가난한 분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요청하라는 말은 마음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보스톤에서 삶에서 이 ‘오늘의 양식’을 청구하는 일은 불필요한 일이지요. 우리 가운데 먹을 거리가 없어서 밥 굶고 있는 분은 없지요. 이 간구는 확실히 예수님 당시나 오늘 우리들에게는 내일 먹을 양식이 없는 분들이 하는 실제적 간구입니다. 


이 간구는 그저 먹는 것에만 국한 된 간구가 아니라 보스톤 땅에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보스톤에서 살아가자면 적어도 아파트 비용이 있어야 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집을 사서 유지하는 비용이 있어야 하지요, 또 차도 필요하고요, 차가 있으면 차 보험도 필요하고요, 건강 유지를 위하여 의료 보험도 필요하고요, 아이들 교육을 시킬 돈도 필요하고요, 이것 저것 따지면 보스톤에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먹는 것만 있어서는 못 살지요.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일용할 양식은 오늘 보스톤 땅에서는 이 땅에서 살아갈 최소한의 비용, 최저 생계비를 채워 달라는 간구가 되겠지요. 


왜 우리 주님께서는 쫀쫀하게도 하나님께서 가난한 서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잘 살게.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간구를 하라고 시키시지 않았을까? 만약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가르쳤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치심에 매혹되었을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돈 많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간구가 아니라 겨우 허기나 면하게 하루치 양식만을 구하라고 시켰을 까요? 우리 주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자족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탐욕은 신앙생활에 해롭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우리의 삶에 있는 온갖 종류의 탐욕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탐욕에는 종류가 많지요. 가장 흔한 탐욕이 돈, 부에 대한 탐욕입니다.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합니다. 돈 많음이 곧 나의 행복과 직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서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물질-맘몬에 물들어 있으면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돈 따라 움직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탐욕에 물들어 있으면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탐욕이 있는 분들은 이런 말을 자주합니다. 내가 돈을 좀 번 후에 교회 나가서 예배 드리고 하나님을 찾겠습니다. 이런 분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돈을 조금 벌게 되면 더 벌고 싶은 탐욕이 있어서 하나님과는 관계 없는 삶을 살게 되지요. 


요즈음 사탄마귀가 그리스도 공동체를 무엇 가지고 공격하나요? 돈 가지고 공격합니다. 즉 부자가 되라고 우리를 꼬득입니다. 이것을 번영의 신학, 번영의 복음이라고 부르지요. 믿음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 사업에 실패하거나 병들거나 하면 저 사람은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단정을 하지요. 예수 믿으면 가난에서 벗어나서 가정 형편이 피이고, 예수 믿으면 병든 몸이 낫게 되고 이런 세상적인 행복이 가득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신학 사상이 무엇이라고요? 번영의 신학, 번영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교회 강단에서 이런 복음이 외쳐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그 반면에 고난을 받으라고 외치는 강단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수, 핵심이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는데 있습니까? 아니지요? 어떤 교단에서는 아주 대 놓고 이렇게 외칩니다. 삼박자 구원 말입니다. 영혼이 구원 받고, 육신이 건강하고, 돈 많이 벌어서 부하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Full-gospel! 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완전복음, 순 복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순 복음은 무엇이라고요? 고난의 신학, 고난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짓글 디모데 후서 1:8절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했습니다. 복음을 따라 살면서 고난 받는 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물론 복음을 따라서 살다가 보면 그 결과로 육신의 질병이 낫기도 하고,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의 목적이 되어서 건강이나 부자가 되는 것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음은 무엇이라고요?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데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 무엇이 따라 오나요? 영적인 성장이 따라 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장, 곧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예수를 닮아 가는 그런 가치 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영광의 복음이 아니라 고난의 복음: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사상이 바로 이 주기도문 네 번째 간구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구약 성서인 잠언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잠30:7-9절<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바로 이런 사상이 이 네 번째 간구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눅12:13-21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중요하냐고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즉 소유가 중요하냐? 아니면 존재가 중요하냐고요?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었느냐가 내 인생길 다간 후에 남는 것이지 내가 얼마나 벌어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영원까지 남는 것이 아니다. 돈,명예도 권세도 모두 땅에 놓아두고 영원세계에 들어간다. 영원까지 남는 것은 내가 천국 들어갈 때에 어떤 존재가 되어 있느냐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저 하늘에 들어 간 후에 내게 물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너에게 기대하고 바랐던 그런 모습이 되었느냐? 그린 인격이 되었느냐고 말입니다. 너 다운 너가 되었느냐고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으로 되어져 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눅12:15절 말씀<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의)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주기도문의 뼈대, 구조는 <맨 처음에 호칭이 나오고, 그 다음에 6개의 청원이 나오고 맨 마지막에 송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칭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로 되어 있지요. 6개의 청원은 3+3으로 나누어지지요. 처음에 나오는 3개는 Thou-petition인데, 이 세 개의 페티션에는 모두 <당신의>라는 소유격이 붙어 있습니다: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모두 당신의, 즉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거론되었지요. 뒤에 나오는 세 개의 청원은 WE-petition, 즉 우리 청원입니다: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옵고, 모두 우리의 라는 소유격이 들어가 있지요. 그래서 우리-청원이라고 부르지요. 당신 청원에서는 모두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우리 청원에서는 모두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관심사에 대한 청원입니다. 


