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98

일시:10/27/2017 

대표기도: 

찬송가: 369장:죄 짐 맡은 우리 구주 


호칭에 대하여: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시켰다. 우리 나라 말로는 ‘아버지’이고, 영어로는 ‘father’이고 성경이 기록된 언어인 헬라어로는 ‘pater’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에는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가르치셨다. 아람어로는 ‘abba’이다. 아람말 ‘abba’는 아버지에 대한 유대 어린아이의 애칭이다. 이 ‘abba’라는 말은 우리 말 발음으로는 ‘아빠’와 같다. 그리고 어감도 똑같다. 세 살 먹은 아이가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때에 갖는 어감을 말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시키신 일은 국부로서의 아버지나 민족적인 아버지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개별적인 아버지 혹은 개개인의 영혼의 아버지로서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귀절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 즉 장소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들은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절대 거리를 가지고 있는 하늘, 즉 거룩한 곳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서 ‘하늘에 계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내 주고 있고, ‘아버지’는 친밀감(intimacy)이나, 접근성(nearness)를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우리들(예수 믿는 성도들 사이)간에는 형제 관계가 맺어 집니다. 우리들은 한 아버지의 형제들입니다. 이 짧은 호칭 속에는 하나님이 누구이며(Who God is) 또한 우리는 누구인가(Who we are)를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간구할 때에 우리가 얻을 수가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pass word이다. 


히4:16<그러르모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엡3: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당신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아버지>아빠 우리의 신분:우리들은 아들과 딸들이다. 우리는 왕이신 우리 하나님의 Royal Family이다. 


첫 번째 청원(petition):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hallowed be thy name/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동사인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3인칭 단수 단순과거 명령형 수동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주체는 인간이나 인간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이다. 본래적으로 거룩하지 않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도록(신성시되도록)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비속화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거룩하여지게(신성화되도록) 해 달라는 기원입니다. 


누구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간구인가? 기도하는 기도자의 이름인가? 아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2인칭을 나타내는 인칭대명사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2인칭 대명사는 바로 우리 하나님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인간들을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번역을 한다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될 것입니다. 당신(너,자네)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하나님께 쓰자니 불경스러운 생각이 있어서, 주의 이름이나 혹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쓰기도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의 시상이 단순과거 수동태입니다. 단순과거는 과거에 단 한번 일어난 일에 대하여 쓰이는 시상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유일회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사건이지요. 예수께서 단 한번만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면 되었지 자꾸 반복적으로 역사 세계 속에 나타나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성도들이 유구한 역사 동안 예수께서 재림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우리 인생들의 교만, 불순종,무지,의심,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럽혀졌는데 십자가 사건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 지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금도 녹이 스는데 금가락지에 묻어 있는 떼를 닦아내면 금가락지가 빛을 발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땅에서 드리는 예배와 우리가 땅에서 사는 삶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거룩하기 때문에 아들도 거룩해야 합니다. 레11:45절<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구약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애굽 땅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는 목적이 무엇이라고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들을 우리 하나님이 죄악이 가득한 속된 세상에서 선택하여서 구별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한가지 목적, 우리를 향한 우리 하나님의 한가지 소원은 우리가 땅 위에서 사는 동안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거룩한 자가 되었기에 실제적으로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못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지은 죄에 대하여 울고 불고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들의 땅 위에서의 삶은 두 부분입니다. 모여서 예배 드리는 삶과 흩어져서 세상살이를 하는 삶으로 말입니다. 이 두 분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게 하옵소서-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악과 허물과 무지와 불순종을 알고 회개함으로써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예배 가운데 나타납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예배 드림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 예배의 갱신이고 예배의 회복입니다. 거룩함과 세속의 한계를 허물고 한 동안 유행했던 열린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없애 버렸다. 세상 불신자들을 예배에 초청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인데,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 예배 가운데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좋지 않은 예배 방식입니다. 우리의 경건한 삶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게 하옵소서-함께 예배 당에 모여서 드리는 공식적인 예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도 거룩한 삶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배는 거룩하게 예배당에서 잘 드렸는데 세상살이는 게 차반이라면 문제가 많은 신앙생활이겠지요. 


