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94

일시:9/29/2017 

기도: 찬송가:368장(주예수여 은혜를 내려 주사) 


오늘 기도 제목:기름부어 주소서! 성령 부어달라는 말입니다. 

왜? 내 사업에 내 개인적인 업적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빌립니까? 아니지요. 왜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한가? 주님을 더 알기 위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주님과 더욱 깨닫고 주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 또 무엇을 위하여? 사역을 위하여? 어떤 사역?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 내게 부탁하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말입니다. 주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 주님께 무엇을 부어 달라고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 병자의 고침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담/지온/김신엽 권사/약한 지체들 위하여 택한 다음 세대를 일으키어 달라! 아동부 아이들, 중고등부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택한 다음 세대로 자라나서 우리 주님께 사용되는 아이들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1. 기도는 무력감 속에서 나온다. 어떤 심령 상태? 무력감! 할 수 있다는 신념 가운데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나님도 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없으면 하나님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요. 이 진술은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코팅해 놓고 있을 뿐 실제적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의지합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이것은 신념! 엘에이의 수정교회(로버트 슐러 목사) 이런 슬로건으로 대형 교회를 만들었지만 얼마 못 가서 교회가 파산했다. 최근 미국 남부 남침례교단의 긍정의 힘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 목사! 로버트 슐러 목사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신념! 긍정의 힘이 지금은 번성하고 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도는 ‘무력감’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무력감은 어디서 생기는가? 약함, 즉 연약함을 느낄 때에 무력감이 생깁니다. 내가 가진 자원을 가지고, 힘과 능력과 기술과 전문 지식을 가지고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가진 자원을 다 쓰고 힘썼지만 실패로 끝나 버렸습니다. 이런 좌절과 실패 속에서 내가 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신념과 다릅니다. 오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켐연장 교회의 기도 제목 두 번째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막을 인생이 없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이룰 인생이 없다’-무력감을 경험한 성도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이 무력감을 경험하면 기도가 달라진다. 어떻게 기도가 바뀌는가? 오 주님 나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님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서 그 일을 이루소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냥 나를 내려 놓고 나를 열어 놓아 드렸더니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대신하여서 그 일을 행하시더구만요. 그 이전에는 우리 주님 내가 그 일 하겠으니 함께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지요. 예전에는 그냥 내가 선두에 나서서 일하고 우리 주님을 옆에 세워 놓기만 했지요. 똥 발 빠지게 일했지만 열매가 맺히기는 하는데 큰 열매가 맺히지 않고 조짠한 열매만 맺혔지요. 


무력감-이것은 무기력과는 다릅니다. 무기력은 우울증의 병리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무력감은 그렇지 않지요. 무력감은 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짜 기도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무력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자산, 내 능력, 내 힘, 내 기술, 내 인맥, 내 전문지식을 모두 사용했지만 내 문제가 해결이 안되었을 때에 무력감을 느끼게 되고 이 문제를 비로소 하나님께로 가져 갈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내 힘 가지고는 안되는구나 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이것이 무력감입니다. 이 무력감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비로소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게 됩니다. 내가 아직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처절하리 만치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무력감을 일으키고 무력감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을 기도의 제 1 법칙이라고나 할까요. 


 구약 시대,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이지요. 이 때에도 이런 무력감 속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분이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여호사밧 왕입니다. 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으로 왕통이 이어지지요. 대하 20:12-13절: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지금 여호사밧 왕이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큰 위기를 맞고 있지요. 어떤 위기입니까? 요단 건너 편에 퍼져 있는 모압, 암몬, 에돔이 연합군을 편성하여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처 들어 왔습니다. 여호사밧 임금이 무척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이 연합군을 맞아서 싸워서는 결코 이길 수 있는 승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임금은 유다 전역에 경건한 자들을 예루살렘에 불러 모아서 금식 기도를 시켰습니다. 금식기도하면서 여호사밧이 드렸던 기도문이 조금 전에 읽었던 구절입니다. 우리는 대적할 능력이 없습니다. 또한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합니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은 주만 바라 볼 뿐입니다. 여호사밧 임금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무력감 때문에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누구를 통하여 말입니까? 예언자를 통하여 구원하리라는 신탁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야하시엘이라는 예언자입니다. 야하시엘 예언자가 예언합니다. 이 전쟁은 너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신탁의 말씀이 여호사밧을 믿음 위에 세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군대를 내 보낼 때에 맨 앞에 찬양대를 앞세워 보냈습니다. 찬양대가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에 적군에서는 적정 분열이 일어나서 서로 치고 박고 하다가 연합군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만약 여호사밧이 그의 군대를 의지했더라면, 패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열세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무력감이 일어났고, 그 무력감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면서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여호사밧을 구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의식은 무력감 속에서 일어납니다. 


