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16 

일시:3/9/2018 

찬송가:546장(주님 약속 하신 말씀 위에서)


1. 지난 주에 읽었던 시편 23편 다시 읽겠습니다. 5-6절을 지난 주에는 시간이 없어서 해설 못했습니다. 오늘 5-6절을 다시 읽고 해석하겠습니다. 5-6절/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4절까지는 목자와 양과의 이미저리를 사용했고, 5-6절 여기서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이미저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손님초대/Hospitality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요. 


하늘의 하나님(sheperd-king, 목자이면서 왕)이 다윗을 식탁에 초대했습니다. 발 씻을 물을 주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고, 천국 잔치 자리에 앉아서 다윗이 편안히 즐기게끔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잔이 넘칠 때까지 부어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존귀한 손님, 귀빈 즉VIP로 초대 받았습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우리 주님의 귀빈으로 왕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있는 잔치 자리에 초대된 귀한 손님들입니다. 내 잔이 넘친다. 어떤 잔? 구원과 축복의 잔입니다. 주인이 귀한 손님에게 권하는 잔입니다. 그러면 마귀와 마귀를 섬긴 자들에게는 무슨 잔이 주어질까요? 저주와 진노의 잔! 


이 구절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선 고대 이스라엘의 Hospitality, 손대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인은 자기 집에 머무르고 있는 귀빈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의무조항입니다. 자기 집에 머물러 있는 소님을 어느 선까지 보호해야 하는가? 아무리 큰 손해와 희생이 따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예를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롯(창19:5-8)/자기의 두 딸을 희생해 가면서도 자기 집에 모셔 온 두 분의 손님을 보호하려고 했다. 창 19장에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천사 두 명을 소돔성에 보냈지요. 사람의 모양을 한 이 두 천사가 소돔 성을 방문했을 때에 롯이 소돔성 광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 두 명이 범상한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롯은 한 눈에 알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을 자기의 집에 모셔서 저녁을 성대하게 대접하고 자기 집에서 하루 밤 주무시게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밖에는 소돔 성 남자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롯의 집에 온 두 명의 나그네를 밖으로 끌어 내라고 롯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소돔 성 남자들이 게이였기 때문에 동성연애를 그 남자들과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롯이 이 사실을 알았기에 자기 집에 들어와 있는 이 두 손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소돔성 남자들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이 두 남자는 자기 집에 들어와 있는 손님이니 절대 손을 대지 말아 달라. 그 대신에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순결한 자기의 두 딸을 내어 줄 테니 그 두 딸을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고 이 두 남자에게는 아무 일도 행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떻게 롯이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을까? 자기의 두 딸은 소돔성 남자들에게 욕을 당해도 좋다는 말인가? 자기 집에 들어 와 있는 생면부지의 이 두 나그네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롯이 할 수가 있는가? 당시 고대 근동에 있는 hospitality 접대는 이 정도였고, 이것은 의무 조항입니다. 자기 집에 손님이 들어 와 있으면 주인은 자기의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 손님들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우리들은 결코 롯의 이런 처사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레위 사람(삿19:22-26)/베들레헴으로부터 베냐민 지파의 땅, 에브라임 산지로 가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에 어느 날 도착했습니다! 기브아 땅에 이르자 날이 저물게 되었고, 마침 어떤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노인이 레위인과 그의 첩을 자기의 집의 손님으로 초대해서 하루 밤을 쉬어 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밤이 되자 기브아 지역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와서 소동을 피웠습니다. 그 노인에게 레위인을 집 밖으로 내 보내라 우리가 동성 연애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 노인이 그들에게로 나가서 그 불량배들을 달랬습니다. 그 레위인은 자기 집 손님이니 이런 망령된 일을 하지 말아 달라. 그 대신에 자기에게 있는 딸과 그 사람의 첩을 집 밖으로 내 보낼 테니 그들에게 욕을 보이던지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고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그 레위인이 자기의 첩을 집 밖으로 내 보냈고, 그 불량배들이 그 첩을 욕보였고 새벽에 그 여인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지요. 이런 악행이 일어나자 온 이스라엘 지파가 들고 일어 나게 되었고 베냐민 지파와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베냐민 지파가 거의 몰살 당하고 400명 정도 밖에 살아 남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도 고대 근동의 접대 의무를 볼 수 있지요. 무슨 희생을 치러서라도 자기 집에 들어와 있는 손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한다고요? 자기의 집에 초대한 귀한 손님으로 대우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원수마귀가 우리를 내 놓으라고 압박을 하나님께 해도 하나님은 꿈쩍도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귀빈! 귀찮은 빈대가 아니라, 귀한 손님! 우리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희생하셨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보스톤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일생 다 가는 동안 든든함을 느낄 것이다. 