첫 번째 청원과 관련된 성도의 신분은? 경배자(worshiper) 


겔36:16-28 


두 번째 청원:나라가 임하시오며/Thy kingdom come/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중심적인 메세지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첫 째 메시지? 


마4:17<이 때부터 에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말씀하신 메시지? 

행1: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모두다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신국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나라’나 ‘하늘나라’나 용어만 다를 뿐 같은 개념이다. 이 두 용어는 모두 구약에 나오는 ‘malkuth shmaim’의 번역입니다. 하늘 나라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쓰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쓰는 용어입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나라로 표현되어 있고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인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는 다르다. 세상 나라는 주권,영토,국민이 있어야 성립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주권과 백성만이 있을 뿐 (제한된)영토는 없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고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에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의 관점을 가진다:already, not yet!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실현되었다:현재적인 실재(already)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과 동시에 새 시대가 도래했고, 그의 메시야적 사역, 즉 그의 천국 복음 전파와 귀신을 추방하는 사역과 질병을 고치는 사역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왕적인 통치가 이미 현재적 실재로 나타났습니다. 이 통치의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일어 났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된다(종말론적):미래적인 실재(not yet)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세계 속에 이미 실현 되었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다. 그 완성은 예수의 재림(parusia)과 함께 세상 끝 날에 되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already)과 완성(not yet) 사이에 주신 것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부분적으로 실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청원에 담긴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교회에 맡겨진 선교적 사명을 잘 수행하게 해 달라는 간구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비는 종말론적인 대망의 기원이다. 따라서 두 번째 청원으로 기도하는 우리들은 이 땅 위에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야 할 것이고 또한 하늘 왕국에 들어가기를 기원해야 한다. 


마태에 의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마4:17/회개 

*마5:20/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 

*마7:21/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 22:20절(마지막장 마지막절)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입니다. 천국 복음을 미전도 종족에게(마24:14)-그제야 끝이 오리라. 어떤 끝? 세상 끝이 온다. 


나라가 임하시오며’에서 동사가 3인칭 단수 제 2단순과거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 물론 나라는 당신의 나라이다. 인칭 대명사의 번역이 빠져 있다. 자 그런데 왜 ‘나라가’ 아니고 ‘나라이’로 되었을까? 나라는 우리나라 말에 ㅎ종성체언이기 때문에 ‘나라히’가 되었다. 1936년 개역본에서 ㅎ이 떨어져 나가면서 ‘나라이’로 되었다. 현재의 문법으로는 받침 없는 체언에는 모두 ‘가’사용되고 있다.


(오류1)나라이 임하옵시며를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암송한다. 

(오류2)우리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암송한다. 정확한 번역: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왜 사역형으로 번역했을까? 호칭을 아버지로 불렀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분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켐연장

2017.10.30 22:59:00

2017년 10월 27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10272017.mp3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22 금요기도회(12/15/2017) [1] 김영호 2017-12-18 279
521 금요기도회(12/08/2017) [1] 김영호목사 2017-12-11 233
520 금요기도회(12/01/2017) [1] 김영호목사 2017-12-07 243
519 금요기도회(11/24/2017) [1] 김영호목사 2017-11-27 233
518 금요기도회(11/17/2017) [1] 김영호목사 2017-11-20 283
517 금요기도회(11/10/2017) [1] 김영호목사 2017-11-13 412
516 금요기도회(11/03/2017) [1] 김영호목사 2017-11-07 246
» 금요기도회(10/27/2017) [1] 김영호목사 2017-10-30 253
514 금요기도회(10/20/2017) [1] 김영호목사 2017-10-23 5151
513 금요기도회(10/13/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6 242
512 금요기도회(10/06/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68
511 금요기도회(09/29/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46
510 금요기도회(09/22/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44
509 금요기도회(09/15/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47
508 금요기도회(09/08/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53
507 금요기도회(09/01/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53
506 금요기도회(08/25/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45
505 금요기도회(08182017) [1] 김영호목사 2017-08-21 264
504 금요기도회(08/13/2017) [1] 김영호목사 2017-08-14 260
503 금요기도회(08062017) [1] 김영호목사 2017-08-07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