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15

일시:3/2/2018 

찬송가: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314장) 


시편 23:1-6절 


성경에는 하나님과 신도들과의 관계를 여러 imagery를 사용하여서 표현했다. 이마저리를 다른 말로 하면 그림 언어입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말1:6)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아주 많이 나오는 관계이지요. 또? 남편과 아내(사54:5,렘3:14)/목자와 양(시23:1,요10:11)/ 또? 포도원주인과 포도(사5:1-7,요15:1,5) 또? 토기장이와 진흙(렘18:6,롬9:20-21) 또? 왕과 백성과의 관계도 있지요. 


오늘 본문처럼 무슨 관계? 목자와 양(시23:1,요10:11)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업을 했던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목자와 양과의 그림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규정해 주었습니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는 신구약 성경에 또한 널리 이곳 저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비롯하여서 신약 성경 요한복음에도 히브리서에도 베드로 전서에도 기록되어 있지요. 


1절/한 번 같이 읽어 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의 목자라고 했지, 우리들의 목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목자도 되지만 하나 하나 신자의 목자도 되심을 말하고 있지요. 구약 시대에는 목자가 보통 자기가 돌보는 양들에게 이름을 개별적으로 붙여 주고 돌보아 주었지요.  

시100:3<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우리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을 '양'으로 비유했을까? 

야생동물처럼 사자,호랑이,독수리로 비견하지 않았을까요? 양들은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 낼 수 없습니다. 오직 양들의 생명은 목자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갑각류처럼 갑옷이 있습니까? 아니면 송곳니나 날카로운 발톱이 있나요? 아니면 들소처럼 무시 무시한 뿔이 있나요? 아니면 또 치타처럼 걸음이 빠르기나 하나요? 아무 것도 자기 방어에 쓸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양들은 목자 잘 만나면 그들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선한 목자는 늑대나 사자나 곰으로부터 양떼들을 넉넉하게 지켜 주지요. 어떤 어린 아이가 중병이 들려서 오늘 내일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 곁을 지켜 주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침대에 그 아이를 눕혀 두고 아이에게 시편 23편을 읽어 주었습니다. 영어로는 1절에 The Lord is my shepherd! 이지요. 그래서 그 부모가 아이의 작은 손가락 하나 하나를 만지면서 1절을 가르쳤습니다. The는 엄지 손가락, Lord는 두 번째 손가락, is는 세 번째 손가락, my는 네 번째 손가락, shepherd는 다섯 번째 손가락을 말입니다. 아이에게 그렇게 설명을 하고 아이를 침대에 뉘여 놓고 부모는 아래 층으로 내려 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아이에게 갔더니 아이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른 손으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꽉 움쳐 진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네 번째 손가락이 무엇이지요. My! 예수께서 그의 삶의 목자가 되신다는 신앙고백을 한 채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어떻게 맺는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슨 하나님? 나의 하나님! 

부족함이 없다! 누가? 내가! 그러나 나의 삶에는 부족함 투성이! 내 삶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없어서 무척 아쉽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합니다. 보다 충족된 삶을 위하여 우리에게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고, 건강도 조금 더 있으면 좋겠고,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공부 잘 하면 좋겠고, 뭐 이런 등등의 필요들 말입니다. 이런 육신적인 필요가 채워진다면 완전히 만족하는가? 그것도 아니지요. 조금만 더 라고 외치게 되지요. 왜 우리의 삶에서 늘 부족함 속에서 허덕이는가? 엡4:13에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그 아들을 믿는 것은 대단히 적다는 말입니다. 그 아들에 대하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우리의 믿음이 섞인다면 우리의 삶에는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예수 밖에 있을 때에는 우리의 심령 속에 부족함이 있어서 허덕거렸지만, 예수 안에 들어 온 지금은 우리의 심령이 충족하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충만을 누려야 하는데, 누리지 못한다는 데 우리의 신앙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예화)1등칸 표를 사고도 3등칸에 타고서 편하다고 만족하여서 잠들었다면… 


2절/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푸른 초장,쉴만한 물가! 풍요가 있고, 평화가 있는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목자가 양들인 우리들을 이런 곳에 인도하여서 쉬게 한다는 말입니다. 


