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187

일시:8/11/2017

대표기도:

찬송가:214<나 주의 도움 받고자>

 

*기름부으심을 구하자! 기름부으심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위에 부어져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기름 부어주심인데, 이것은 성령을 가리킨다기름부으심이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지성과 학식과 경험과 재능과 기술들과 재물에 기름부음이 임하여야 우리 주님이 그것을 사용하실 수가 있다. 기술과 학식이 모두 준비되었다고 생각되는가? 이제 남은 것은 그 위에 기름부으심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요일2: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누구 주었다고요?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성령이 지금 우리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님, 기름부음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성령의 가르치심은 우리의 지성에 갈무리 되는 신학적인 지식을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의/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게 하는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내 삶에 내가 이해하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지 가짜인지를 분별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삶에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를 가르칩니다. 그런 성령의 가르침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가르침은 진실하고 참됩니다.

 

*설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머리에서 태어난 설교는 머리에 전달되고 가슴에서 태어난 설교는 가슴으로 전달됩니다. 머리에서 태어난 설교는 지성적인 설교, 혼적인 설교인데 이것은 이해력을 증진 시킬 뿐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지성만 만족 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가슴에서 태어난 설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영적인 설교입니다.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혼적인 설교는 자신도 망하고 설교를 듣는 사람도 망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성령으로 가르치고 평신도는 성령으로 배우고 성령으로 행하자!

성령으로 기도 유1:20

성령으로 교제 빌2:1

성령으로 봉사 빌3:3

성령으로 행하라 갈6:16,18,25

성령으로 하나 엡4:13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 롬8:13

 

한국에서 느낀 점을 나눕니다. 서울에 있다가 보면 느끼는 점도 많고 깨닫는 것도 많습니다. 만나는 사람을 통하여, 혹은 내 주위에 일어 나는 사건을 통하여, 혹은 들끓는 사회적 사건들을 통하여, 내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 조명이 있습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많은 생각과 느낌이 내 마음 속에 밀려 들어 오지요,

중국 선교 떠나기 전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발목 인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날 일로 인하여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먼 곳을 바라 보기도 해야 하지만, 바로 한 걸음 앞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담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저 멀리 있는 천국을 늘 바라보면서 걸어야 삶의 방향을 잃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천국이라면 천국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목표물이다. 그러나 그것 만을 바라보면서 걷다 가는 한 스텝 앞에 있는 장애물을 보지 못하고 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저 멀리 있는 천국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이 설정되었다면 부단히 우리의 한 걸음 두 걸음 앞도 주시해야 한다 거기에는 구덩이와 돌부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덩이를 못 보고 거기에 발을 내디디면 구덩이에 빠지게 되지요. 또한 돌부리를 못 보았다면 그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게 됩니다.

한 걸음 두 걸음 앞을 살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돌부리나 구덩이는 우리의 삶 주위에 있는 불의과 죄악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 불의와 죄악을 주시하지 못하여서 그것들 때문에 넘어지거나 빠진다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되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두 가지 시각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한 스텝 앞만 보아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저 멀리 천국만 보아서도 안됩니다. 먼 곳과 동시에 가까운 바로 코 앞도 볼 수 있어야 고난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 속에 넘치는 죄와 악들을 바로 잡아 가는 그런 예언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회야 어두움이 가득한 죄악 된 세상이니 이 사회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천국만 바라 보고 살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는 넘어지기 쉽상입니다. 사회의 넘치는 죄와 악이 내 심령을 상하지 않도록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 공의가 넘치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못한다면 성도들의 삶에는 고난과 시련이 끊이질 않을 것입니다.

시편 119:105<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어두움 밤 같은 세상에 한 걸음을 잘 못 디디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두움 밤 길을 갈 때에 등을 손에 드는 것이 아니라 발에 찹니다. 그러면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하여 걸어 갈 때에 한 걸음 앞을 비출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의 한 걸음 앞을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 받는다면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먼 방향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그 방향에 맞게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으면서 천국을 향하여 걸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국 가는 방향으로 떼어 놓아야지 천국 가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떼어 놓아서는 안되지요. 우리의 삶의 빛이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고정시켜 놓아서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우리의 앞을 비추게 만드시길 바랍니다.  

 

한국에서 어떤 자매를 만났는데 그 자매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자기 딴에는 많이 경험한 자매입니다. 그 자매가 말하기를 그 자매는 자기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로부터 교회는 루저클럽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말입니다. 루저클럽이란 인생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요. 물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루저클럽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 안에는 사업에 실패하고 진급에서 밀리고, 학교 공부도 못 마치고, 온갖 힘든 일들을 경험하고 있는 이런 분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생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하기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고 하시면서 우리 주님이 그런 사람들을 불렀지요인생의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님이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요.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자기의 인생이 승승장구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그런 루저 클럽처럼 보이겠지요.

