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88 

일시:8/18/2017 

대표기도:중보기도 

찬송가: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나로 부하게


1. 시 한편 소개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 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약함에 대하여 


이현승의 ‘가을의 기도’입니다. 1연은 기도, 2연은 사랑, 3연은 고독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한 인간의 겸허한 기도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인생이 참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할 때에 우리의 몸을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흙으로 우리의 몸을 만든 다음에 하나님이 생기를 우리 코에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령이 되어서 움직이는 생명체(네페쉬 하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만드실 때에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부석부석한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강철로 만들지 않았고, 바윗돌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만약 강철이나 바윗돌로 만들었다면 우리 몸이 강철 같은 몸이 되었을 텐데요. 우리 몸을 하나님이 아주 약한 부석부석한 흙에서부터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약합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약함이지만, 영적인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인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우리 밖에 살아 있는 우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연약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내 연약한 육체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나의 연약함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될까요? 우리 모두 강해질까요?  


바울의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연약함/고후12:9-10절을 찾아서 읽겠습니다. 고후12:9-10절<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니라 > 역설적 진리! 


바울이 입을 벌려서 간증을 한다면 참 자랑 거리가 많습니다. 빌3:5-6절에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는 바리새인인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자신은 진골이 아니고 성골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상으로는 적통 가문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또 무슨 자랑 거리가 있습니까? 다멕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만남으로써 회심 체험을 했습니다. 유대주의를 버리고 복음을 영접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소아시아 유럽 땅에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빌립보 교회,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말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직전 컨텍스트에서는 입신체험까지도 했습니다. 이런 그라면 자랑할 거리가 참 많을 것 같은데, 그는 말하기를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약한 것들, 자신의 약점들을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소아시아와 유럽 대륙에서 선교 사역을 할 때에 이 사실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자신이 약함을 느끼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에 우리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이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이것은 고질병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몸에 일어나는 질병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의 옆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의사인 누가가 바울을 돌보았을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 의술로는 결코 고칠 수 없는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병이 선교 사역을 행하는 동안 늘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만나는 불신자들의 질병을 신유의 능력으로 고치는 데 정작 자기는 그런 질병에 시달리니, 선교 사역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몸이 아파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남들의 질병을 고치면서도 자기의 질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서 불신자들이 혹시나 복음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께 세 번이나 이 육체의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세 번 기도 했다는 것은 일정한 기간 동안 작정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 세 번의 기도에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라고요?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몸의 질병으로 고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보통 하나님의 은혜라면 몸이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가정이 평한 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몸이 아픈 상태에 있을 때를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큰 인물입니다. 영적으로 우뚝 솟아 있는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소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이방 불신 세계에 교회를 세울 때에 믿음 위에 서서 당당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그 선교 사역을 담당했으리라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불신 이방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에 두려워했고 떨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그 곳에서 목회하는 동안 바울의 심령 상태는 어땠습니까? 고린도전서 2:3절을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어떻게 대 사도인 바울이 보통의 성도들처럼 이렇게 두려워하고 떨 수가 있겠는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 1년 6개월을 거기서 목회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설립될 시작점부터 유대인들의 비방과 위협이 끊일 날 없었습니다. 수 백 명이나 되는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회심하고 세례를 받게 되자 유대인들의 고발로 바울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다행히 그 문제는 신앙의 문제였기 때문에 소송이 기각되었지만 유대인의 박해와 핍박은 도들 더해갔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이 무엇을 느낍니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 사도인 바울이라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바울에게 우리 주님이 밤중 기도할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행18:9-10) 라고 말씀하셨지요. 