양떼가 배를 땅에 깔고 네 발을 쭉 뻗고 쉬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양들이 푸른 초장에서 이렇게 쉴 수 있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배고픔. 목마름. 위험제거. 시샘. 파리 및 기생충제거. 모두 목자가 양 떼에게 해 주어야 하는 일들입니다. 푸른 초장/배고픔 해결/요6:35 쉴만한 물가/갈증 해결/요7:37-38 목자이신 우리 하나님은 보스톤에서 우리의 삶을 돌보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과 영적인 목마름도 해결해 주신다. 


3절/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이 풀을 많이 뜯어 먹고 포식하여서 구덩이에 빠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개스 발생하여서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서 죽게 됩니다. 눅15장에는 목자가 길 잃어 버린 양을 찾아 갑니다. 왜냐하면 그 한 마리 양이 이런 위험 속에 처하여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있는 양, 구덩이에 빠져 있는 양을 찾아서 살려 냈습니다. 우리는 다행하게도 우리 주님 눈에 발견되어서 이렇게 우리의 영혼이 소생되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우리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주인이 양떼를 기르는 목적? 양고기,양털,양가죽,양젖,종교적인 제사(희생제사)를 위하여 말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잘 돌보아 주면 자신에게도 좋고, 양떼에게도 좋다. Mutual benefit! 


목자가 양떼들을 인도하는 길을 무슨 길로 말하고 있는가? 의의 길, 복수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의의 길들로 되어 있습니다. 양들을 목자가 인도하지 않고 그대로 풀밭에 풀어 놓으면 양떼는 눈이 근시여서 자기가 있는 목초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한 장소에만 머물러 있어서 목초지를 망가뜨린다. 목자가 오늘은 양들을 이곳에서, 내일은 저곳으로 인도해 가야 한다. 목자가 할 일은 양들에게 살진 꼴을 먹어야 합니다. 목사가 성경 연구하여 말씀을 가지고 양떼들에게 먹어야 한다. 의의 길에서 길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의 길이란 불의한 길과는 정반대 되는 길이지요. 이 길은 의와 불의의 관점에서만 나누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세상적 번영(물질적 복),육신적 건강, 외면적 풍요가 또한 이 길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신8:18절<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요삼1: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몸이 강건한 것을 삼박자 구원이라고들 부르지요. 회심을 하고 신앙을 갖게 되면 이 세 부분에 구원이 나타난다고들 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적인 복입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마다 우리 하나님이 자신을 알아가게 하는 방법들이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한 평생 병고를 치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사업이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삼박자의 구원처럼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냥 삼박자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누림을 통하여 무엇을?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기를 원합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적은? 우리의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 보스톤에 살고 있는 나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준비하신 의의 길은 어떤 길인가? 목자가 인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목자의 판단,깨달음,능력에 따라서 의의 길을 선택해서 양떼를 인도해간다. 회의해서 의견을 모은 다음에 결정하여서 나갈 길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길은 옛길이고 진리의 길이고 우리 주님이 걸었던 길이다. 목자가 성경을 열어서 이해하고 깨달은 길인데, 목자가 앞서 가면 양떼가 따라간다. 이것이 인도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돼지 떼는 몰아가지요. 강물이 날이 추워서 살짝 얼었는데 눈이 살짝 내렸을 경우 어떻게 건너가야 할까? 찍힌 발자국을 따라서 걸으면 문제 없이 건널 수 있다. 


