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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196

일시:10/13/2017

중보기도:

찬송가: 시간 주님께 기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께 


1. 지난 시간에는 골방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골방기도는 깊은 곳에서 드리는 기도이고, 가장 낮은 곳에서 드리는 기도로 생각이 됩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오늘은 높은 망대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망대,망루는 중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이번에는 주여, 높은 곳으로 임하소서!

2:1-4<내가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있게 하라/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하박국이라는 예언자는 언제적 예언자입니까? 예레미야라는 예언자 알지요.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에 유다의 예언자였지요.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유다의 예언자가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이 예언할 때에는 근동 지방의 패권국인 앗수르가 약화되고 있었고 신흥 패권으로 바벨론이 발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하박국이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당시에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영성은 바닥 상태였고, 불법과 도덕적인 죄악이 넘쳤습니다. 나라가 망국으로 길로 성큼 성큼 다가 가고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번째 문제가 무엇입니까? 3-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사회에 공의가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불평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신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악이 가득 있고, 억압과 폭력이 있습니다. ,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 내의 악들에 대하여 징계하시지 않는가 하면서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떠나 살고 있다면 매를 때려서라도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 오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바로 제목을 가지고 하박국은 오랜 세월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박국의 물음에 대답을 주었습니다. 무슨 말로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응답하셨나요?

하박국 1: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말이 무슨 말입니까?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다는 말은 바벨론 군대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의 악을 징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 군대는 표범보다 빠르고 독수리의 날음과 같이 민첩한 군대라고 8절에는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오는 목적은 이스라엘 땅에 강포를 행하러 온다고 9절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떠나서 살게 되면 율법적인 저주, 율법적인 재앙을 이스라엘 사회에 내립니다. 율법적인 재앙이 자연적인 재앙일수도 있습니다. 가뭄으로 혹은 메뚜기 재앙등등으로 밭에서 소출을 거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전염병을 돌게 하여서 죽게 하기도 합니다. 또한 외국의 군대를 불러 들여서 전쟁의 참화를 겪게 하기고 합니다. 이런 것을 율법적인 재앙이라고 부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들을 따라서 순종하여서 살면 삶이 형통하겠거니와 그렇지 않고 율법을 거슬러서 살게 되면 그런 율법적인 저주가 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언자 요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율법적인 재앙으로 메뚜기떼 재앙을 내렸지요. 예레미야나 하박국 예언자 시대에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율법적인 재앙들 가운데서 바벨론 군대를 일으켜서 택한 백성들을 징계하고자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장에서 젊은 이들이 죽고, 칼을 피한 자들은 전쟁포로로 적국에 끌려 가지요. 


하박국 예언자의 번째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벨론 군대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악을 심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응답에 대하여 하박국은 다른 의문이 들었습니다. 질문이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악하다 악하다라는 말을 할지라도 어찌 이방 백성인 바벨론 백성들보다 악하겠습니까 라는 소리가 아닙니까? 현금에 교회가 타락했다고들 개탄의 목소리가 높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적인 잣대로 때에 교회가 세상보다 타락했겠습니까? 교회가 절대적인 잣대인 하나님의 눈으로 때에 타락했다는 것이지, 세상적인 잣대, 상대적인 잣대로 때에는 교회는 그래도 세상보다 훨씬 공의롭고 세상보다는 훨씬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고 세상 보다는 의롭고 신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박국은 이와 같이 신앙의 고민이 생겨서 하나님께 "어찌하여," "," 그리고 "어느 때까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서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하박국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무관심 가운데 있는 같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손을 떼시고 수수 방관하고 계시는 같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보이시는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자신의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고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 1장에 보이는 예언자 하박국의 모습은 어떤 모습? 고민하는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하박국이 자기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는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져갔습니다. 본문 1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내가 파수하는 yTir]m'v]m 서며 성루r/xm;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는 누구? 하나님이십니다. 

파수하는 곳은 성루,망대,tower, rampart 평행관계에 있는 낱말입니다. 낱말은 성벽의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적이 오나 오나 망보는 곳입니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사방을 살필 수가 있는 곳입니다. 파숫대는 망대, 망루라고 부를 수가 있는 곳입니다. 하박국이 파수대에 올라갔습니까? 파숫대는 보초병이 올라가서 적이 오나 오나 망을 보는 곳이 지요. 그런데 예언자가 하러 파수대에 올라갑니까? 오늘 우리의 시대라면 예언자가 관광하러 파숫대에 올러갔더라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예언자가 하러 군인이 올라가서 지키는 초소에 올라갑니까?  