자 그런데 3개의 우리 청원에서 맨 먼저 나오는 것이 우리들의 먹을 거리에 대한 청원입니다. 이 먹을 거리의 청원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맨 먼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적인 청원이 양식 청원보다 먼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양식청원을 먼저 하는 이유는 목숨을 연장시켜서 죄사함의 은혜에 이르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깔려 있다. 죄사함을 위한 청구를 하다가 그 은혜를 받지 못하고 육신의 기력이 다하여 죽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원치 않을 것이다. 양식을 먹지 않으면 한 두 달 동안은 버티겠지만 죽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80년 90년 연장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죄사함이 일어 난다면 영혼이 살 수 있겠지요. 죄사함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는 합니다. 일생 동안에 이 문제는 풀어 놓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양식 문제는 긴급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1-2달 안에는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식 문제가 제일 먼저 거론되었습니다. 죄사함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목숨을 길이 연장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가 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일용할 양식"은 구약의 사상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 동안에 우리 하나님에 매일 마다 먹을 양식을 주신 것이 만나입니다. 


만나사건:

출16:13-36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 아침마다 진 주위에 내렸습니다. 14-15절에는 이슬 방울처럼 된 것인데, 작고 둥글고 서리 같이 가는 것인데, 아침마다 내렸습니다. 사람들마다 이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여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히브리말이 만나입니다. 그래서 그만 그것의 이름이 만나가 되었습니다. 만나는 31절에는 색깔이 하였고, 맛은 꿀 섞은 과자처럼 달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나는 매일 매일 진 주변에 아침마다 하늘로서 내렸습니다. 해가 뜨고 햇볕이 뜨겁게 내리 쪼이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에 진 주변에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렸습니다. 36절 말씀<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6일 동안은 매일 매일 아침마다 내렸고,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 아침에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로 매일 아침 거두던 만나를 두 배나 거두게끔 내려 주셨습니다. 만약 금요일 아침에 두 배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안식일 날은 이스라엘 백성이 굶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을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않았고 그 대신에 안식일 직전 금요일에 두 배의 만나를 내려 주셨지요. 만나 뿐만 아니라 또한 해가 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메추라기가 진에 날아오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잡아서 먹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는 동안 저녁에는 메추라기 고기를 먹었고, 아침에는 만나라는 떡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 그 날에 필요한 양식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주셨습니다. 출16:4절<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 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구약의 백성들에게 만나는 무엇이라고요? 광야 생활하는 동안 매일 매일 하늘에서 내려 왔습니다. 그 날 하루에 필요한 양 만큼 내려 왔지 그 이상도 이하도 내려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각자가 먹을 만큼만 거두었습니다. 출16:16절<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한 사람에게 필요한 양은 한 오멜 정도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필요한 그 이상의 만나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장하기 위하여 굽고 삷고 저장하고자 했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겨서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그 날에 필요한 양이지 그 이상의 양이 아니었습니다. 욕심을 부려서 더 많이 거두었지만, 모두 다음 날에는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광야 생활하던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배 곯지 않고 40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 매일 매일 하늘로서 비처럼 규칙적으로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필요한 양만큼만 내려 주셨지 그 이상을 내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출16:17-18절<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말이지요. 일생 동안 몸과 시간을 사용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 보았지만, 죽을 때 보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오직 관이 들어갈 땅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돈을 벌기 위하여 아둥바둥 거리기 보다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는 말이지요. 땅에서 열심히 일해서 번 것들은 모두 땅에 놓아 두고 가지만, 하늘의 것을 추구하여서 얻은 것은 영원히 남아 있겠지요. 


바로 이런 사상이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땅에 것을 얻는 것에 우리의 전부를 투자 하지 말고, 땅의 것은 그저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으로 족하다는 말입니다.


켐연장

2017.11.15 05:50:53

2017년 11월 10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1110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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