외통수 길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을 제시하고서 우리로 하여금 취할 때에 그 길에 있는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나 간혹 외통수의 길로 우리를 몰아 세우실 때가 있다.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과 삶에 회복하지 못할 데미지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강권적으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신다. 그 길을 선택하지 않게끔 상황을 만들어 몰아가시기도 하신다. 눈으로 보고가 아니라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 개-코, 원숭이-눈, 양-귀가 발달! 성도는 말씀을 잘 분변하여서 들어야 한다. 영의 귀가 발달될 필요가 있다.음성에는 영이 실린다. 기쁨,슬픔,즐거움,노함이 실린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모두 음성 가운데 실린다.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분변한다. 목자의 음성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변하고 참이면 믿음으로 받고서 세상 끝날까지 간직하라! 한 마디를 잘못 받아 먹으면 식중독 걸린다.  


참목자vs 삯군목자(거짓목자)/영분별의 은사(고전11:10), 열매(마7:15-16), 예수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는가? 


4절/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질문: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땅 위에 사는 동안 우리 인생길이 만사형통하게 되는가? 아니다. 역경과 고난은 믿는 자의 길에도 있습니다. 고난의 골짜기 밖에 우리 주님이 서 계시고 양떼들인 우리들만 그 골짜기로 들여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그 고난의 골짜기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겁 많은 양들이지만 담력을 얻어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신앙 때문에 일어나는 핍박과 고난을 의미한다. 지금이라도 신앙을 버리면 사라져 버리는 고통과 눈물을 의미한다. 

(예화)바다의 뱃사장 모래 위에 찍힌 두 세트의 발자국 


왜 고난을 주실까? 예수 믿기 전에는 고난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었지만, 예수 믿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려고 내리시는 것입니다. 저 멀리 푸른 초장과 시내가 있는데, 거기로 가기 위해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합니다. 다른 우회로가 있으면 좋겠지만, 오직 그 어두움의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거기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요? 외통수 길이다. 영혼 성장을 위하여 우리를 고난으로 길로 인도하십니다. 


욥23:10 욥23:10절<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인생의 최정점에 섰을 때에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하여 고난의 길로 인도하신다. 축복을 보존하는 안전 장치가 고난입니다. 바울/고후12: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님이 우리를 고난의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예수 믿음에는 고난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믿게 되면 육신적으로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고난도 함께 받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지금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14:22절<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딤후1: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안위의 수단/지팡이+막대기/지팡이는 구원의 지팡이이고 막대기는 야생동물과 싸우는 목자의 무기입니다. 막대기에는 1m 정도 되는 나무 막대기인데, 나무 끝에는 뾰족한 쇠 조각이 붙어 있습니다. 양떼들이 목자가 들고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볼 때마다 무엇을 느끼는가? 안위를 느낄 것이다. 지팡이를 통하여 내가 실족할 때에 나의 구원을 볼 수 있고, 또 막대기를 통하여서는 나를 죽이려고 덤벼 드는 원수들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지요. 목자의 지팡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기도를 상징하고, 막대기는 성령의 검, 즉 말씀을 가리킵니다. 


5-6절/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손님초대/Hospitality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요. 4절까지는 목자와 양과의 이미저리를 사용했고, 여기서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이미저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sheperd-king)이 다윗을 식탁에 초대했습니다. 발 씻어 주고, 기름을 발라 주고, 천국 잔치에 앉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잔이 넘칠 때까지 부어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VIP로 초대 받았습니다. 내 잔이 넘친다. 주인이 귀한 손님에게 권하는 잔입니다. 구원과 축복의 잔입니다. 마귀와 마귀를 섬긴 자들에게는 무슨 잔이 주어질까요? 진노의 잔! 이 구절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선 고대 이스라엘의 Hospitality, 손대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슨 희생을 치러서라도 주인은 자기 집에 들어온 손님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롯(창19:5-8) 레위 사람(삿19:22-26)/

기브아, 베냐민 지파의 땅, 에브라임 산지로 가는 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한다고요? 자기의 집에 초대한 귀한 손님으로 대우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일생 다 가는 동안 든든함을 느낄 것이다.


켐연장

2018.03.06 15:13:36

2018년 3월 2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030220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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