못 생긴 나무가 성산을 지킨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하늘로 쭉쭉 잘 뻗어 있는 나무는 작벌을 당하여 값비싼 가구나 목재로 쓰이지요. 구부러져 있고 비비 꼬여 있는 나무는 사람들이 베어가지 않습니다. 그런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궁이에 땔감으로나 쓰일까 다른 용도로는 쓸 모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잘나가고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분들이 세상 일에 열중하여서 성공을 이루려고 하지 교회에 나올 리가 없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내가 실패를 경험하여서 비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져 있을 때에 나를 찾아 오셔서 나를 세우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를 베데스다 연못가에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던 38해 동안 자리 보전을 하고 있던 그 사람에게 우리 주님이  찾아가셔서 그를 치유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 가장 처참한 상태에 있던 그 사람을 찾아가셔서 그를 고쳐 주셨지요. 세상일로 나락에 떨어져 있는 심령이 위로 받고 세워져야만 비로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을 누가 할 수 있다고요? 바로 우리 주님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 이유와 의도가 무엇일까요? 물론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말씀하신 대로, 고전1:27-29<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이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 것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생의 루저들을 선택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이유는 성공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인생의 실패자였으나 우리 주님이 나를 불러서 내 심령을 만져서 세워 주심으로써 나를 치유하고 또한 나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나로 하여금 내 인생의 승리를 맛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이 일을 우리 주님이 행하셨음을 우리 이웃들에게 알림으로써 성공한 자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말입니다.

 

손에 붙들고 있는 것 내려 놓기!

또 그 자매가 이런 소리까지 합디다.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믿음이 어린 분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는 절도요 강도라고 생각한다고 합디다. 하나님이  강도인가요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최선의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다고 움켜 쥐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최선의 것을 받는데 방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하여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 것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세상 것을 놓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최선의 것을 붙잡을 수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최선의 것과 세상 적인 것을 동시에 붙잡을 수 없습니다. 쥐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을 때에 더 좋은 것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내가 붙들고 있는 세상 것을 빼앗아 갑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하나님은 절도나 강도가 아닙니다. 더 나은 것을 주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10:10절 선한 목자와 삯꾼목자의 대비: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절도요 강도가  아니라 누가 내 삶의 절도요 강도인가? 사탄 마귀가 아닌가? 사탄 마귀는 내 삶에서 빼앗아 간 후에 내 손에 다른 대체물을 주지 않는다. 내 돈 내 소유, 내 사랑하는 자, 내가 아끼는 것들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빼앗아 간 후에 더 나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하여는 내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은 일이 먼저입니다. 사탄 마귀가 속삭일 때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 놈들은 절도와 강도입니다.

 

43장 이야기:야곱이 베냐민을 놓아 보낼 때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곡식을 사러 형제들의 손에 베냐민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베냐민이 가면 베냐민 마져도 잃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야곱이 있었습니다야곱은 창42:36절에서 이렇게 넉두리를 늘어 놓고 있습니다: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베냐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욱 베냐민을 단단하게 붙들었습니다. 베냐민을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놓아 버리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무엇을 주었나요? 잃어 버렸던 요셉도 그리고 시므온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강도요 절도입니까? 아니지요. 내가 소중하다는 그것을 내려 놓을 때에는 죽을 것 같지만 내려 놓고 나면 더욱 큰 축복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생명/하이임:

사랑/아하바

정의/체데카

평화/샬롬

믿음/에무나

 

내 인생이 중대한 갈림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상담사를 찾는다. 목사를 찾는다. 힘있는 뒷배를 찾는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이다.

내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섰을 때에 무엇을 할 것인가? 기도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를 봅시다.

아브라함: 21장 사건에 의할 것 같으면 이미 이스마엘은 이미 십대가 되었고, 이삭은 이제 젓을 떼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삭이 젓을 떼는 잔치 자리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습니다. 이일 때문에 사라가 노했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 내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근심했다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라의 입장에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의 적이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삭이나 이스마엘이나 모두 그의 자식입니다. 이삭은 적자이고 이스마엘은 서자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는 일을 주저했습니다. 이스마엘을 집 밖으로 추방한다는 것은 생명의 안전이  보장 안되는  일입니다. 이 일로 근심하면서 고민하던 아브라함이 결단을 하면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낼 수 있게 된 결단은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21:12-1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 사라의 말 때문에 이스마엘 문제로 근심하고 고민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임하였고, 이 약속의 말씀을 힘입어서 결단하여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런 결단을 하면 좋으련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결단을 하게 된다. 그렇게 코너에 몰아 넣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낼 때에 창43:14절 말씀-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걱정하면서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시려고 야곱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기근 때문에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을 판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만 하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자! 형통하게 되리라! 하나님이 침묵하시더라도 상황 속에서 그것을 선택하여서 행할 수 밖에 없을 때에도 그것은 나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길이다.  당신의 상황은 지금 어떤 상황인가?


켐연장

2017.08.14 05:48:44

2017년 8월 11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811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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