예언자가 망대에 올라갔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기도하는 자리에 올라갔다는 의미를 나타내 줍니다. 신앙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씨름하는 현실자리를 박차고 이제는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세상의 혼잡한 사상과 논리와 생각을 떨쳐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선지자 본연의 자리인 기도하는 자리를 찾아서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망대는 높은 곳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하박국의 심령 속에서는 이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주여 높은 데로 임하소서!"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골방기도는 낮은 대로 임하소서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오히려 높은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주여 높은 데로 임하소서라고 부르짖으면서 말입니다. 모토에 걸맞게 우리들의 예배당도 Arlington heights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보스톤의 다운타운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주여 높은 곳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임하소서!라고 하는 마음의 기도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갈 때에 구별된 장소, 예를 들면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구별된 장소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비록 높은 곳에 올라가 앉아 있더라도 세상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어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알링톤 지역의 높은 곳에 앉아서 예배드리면서 세상 잡념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가 없으십니다. 우리의 몸이 어떤 높은 곳에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너희 안에 마음의 망대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구별된 마음의 망대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실 때에 하나님을 영접할 수가 있는 마음의 망대 말입니다. 비록 몸이 직장에 매여 있어서 직장일로 분주할지라도 마음의 망대가 있는 분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있습니다. 사무실에 있을 때에라도, 가정에서 집안 일을 때에라도, 그리고 길을 걸어가든지 혹은 차를 타고 때에든지 누었던지 앉았던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의 망대가 여러분의 마음에는 구별되어 있습니까? 마음의 망대가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의 망대로 들릴 것입니다. 마음의 망대가 마음에 없다고 생각되시는 , 지금 자리에서 방을 만드십시오. 만드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의 망대에 들릴 것입니다. 


하박국이 기도한 후에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기다리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고민 거리, 불평을 말한 후에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하실 지를 기다렸습니다. 기도 후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는 묵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묵시라는 히브리어는 신탁이라고도 번역이 되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합니다. 자기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의 마음의 느낌을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하나 지성적인 논리로 정리한 생각도 아닙니다.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아무도 없다고 생각되는 어두움에서부터 들리는 구원의 소리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두운데 숨어 있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되는 어두움에서부터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기도와 기도 응답 사이에는 기다림이 있는 기다림이 때가 있는가 하면 짧을 때도 있습니다. 길고 짧은 것은 우리의 결정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들 가운데 기다림을 못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사이에 있는 대화가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에 나는 싫건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말할 기회조차 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따발총처럼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린 후에 하나님께 이제 마이크 잡으시고 말씀하시려고 때에 기도가 끝났다고 그냥 하나님의 소리도 듣지 않고 일어서서 기도의 자리를 떠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기도 응답을 받을 수기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이런 성도들께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기회를 하나님께 주십시오. 이런 성도들께서는 기도의 습관을 고치십시오. 부단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기도 중에 깨어서 기다리십시오. 그냥 성급하게 간구와 소원을 드렸다고 기도가 끝났다고 일어서지 마시고 자리에 그냥 앉아서 기쁨을 가지고 마음의 찬양을 하면서 나의 기도 제목에 대하여 응답으로 성령의 영감이 주어질 때까지 기도의 자리를 뜨지 말고 자리에서 기다리십시오. 기도의 자리에서 바로 기도가 응답될지 아니면 내가 일상적인 나의 삶의 자리에 가서 비로소 기도가 응답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셀룰라 폰은 놓아야 전화통화가 가능하지요. 셀룰라 폰을 꺼놓고 전화를 기다리면 incoming call 받을 수가 있나요? 기도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한 후에도 계속해서 깨어 있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시므온과 안나 여선지자-메시야를 평생 기다리다가 만났다. 성도는 평생 살면서 무엇을 잘해야 한다고요? 기다림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기다림을 못합니다. 나이가 들게 되면 기다림이 훈련이 되어서 기다리지요. 영적으로도 자라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 말씀이 더디게 이루어질지라도 인내하면서 기다릴 수가 있지요. 


하박국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가 망대에서 기도했을 때에 문제가 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눈을 열어서 묵시를 보여주었습니다. 묵시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한다면 계시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묵시를 보여 주셨고 묵시가 늦게 이루어지겠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가 이처럼 중요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당부하시기를 아무리 바쁜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단숨에 읽고 이해할 있도록 쓰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글씨로 썼겠지요. 고속도로 표지판처럼 말입니다. 멀리서도 그리고 차로 빠르게 지나 가더라도 눈에 알아 있는 표지판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박국이 기도하다가 받았던 묵시는 무엇입니까? 묵시는 이중적인 것입니다. 