 유다왕 히스기야왕 시대. 701년 

북방의 초 강대국 앗수르가 군대를 유다땅으로 보냈습니다. 이 때의 앗수르 왕은 산헤립이었고, 그의 군대 장관은 랍사게였습니다. 이 때의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왕은 히스기야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을 돕는 예언자는 다름 아닌 이사야입니다. 북방의 패권자인 앗수르가 아람의 다멕섹과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온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 요15:5절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무력감! 주님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념이지요.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우리 주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3년 동안 공생애의 삶을 철저한 이런 ‘무력감’속에서 살았다. 요5;19절<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가장 영적으로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조차도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갓난 아이와 같은 우리들은 더 말해서 무엇하리요? 요5:30절<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우리도 철저하게 무력감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포도 나무 비유는 바로 이런 무력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비유다. 주님과 연합되어 있을 때에 열매를 많이 맺는다. 어떤 분의 실험, 포도 나무 가지고 100m 정도 뻗어 가게 했더니 그 100m 끝에도 포도가 열리더랍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1mm만 떨어져 있어도 어떤 열매도 못 맺는다. 요15:4절<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2.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중생한 후부터 바로 기도가 시작된다. 조금 전까지 기도의 시작은 어떤 상태에서 시작되는 지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기도 시작의 영적인 상태는 무력감이라고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요? 예수 믿고 나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은 후에 비로소 기도할 수 있게 되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가 예수를 영접하자 마자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요16:16-24절  

본문은 시제를 나타내는 낱말이 많이 나옵니다:조금있으면(16절-19절), 지금은(22절), 그날에는(23절), 지금까지는(24절). 


 24절의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까지인데 그 때까지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 간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예수께서 육신적으로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고 다시 사신 후에는 육신적으로 함께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때가 ‘그날에는(23절)’입니다. 예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본 후부터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신앙적 생활이 시작됩니다. 무슨 생활일까요?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 믿는 첫날부터 시작됩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합니다. 신생아가 태어나자 마자 호흡을 시작합니다. 호흡을 하지 않는다면 죽습니다. 20년 30년 믿음의 년조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하는 순간부터 기도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경우:바울은 기도의 사도이다. 그가 언제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을까요? 사도행전 9:11절: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여서 모두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려 오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지요. 스데반의 순교로 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유대오 그리스도인들이 북방으로 도피하게 되지요. 그 중에 다메섹으로 피난간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지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에 해 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게 되면서 땅에 꼬꾸러졌고 그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리에 다메섹에 들어 갔지요. 그곳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바울은 기도하고 있었다고 조금 전에 읽은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가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다메섹에 피난하여서 살고 있는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서 그를 치유하시지요. 바울이 아나니아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만나자 마자 곧 바로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훈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다멕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부터 순교하기까지 사역하는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과 서신 서에는 바울이 자신의 생애 동안 55번 이상이나 기도한 내용이 발견됩니다. 당신이 거듭난 증거는 기도가 땡긴다는 말입니다. 거듭난 순간부터 기도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깁니다. 그런 새신자는 교회로 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런 새신자들을 기도하는 자리로 초대하여서 기도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새신자들은 기도의 동역자를 발견하여서 함께 기도하는 일에 열중해야 할 것입니다. 스포츠, 농구, 야구나 축구 등등을 잘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그리고 피나는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훈련 없이 스포츠를 잘 할 수 없습니다.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동네 야구, 동네 축구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훈련 없이는 결코 달인이나 명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나면 곧 바로 기도가 시작되는데 기도의 달인, 기도의 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의 이론을 알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훈련을 거쳐야 됩니다. 기도의 달인이 되고 싶은가? 훈련 하기 바랍니다. 