 잠18:10절<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386장<만세 반석 열린 곳에~>  


2.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신의 약속은 결코 폐기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한 세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서, 세상 종말까지 유효하다. 또한 한 지역, 유대인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하나님의 그 약속은 유효하다.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 비록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그 때에라도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하나님이 책임지고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 이것을 성령으로 인한 영감 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이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이 세대와 세대를 통하여 이어져 가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까지? 우리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 말씀은 전승되어 가야 합니다. 


 21세기 이 땅, 보스톤 땅에서 살아 가는 우리는 각자가 어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서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참 중요한 일이지요. 


 사도 행전 2:38-39절 말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주후 1세기 예루살렘 성전에서 베드로를 통하여 선포 되었습니다. 2천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 예루살렘 성전 구내에 모여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전했던 베드로의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전해진 이 하나님의 약속은 2천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들에게 살아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2천년이나 떨어져 있고, 공간적으로는 대서양 건너편이지만, 이 약속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참 신기하고 놀랍지요.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내려 주시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최대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두 번째 선물이 성령님이십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족속이 예수를 믿어 구원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딤전2:4절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하나님의 약속이 켐연장 공동체 안에서도 성취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영감 있는 말씀이기에 2천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약속의 말씀은 결코 우리 인생들에게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그 약속의 말씀은 살아 있을 것입니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 갈 것입니다. 이것이 영감 운동입니다. 이사야가 이런 말씀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40:8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신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은 우리들의 노력이나 공로나 선행이라는 대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성령은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 성령은 우리가 돈 드려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선행과 공로를 쌓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공짜로 선물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주시는 가가 주요 쟁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는 선물인가?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데도 성령 받은 사람 있던가요? 그런 사람 보았으면 한번 이야기 해 보십시요. 성령은 모든 인류에게 주는 보편적인 선물이 아니라, 오직 예수 믿는 성도들, 즉 그의 아들과 딸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입니다. 본문 후반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 ~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 약속은 누구에게 해당된다고요? 너희는 누구입니까?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오순절 날 천하 각국에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와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가리키지요. 


또 이 약속이 누구에게 유효합니까? 너희의 자녀들~ 이 들은 누구입니까? 혈통적으로 유대인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유대인의 아들과 딸들은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이 혈통적으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효하지요. 이것을 무엇이라고요? 계약신학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또 누구에게 이 약속이 유효합니까? 모든 먼 데 사람들! 먼데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신약과 구약 성경에서 가깝다 멀다는 개념은 하나님과 멀다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은 가까운 사람이고, 이방인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 백성들입니다. 이런 이방 백성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방인들 모두를 불렀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수용하는 이방인들이 있고, 그 부르심을 거부하는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이 선물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이 약속이 이방인일지라도 유효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마찬 가지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 믿으라고 부르실 때에 예수를 영접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약속이 유효하지요.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과 또한 이방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선물로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지요. 물론 모든 사람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들 모두를 불렀지만, 그 부르심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을 선물로 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선물을 주시려고 부르시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받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못 받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안 불러서 선물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렀는데도 그 부르심을 거부했기 때문에 못 받았음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여서 예수를 믿게 되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성령을 받아서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일종의 비밀과 같은 것이지요. 그 비결은 오늘 본 절 말씀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듯이,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입니다. 베드로가 누구에게 이런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유월절 날 천하 각국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지요. 베드로가 본절의 말씀을 하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들의 중심 죄악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되시고 동시에 메시야이신 예수를 그들이 십자가에 매 달아서 저주스러운 죽음을 죽게 했습니다. 이 죄는 정말로 엄청난 대죄이지요. 메시야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중죄인일지라도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준다고요?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무리들이 37절에는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탄식을 하지요! 무엇 때문에 이런 탄식이 나옵니까? 메시야를 죽였다는 베드로의 책망을 듣고 마음에 자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자책이 일어나면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회개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회개하고 또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음 컨택스트에 보니, 행2:41절에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이 귀절에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기술은 안 하고 있지만 모두 성령을 받았음에는 틀림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인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나님이 폭포수처럼 부어 주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았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부어 주심은 하나님의 틀림 없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보스톤 땅에 살아 가는 우리들에게도 베드로가 말한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 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이루어졌지요. 우리도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성령을 모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거짓되지 않습니다.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우리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영감운동, 말씀운동,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자손 만대까지 전승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서 우리들이 지은 죄와 허물들을 자복하고 돌이킬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신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거룩합니다. 거룩하신 성령과 우리의 죄악은 우리의 몸 안에서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서는 성결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 올 수 없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죄악이 깨끗하게 씻기어진 심령 속에 성령이 들어 가십니다. 죄악과 더불어 한 평생 살 것인가? 아니면 죄악을 청산하고 성령과 함께 살 것인가?를 예수 믿는 성도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죄악을 청산하고 성령과 함께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가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선물을 모두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켐연장

2018.03.15 10:37:25

2018년 3월 9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030920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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