하나는 육신적이고 현실적인 것인 반면에 다른 하나는 세상 끝날 까지 없어지지 않을 진리의 말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하박국이 간구했던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시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지만 이방백성인 바벨론보다는 그래도 의로운 사람들인데 어찌 공의의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시는가에 대하여 하나님께 물었지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한 몽둥이인 바벨론을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을 하박국은 묵시로 받았지요. 하박국이 받았던 묵시는 역사세계 속에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응하리리라고 3절에 약속하신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박국이 묵시를 받은 66년후에 주전 539년에 바벨론은 멸망당하였습니다. 하박국이 받았던 묵시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예언자를 통하여 영원까지 살아 있을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시대가 변해도 없어지거나 퇴색되어지지 않는 묵시입니다. 바벨론이 망하리라는 묵시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과거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뿐이지만 하박국이 받았던 다른 묵시는 영원까지 진리로 남아 있을 말씀입니다. 묵시는 다름이 아니라 4절에 기록된 대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tn:Wma>B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의인이 자기의 믿음에 의하여서 살게 되리라는 묵시를 하박국은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서만 되어진다고 선언할 하박국의 말씀을 인용하지요. 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종교개혁 사상가들인 루터와 칼빈은 바울의 이러한 이신칭의의 사상을 붙들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지요. 이런 점에 있어서 하박국이 받았던 말씀은 너무나도 소중한 진리의 말씀이지요. 하박국의 묵시가 사도 바울에게로 그리고 종교 개혁사상가들에게로 전승되었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감 운동, 말씀 운동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승을 통하여 전달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성령 운동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영감을 받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크신 영향력을 끼친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 예수이십니다. 그의 말씀과 사역이 오늘 우리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박국이 받았던 "의인은 자기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은 사도바울이 인용했던 이신칭의의 사상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의인이 어떠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가진 모두 빼앗기고 목숨도 위태해지는 그러한 급박한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의인은 그러한 상황 속에도 무너지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가 가진 믿음.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닙니까? 환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얻어지게 되는 믿음. 연단된 믿음이 아닙니까? 환난의 과정을 거치는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믿음을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닙니까? 의인이 최후의 남은자로 살아있을 수가 있는 방편은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신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음으로 영생을 누리고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서 승리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복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은 악으로 있어서 악이 세상을 지배하고, 역사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암울한 상황이지만, 그리고 자신의 삶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같은 답답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갈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의 탄식, 우리의 고민은 무엇입니까? 하박국처럼 영적이고 거룩하고 고매한 것입니까? 아니면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것입니까?  우리의 고민과 기도의 제목은 땅에 악이 넘치기에 울고 슬퍼하는 고민이 아닙니다. 죄에 물든 인생들이 회개하지 않기에 우는 눈물도 없습니다. 우리의 고민은 하나님의 나라가 힘있게 뻗어나가지 않기에 탄식하는 탄식도 없습니다. 우리의 탄식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입니다. 세상적인 염려와 근심에 눌린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영적인 간구를 수가 있을 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눈이 거룩한 것에 대하여 열려서 그것을 간구할 수가 있을까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일까요? 비록 우리가 간구하고 있는 기도의 제목이 육신적인 것이 전부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탄식하면서 이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께 탄원했던 모든 육신적인 기도의 제목을 영적으로 우리는 간구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에게 있어야 모든 육신적인 간구들, 예를 들면 먹는 마시는 입는 , 학위를 마치는 , 직업을 가지려는 , 사업상의 성공, 배우자를 구하는 등등의 모든 일들을 영적으로 간구할 있는 길은 모든 일들이 수단이 되어질 때입니다. 어떤 수단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단 말입니다. 내가 간구한 모든 육신적인 기도의 제목이 기도의 목적이 되어버린다면 그야말로 육신적인 간구가 되어버리지만, 기도의 제목이 수단이 되어 준다면 우리는 훌륭하게 영적인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기도가운데 씨름하고 있다면 우리의 간구도 하박국처럼 고매한 간구일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도 4번째 간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라고 되어 있지요. 번째 간구는 육신적인 내용입니다.  주기도문을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목적은 주기도문의 앞선 개의 영적인 간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아닙니까? 양식 자체가 목적이 되어 되어 버린다면 예수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어디 있겠습니까? 




켐연장

2017.10.17 05:24:05

2017년 10월 13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1013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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