 요16:23b-24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구 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그 결과?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내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다고 한탄 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의 기쁨이 없어서 신앙생활에 매가리가 없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기도 응답의 기쁨을 단 한번도 못 받고 산다면 신앙생활을 왜 합니까?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니까 그저 보험 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교회 출입 합니까? 보험 들어 넣은 것이 날아 갈 까봐 무서워서 교회 결석 못하고 억지로 마지 못해서 교회 들락날락 거립니까? 이렇게 신앙 생활한다면 그야 말로 비참하기 그지 없는 신앙생활이지요. 신앙 생활의 기쁨은 기도응답에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루어 낼 수가 없는 나의 삶을 압도하는 그런 큰 문제들을 기도하면서 기도 응답으로 풀어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기쁨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기쁨을 한번도 누리지 못하고 하늘 나라에 들어 간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땅에 사는 동안 왜 그런 미련한 신앙생활 했는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늘에 들어가면 우리 하나님께서 큰 창고로 나를 들여 보내 줍니다. 거기에는 내 이름이 쓰여 있는 자리에 큰 선물 통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열어서 보는 순간 얼마나 땅을 치고 한탄할지 모릅니다. 내 인생에 어려움이 있었던 순간 순간들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것을 기도하면 곧 바로 주시려고 했는데 내가 기도하지 않았기에 그냥 선물 통에 넣어 두었던 것을 내가 하늘에 오니 돌려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땅을 치고 한탄 할 일이지요. 땅에 사는 동안 그것이 없어서 얼마나 힘들고 눈물 많이 흘렸던가요? 죠지 뮬러, 영국의 고아의 아버지는 대학 시절 예수를 영접한 후에 일생 동안 5만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다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듭시다. 무슨 약속 말입니까?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누구의 이름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버지께 예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얼마나 큰 약속입니까? 


 3. 어떻게 기도? 성령 안에서 간구!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있어서 우리는 앞의 구절에서 예수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마침에는 늘 ‘예수의 이름으로’기도합니다 라는 마침 구절이 들어 갑니다. 예수의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 주 예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말입니다. 불교 신자들은 ‘나무 아미타불’이라는 문구를 반복 하듯이 말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이처럼 귀중한 이름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에서 성령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끔 우리의 영에 감동을 불어 넣어 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성령 감동이 없는 기도는 메마른 기도가 됩니다. 성령 감동이 없으면 그 기도에 우리의 마음 전부가 실리지 않습니다. 말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는 기도가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기도의 말에 나의 삶의 전부를 실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성령은 어떤 영이라고요? 


우선 구약 성경 스가랴 12:10절<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님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심령은 영이라는 말을 번역한 말입니다. 은총과 간구의 영! 이것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이면서 동시에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간구하게 하는 영입니다. 이 성령 감동이 없이는 우리의 기도는 맹송맹송하면서 메마른 기도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쏟으면서 우리의 마음에 진한 감동 속에 머물게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부르짖게 만드는 분이 우리 속에 들어 와 계시는 성령님이십니다. 롬8:26절<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내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나로 기도하게 하기도 하고 친히 성령이 주도가 되어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방언 기도를 의미합니다. 성령이 친히 내 마음과 입술을 주장하여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기도 한다는 말이지요. 기도할 때에 이처럼 중요한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금 전에 읽었던 스가랴 본문에서 은총과 간구의 영을 어떻게 하시겠다고요?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어 준다는 말은 폭포수처럼 퍼 부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늘에서 퍼부어주시는 성령을 받으면 뭉클 뭉클한 감동이 내 심령에 임하고 눈에는 눈물이 비오듯이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내 입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간구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이런 은혜를 이 밤에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찬송가 368장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주를 더 알기 위하여 기도는 무력감 속에서 나온다. 내가 할 수 없기에 주님만 바라보는 시간! 성령 안에서 간구하자. 이 시간 성령의 능력을 퍼부어 달라고 간구합시다. 기도의 달인이 되자.


켐연장

2017.10.11 06:09:03

2017년 09월 29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929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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