바울은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겪었던 일을 고후 11장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고후 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의 선교 여행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여행이라면 기쁘고 즐겁고 신나는 여행인가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여행입니다. 생명을 걸었고 동시에 생명을 위협 받는 그런 여행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선교 여행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었고, 또한 그가 바라고 소망했던 선교 사역은 완수했습니다. 곧 그의 발이 닿는 지방마다 교회가 세워졌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도움 입니까? 우리 주님의 도움 때문입니다. 바울이 약함과 두려움을 느낄 때면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고, 그 기도를 들으신 우리 주님의 능력이 그를 구원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구원 체험을 해 보았기에 그는 담대하게도 고후 11:30절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내가 부득불 자랑할 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내가 강하고 평안 할 때에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고, 어떨 때에 나타났다고요? 복음 전파할 때에 박해와 핍박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이 일어났고, 캄캄한 어두움이 선교 사역에 드리워져 있을 때에 바로 그 때에 우리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런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인과 접속사를 쓰면서 자신의 여러 가지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선교 하면서 승리한 결과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승리를 일으킨 배경에 대하여 이야기 하겠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약점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자랑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들이 없었다면 우리 주님이 능력이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강한 세상 앞에서 우리들도 약해하면서 두려워하면서 떨지 않던가요? 바로 이런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 주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연약함/ 

우리 주님 예수님은 어떠했는가? 우리 주님도 그의 연약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고후13:4절<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금)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호령하시는 우리 주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가 육신을 입고 있었던 3년간의 공생애는 모든 인생들이 느끼는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연약함을 우리 주님도 경험하셨습니다. 선교 여행을 하시면서 육신 때문에 피곤해 하셨고, 육신 때문에 배고픔도 느끼셨고, 육신 때문에 목마름도 느끼셨고, 육신 때문에 잠도 주무셨습니다. 십자가 지심을 앞에 놓고 전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느끼는 그런 약함을 우리 주님은 모두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그도 인생들처럼 연약함 속에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의 연약하심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이 죽음의 권세에서 풀어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는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예수는 그의 연약함 속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연약함, 그의 죽으심 속에 그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연약함/ 

시39:4절<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 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다윗이 세 가지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종말 즉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건강하고 부귀가 있을 때에는 자신에게 죽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리고 병원 침대 위에 뉘어 져야 비로소 하늘이 보이고 죽음을 의식하게 되지요. 그러기 전에 힘이 있고 건강 할 때에 자신에게도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사람이 죽음이 나에게 그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삶을 산다면 훨씬 더 성숙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무엇을 기도했나요? 죽음이 있다면 언제 있는 지를 알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나의 연한이 얼마인가를 말입니다. 얼마나 오랜 동안 땅에서 살 수 있는가를 말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알게 해 달라는 말입니까? 자신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게 해 달라고 했나요? 아니지요? 무엇을 기도했나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누가 말입니까? 다윗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임금인 다윗 왕이 이런 기도를 했다는 것이 믿어 집니까? 아무리 육신적으로 강하고 사회적으로 권세 있는 자리에 있더라도 인생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존재이기에 죽음을 생각하면 한 없이 우리 인생은 연약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에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불안이 생겨 납니다. 이것을 실존철학자들은 존재론적인 불안이라고 부르지요. 불안한 이유가 현재 없는데도 불안을 느끼는 불안입니다. 건강하고, 손대는 일들이 잘 되어 지고 있고, 돈도 넉넉하게 가지고 있고, 모든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도 내 마음 한 구석에 존재론적인 불안이 가시질 않습니다. 그 불안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연약함입니다. 이런 연약함을 느낀다면 누구를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까? 생명의 근원 되는 우리 하나님! 이 분을 만나야 우리의 존재론적인 불안이 스탑되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우리 하나님이 주실 때에 존재론적인 불안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귀신 들린 아이들 둔 어떤 아비의 연약함/

막9:14-29절, 이 기사는 예수께서 산상변모 사건을 일으키신 다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는 중에 예수의 용모가 해처럼 빛난 모습으로 변행되었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그 산에 같이 있었습니다. 세 제자는 예수의 변형 사건을 보면서 너무나 그 사건에 매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그렇지만 산 아래에서는 난리 법석이 벌어졌지요. 무슨 난리가 생겼나요? 어떤 아비가 자기의 아들을 나머지 9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는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벙어리였고, 간혹 땅에 꺼꾸러지면서 거품을 흘리고 이빨을 갈고 파리해 진다는 거였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간질 증세이지요. 벙어리 이면 말을 못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로 귀머거리로 태어났는데 또한 간질 증세까지 겹쳐 있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아이는 귀신 들린 것으로 알고 있었고, 우리 주님도 이 아이는 단순히 육신적인 질병이 아니라 그 질병은 귀신으로 말미암았다는 병마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그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추방함으로써 그 아이를 치유하셨지요.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에게 명하시면서 그 귀신을 그 아이에게서 추방함으로써 그 아이의 질병을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치유하셨습니다.  


그 아이의 아비가 먼저 산 아래 있는 예수의 9제자들에게 그 아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치료해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9제자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해 보았지만 아이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주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서 그 아이의 아비를 보게 되지요. 이 때 그 아이의 아비가 예수께 이런 요청을 합니다:당신의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 소리를 듣고서 우리 주님이 그 아비를 책망했습니다: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책망의 소리를 듣고서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렀습니다: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 아비의 외침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요? 자신의 무력감이 배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면 될 수 있겠는데 그 능력이 흘러 들어 오는 도관 같은 것인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력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무능력과 자신의 연약함을 경험하였기에 그 연약함을 통하여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나의 연약함/

나의 경험 성도 여러분 목사인 저는 두려움이나 불안감 없이 목회 생활 정진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아닙니다. 저도 두려움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목사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지낼 때도 많았습니다. 사모, 내 wife에게 언제나 쫑꼬 듣는 소리가 목사가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 되는가라는 소리입니다. 30-40대 때에는 온갖 종류의 두려움으로 많이 시달렸습니다. 특히 육신의 질병 때문에 두려움이 많이 찾아 왔습니다. 지금 와서 과거를 둘러 보면 어이 없는 그런 두려움이었습니다. 모두 연약함 때문에 생겨난 두려움이라는 말입니다.  


30대 중반에 중이염이 발병하여서 약 8개월간 통원 치료하면서 치료가 안되어서 중이염 수술을 하였지요. 그 긴긴 8개월간의 기간 동안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감고 기도할 때에는 믿음이 역사하는데, 눈 뜨고 나면 세상인지라 병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약해지면서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확신과 두려움 사이에서 널 뛰기를 8개월간 했지요. 그러다가 수술하면서 중이염을 치료하였고, 그리고 그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중이염을 앓았던 그 8개월 동안 연약함을 깊이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지요. 중이염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하나님의 능력을 말입니다. 8개월 동안 왼쪽 귀에서 고름이 나왔는데, 이것이 마르지 않으면 수술 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름이 마르지 않은 상태로 수술하면 다시 중이염이 재발하는데, 그러면 수술 하나마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수술하기 전에 고름이 흐르는 것이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고름이 8개월동안 멈추지 않는데 무슨 수로 마르겠습니까? 수술하기 얼마전에 삼각산 너럭바위에 이전에 하던 대로 금요일날 밤에 올라가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귀에서 나오는 농을 스탑시켜야 합니다. 8개월간 나오는 농을 어떻게 스탑시킬 것인가? 이것이 마르지 않으면 수술을 할 수 없으니까요 두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그 날 밤에 기도하는데 그날 밤은 달랐습니다. 내일 아침에 해가 돋을 때가 되면 내 귀에서 나오는 고름이 스탑되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농은 흘러 나왔습니다. 그 날 밤 기도하고 피곤해서 너럭바위에서 잠이 들었는 데 아침에 깨어 일어나 보니 성령께서 주신 마음대로 귀에 농이 그치고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 하루 밤 새 일어났고 몇 일 후 병원에 가서 수술하여서 30면이 지난 지금까지 귀에 탈이 없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8개월 동안 두려움과 불안은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 왔고 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들어 셔서 나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또한 이곳 보스톤에 1991년도에 와서 허리 디스크 발병했을 때 이 때도 심각했었습니다. 이 때도 우리 와이프한테서 어째 목사가 그렇게도 믿음이 없냐고 쫑코를 많이 먹었던 때였습니다. 3번4번 디스크가 삐어 나와서 2년 3개월간 아팠지요. 정말 많이 아팠습니다.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가 하는 두려움이 나를 억압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보스톤의 정형외과 오박사께서 이 상태는 수술해도 완치 되지 않는 그런 상태라고 그냥 그냥 통증을 견디면서 살라고 했습니다. 20분을 책상에 통증 때문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누워 있으면 편해야 하는데 누워 있어도 아파서 오래 못 누워 있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파멸된 내 모습이 눈에 어른 거려서 참 많이도 울고 기도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년 3개월 동안 어두움 속을 헤매면서 살았던 시절이었지요. 두려움과 불안이 주기적으로 다가 왔었습니다. 눈감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평강을 주셔서 평안한데, 눈을 뜨면 여전히 통증이 있어서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신탁을 주셨지요. 공부에서 손을 떼고 목회 사역을 하면 디스크를 낫게 하시겠다는 말씀말입니다. 공부에서 목회로 페러다임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 몸에 질병을 내렸다는 말입니다. 평강과 두려움을 반복하면서 1994년 2월 셋째 주일 켐연장 교회를 개척하는 그 날부터 통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허리 디스크는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허리 디스크라는 연약함을 겪지 않았더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우울증-불안 신경증! 최근 몇 해전에 근 일년 가까운 시간을 이 고통과 싸웠습니다. 이유 없이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고 불안과 두려움이 내 마음을 억압했었습니다. 중이염이나 디스크를 앓을 때에는 대상이 있어서 불안과 두려움을 겪었지만 이번에는 대상이 없습니다. 그냥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합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데요.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하면 그냥 주저 않아서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고,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이 강같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의 1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지요. 그런 싸움을 하면서 내 영혼이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로 말하면 이륙하여서 음속의 벽을 깨고 나르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고, 배로 말하면 얕은 근해에서 심해의 바다로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비체험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했지만, 이제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일치와 연합 되어 있는 그런 관계 위주의 사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근 1년간의 죽음처럼 무섭고 두려운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고 나니 그 어둠 골짜기 끝에는 이런 평강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나를 이렇게 하나님이 연약한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을 불평도 하면서 탄식하면서 보냈지만 하나님이 그런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내 육체밖에 살아 계시는 전능하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경험케 해 주셨습니다. 나의 연약함 속에서 나는 불안하고 두려워하면서 떨었지만 우리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위로하시면서 나를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울증을 이겨내고 그 후 2-3년 동안 근본적으로 우리 주님이 내 신앙적인 토양 자체를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무력감’입니다. 우리 주님을 떠나서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주님이 계시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이제야 하게 되었습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부활하여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니신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일도 할 수 있노라는 고백을 말입니다. 


요한복음 15;5절<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철저하게 나는 무력합니다. 무기력이 아닙니다. 무기력은 우울증환자가 겪는 병리적 현상이지요. 영적인 무력감은 영적으로 성장한 분들이 느끼는 영적 체험입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나는 강합니다. 나는 무슨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며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약함과 무력감을 경험한 자가 영적으로 장성하게 자라난 자입니다.


켐연장

2017.08.21 07:10:07

2017년 8월 18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818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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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금요기도회(11/17/2017) [1] 김영호목사 2017-11-20 283
517 금요기도회(11/10/2017) [1] 김영호목사 2017-11-13 412
516 금요기도회(11/03/2017) [1] 김영호목사 2017-11-07 246
515 금요기도회(10/27/2017) [1] 김영호목사 2017-10-30 253
514 금요기도회(10/20/2017) [1] 김영호목사 2017-10-23 5151
513 금요기도회(10/13/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6 242
512 금요기도회(10/06/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68
511 금요기도회(09/29/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46
510 금요기도회(09/22/2017) [1] 김영호목사 2017-10-11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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